14화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뭐야?!’
겨우 손에 넣은 자유시간…이 아니라 작전타임을 이렇게 날리다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진짜 귀환자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그 무뚝뚝한 사내가 연관되면 자꾸 얼이 빠지는 것 같다. 사결이 서서히 움직이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응시했다.
저 안에는 이현수가 13인분의 스테이크를 양손에 든 채 온갖 욕을 하며 올라오고 있을 거다.
스테이크. 스테이크라.
‘미끼를 던져볼까.’
엉성한 함정이라도 해도 좋다. 그냥 떠보는 수준이니 준비할 것도, 위험부담도 적다. 방향을 정한 사결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정돈한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사나운 표정으로 들어오려던 이현수가 기겁했다.
“무, 문 앞에서 뭐 하십니-”
“3인분. 어느 거야?”
그가 얼떨떨하게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그걸 낚아채듯 손에 든 사결이 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건 네 점심이야. 많이 먹고 힘내서 일해. 세상에, 스테이크라니. 내가 이렇게 부하를 챙기는 상사라니까?”
“…….”
“나 나갔다 온다.”
문이 닫혔다. 발광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으나 사결은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마련된 소파 위에 쇼핑백을 올린 후, 파우더 룸과 비슷한 벽면에서 다시금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는 병원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귀환 추정자를 떠올렸다. 보고서 사진을 봤을 때 얼굴이 취향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진짜는 가슴이었지.’
증명사진이라 쇄골 아래로는 잘려있어 몰랐다. 쯧, 전신사진을 썼어야지. 사결은 이현수의 일 처리에 한탄하면서도 김철수의 가슴을 떠올리자 어쩐지 웅장해졌다.
‘…컸지.’
취향의 중심을 쏘다 못해 퍼펙트 골드였다.
스펜타 새끼가 날뛰었던 현장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눈이 갔다. 결코 얇지 않은 작업복 위로도 두께감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얇은 환자복을 입자 장난이 아니었다.
‘뭐, 계획대로 잘 풀리면 언젠간 제대로 보지 않겠어?’
사결은 지성인답게 여유와 인내를 갖기로 했다. 하지만 일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병문안 닷새째. 뭘 들고 찾아가도 ‘너 왜 또 왔냐.’ 싶은 뚱한 표정으로 저를 맞이하던 귀환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유와 인내를 갖고 행동한 그를 맞은 건 빈 병상뿐이었다.
* *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흡.”
갑자기 서늘해진 주변 온도에 놀란 간호사가 헛숨을 들이켰다. 사결은 웃으며 얼른 공기를 복구시켰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간호사는 겁에 질렸다. 내심 혀를 찬 그가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
“퇴원했다고요?”
“…네.”
웃음이 짙어졌다. 화를 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알겠다고 하고 병원을 나섰다. 습관처럼 단말기를 두드려 이현수에게 연락하려던 사결은 그가 이미 비공정을 타고 백담을 떠났다는 걸 기억해냈다.
“하.”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넓은 대로변에서 팔짱을 꼈다.
“생긴 것처럼 아주 깜찍한 짓을 해 주시네.”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병실에서 쫓겨난 이후, 사결은 당연히 조처를 했다. 병원의 높은 사람에게 직접 찔러 김철수가 절대 퇴원하지 못하게 하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놨는데.
‘말이 퇴원이지 그냥 튀었다는 거야.’
“수납하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가 주재영인지 주개영인지 하는 새끼가 신나서 결제하고 제 걸 채가는 꼴을 봤으면 열 받아서 병원을 무너뜨렸을지도 모른다.
사결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수정했다. 그가 다시금 단말기를 두드렸다. 상대는 신호가 세 번 울리기 전에 연락을 받았다.
[사, 사, 사결 길드장?]
“예, 협회장님. 접니다.”
[자, 자네가 웬일로 연락을 다….]
“뭘 모른 척하고 그러세요. 비공정을 협회 옥상에 댔는데.”
기분 상한 척 살짝 비아냥대자 협회장이 펄쩍 뛰었다.
[아니, 아니! 아까 보고받기로 비공정이 그리샤로 돌아갔다고 해서 난 당연히 자네가 떠난 줄 알았지!]
“반쪽짜리 보고였군요. 제 부하만 돌아갔습니다. 전 여전히 백담에 있죠.”
[…….]
영상통화도 아닌데 단말기 너머 협회장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보고한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명복을 빌어줬다.
‘뭐, 내 알 바 아니니까.’
사결은 속으로만 낄낄 웃었다.
“아무튼,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자네가 나한테?]
뱀이 왜 쥐한테 부탁을… 같은 어조였다. 사결은 모른 척했다.
“예. 안 됩니까?”
[그, 그럴 리가 있나! 뭐든 말만 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최선을 다해 들어줌세!]
“역시 협회장님, 내용도 듣지 않고 알겠다고 하시다니. 전부터 배포가 대단하신 분인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군요.”
칭찬에 어깨가 올라가는 기색은 없다. 대신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고 이러나 내지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부탁하려고 이 지랄인가 싶은 불안만 가득했다.
“그래서 본론이 뭔가.”
해석하자면 ‘불안하니까 제발 빨리 말해 이 새끼야.’ 가 되겠다. 사결은 좀 더 말을 빙빙 돌리며 놀려볼까 하다 관뒀다. 생각지도 못하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깜찍한 짓을 한 자신의 귀환자를 잡으러 가야 했다.
