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나는 그에게서 일종의 아득함을 느꼈다. 내 인생에 미친놈은 크라투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는데, 타입만 다를 뿐 이놈도 제정신은 아니다.
환자복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마족들은 태도가 명확하고 요구는 직관적이다. 원하는 게 있다면 확실히 말했다. 꼬우면 덤벼라. 적들을 섬멸하고 와라 등등.
중간계는 달랐다. 쉬운 말도 어렵게 돌려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그것 때문에 곤혹스러운 일도 많이 겪었다.
내가 후처리 일을 하는 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보수가 좋아서인 것도 있지만, 최소한의 소통을 해야 할 동료들의 화법이 직설적이라는 점도 컸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이 사내가 말하는 의도를 전혀 짐작할 순 없었지만 말이다.
빼돌린 마정석을 언급했다. 협박하려는 건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가벼운 태도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 한다. 그러곤 갑자기 내 목소리가 섹시하다고 칭찬했다.
허용한계를 벗어난 미지(未知)에 두통이 일었다. 마계의 방식에 물든 머리가 쉽고 빠른 방법을 제시했다.
‘…죽일까.’
끼익.
타이밍도 좋게 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에 벽처럼 우뚝 선 사내가 날 향해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이 왼쪽 어깨를 쥐었다. 살기는커녕 호감만 가득한 손길이어서일까, 방어적으로 한발 앞서 움직이려던 손이 멈칫했다.
그렇게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은근한 악력이다. 그게 꼭 내가 체감하는 사내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사내가 그토록 꺼려진 이유를 깨달았다.
‘…애매해.’
깊지도 얕지도 않은 선.
그는 계속 그 선에 서 있었다. 넘을 듯 말 듯 간을 보는 솜씨가 절묘하다. 앞뒤 생각하지 않았던 마계의 종자들과는 정반대였다.
깊이 파고 들어오면 날을 세워 밀어내면 된다. 멀찍이서 보기만 한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괴생물체는 다 안다는 것처럼 웃으며 회색지대에 둥지를 틀었다.
상극.
파업 직전인 뇌리에 그 단어가 인장처럼 박혔다.
“몸이 꽤 좋네요?”
“…….”
“따로 운동하는 게 있나 봐요? 후처리과 일만 가지고 만들어질 몸이 아닌데.”
은근슬쩍 미끄러진 손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싱글싱글 웃는 사내를 보며 눈만 굴렸다.
드르륵, 쾅!
“형! 괜찮아요?!”
살았다.
굳어 있던 몸을 옆으로 홱 기울이며 문을 봤다. 누군지 몰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도움이라는 생각은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깨끗하게 사라졌다.
주재영이었다.
“뭐야, 당신 누구야?”
사내를 발견한 그가 대번에 경계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아주 혈기가 넘치다 못해 줄줄 흘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명품에선 과시욕과 자기애가 엿보였다.
사결은 대답 없이 웃었다. 유일하게 차가운 눈동자가 슬쩍 나를 곁눈질했다. 말이 표정에서 읽혔다. 저 애송이와는 무슨 사이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렇게 대답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래도 주재영은 현장에서 몇 번 보고 말이라도 섞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이 사내 쪽이다.
물끄러미 보자 어울리지도 않게 순진한 척을 하며 웃는다. 그래, 저 태도가 문제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런지 자꾸 말려들었다.
“세상에 얼굴이 완전히 상했네. 어디 봐요. 얼마나 다친 거예요?”
주재영이 호들갑을 떨며 침대로 왔다. 중간에 사결의 어깨를 친 건 틀림없는 고의다.
불시에 뻗어진 손이 몸 이곳저곳을 부산하게 더듬었다. 인부들에게 한