“일단은 후처리과에서 일하는 사람의 정보를 좀 받고 싶은데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단말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후처리과라니. 거긴 왜?]
“제가 아주 깊고 진득한 관계를 형성해 보고 싶은 사람이 거기서 일하더라고요? 아, 맞다. 거기 주재영이라는 과장 있죠? 그 인간 자르고 제가 그 자리에 임시직으로 앉고 싶은데.”
[…….]
“협조, 해 주실 거죠?”
백담시 헌터 협회의 협회장은 끝내 말이 없었다.
* * *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 후, 삼일은 방에 칩거했다. 일도 나가지 않았다. 박명석에겐 몸은 다 나았지만 조금 쉬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여행을 갈 것처럼 말을 해두었으니 그런 줄 알 것이다.
집에만 있으니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이미 몇 번의 탈피를 거친 몸이었다. 체력 단련 같은 건 의미가 없다.
‘사전이나 볼까.’
두꺼운 사전을 펼쳐 몇 장 넘겼으나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한숨을 쉬며 벽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생각이 근 며칠간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갔다.
병원에선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귀환자라는 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건 뒤늦게 떠올렸다. 혹시 들켰으면 어쩌지, 계획을 앞당겨야 하나, 등등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결과적으로 들키진 않았다.
어쨌든 식겁한 건 사실이라 검사가 끝나고 곧바로 퇴원하려고 했는데
‘…퇴원이요?’
간호사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담당의에게 물어본다는 말도 없이 어물거리며 대답을 피한 그녀가 도망치듯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간호사와 교차해 쇼핑백을 든 사내가 들어왔다.
‘저 왔습니다!’
‘…….’
가라.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중간계에 돌아오고 제일 어려운 게 대화였는데 이 사내 앞에선 조금만 방심하면 말이 막 튀어나오려 했다.
‘저 보고 싶었습니까?’
‘…아ㄴ’
‘하하. 농담입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손끝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쫓겨나고 무슨 수를 썼는지 사내는 몇 시간 만에 병실 재출입권을 얻어냈다. 그러곤 음식을 사다 날랐다. 나는 당연히 거부했다.
‘안 먹어요? 그럼 버리죠.’
‘……!’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자 사내가 싱글거렸다. 농담이 아니다. 두 번 거절하면 멀쩡한 음식이 쓰레기통으로 갈 판이었다. 과거 배를 곯았던 기억 탓에 음식에는 약했다.
결국 한숨과 함께 받아들었다.
엊그제는 소고기더니 어제는 갈비였고, 오늘은 초밥이다. 색색으로 놓인 정갈한 초밥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은근한 사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다음날 또 찾아왔다. 이번엔 고급 도시락이었다. 나는 먹음직스럽게 펼쳐진 도시락을 묵묵히 응시했다.
‘왜.’
왜 자꾸 오는 겁니까.
완성되지 않은 말에도 사내는 능숙하게 답했다.
‘글쎄요. 왜일까요.’
잘만 나불거리더니 이런 대답은 피한다. 이제 오지 마십시오. 그 말이 나오기 전, 사내가 생글거리며 선수를 쳤다.
‘이렇게 하죠. 제가 왜 이러는지 맞추면 이제 귀찮게 안 할게요.’
‘…….’
나는 오후 내내 고민해서 세 번의 답을 말했지만 셋 다 정답이 아니었다. 사내는 내가 고민하는 공백의 시간을 이야기로 채웠다.
딱히 정해진 화제는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아 대화도 성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물 흐르듯 말이 자연스러웠다. 광범위하던 화제는 어느 순간 음식과 동물로 좁혀졌다.
‘부하직원 중 하나가 강아지를 키웁니다. 얼마 전에 출산에서 엄마가 됐는데, 태어난 강아지들이 어미랑 아주 판박이에요. 저한테도 사진을 보내줬는데 귀엽더군요. 보시겠습니까?’
안 보려고 했는데 의지를 배반한 눈동자가 굴러갔다. 단말기 화면엔 점박이 개가 혀를 빼물고 웃고 있었다.
나도 영주성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이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말이었다. 귀엽다기보다 멋있는 쪽에 가까웠고 애교는 많았다.
크라투스에게 끌려가며 그대로 헤어졌는데, 남은 마족들이 잘 챙겨줬으리라 믿는다. 반대로 쫓아냈어도 잘 살아남았을 것이다. 본래 평원에서 무리의 우두머리를 하던 녀석이었으니까.
‘이 근처에 커다란 쇼핑몰이 하나 있어요. 영화관, 오락실, 식당, 카페가 복합적으로 딸린 멀티플렉스죠.’
아. 이건 관심 없는 거다.
나는 안도했다.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 설명할 순 없었다.
‘그 근처의 테라스 카페가 케이크로 유명해요.’
케이크.
한 단어가 심장에 꽂혔다. 먹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 생일이 다가오면 그 말에 그렇게 설레었다. 멍한 표정을 짓자 마주 앉은 사내의 눈이 살짝 빛났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과일 케이크에 진득한 생초콜릿을 듬뿍 얹은 쇼콜라 타르트 그리고 자허토르테가 특히 맛있다고 하던데.’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켜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뒤늦게 흠칫했다. 혹시 봤을까. 사내를 힐끔거리자 그가 활짝 웃었다.
‘나중에 같이 가 봐요.’
‘…….’
그날 밤. 나는 몰래 병원을 빠져나왔다. 거기 계속 있다간 뭔가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뭔가가 대체 뭔지,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 몰라도 좋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난 그냥 이대로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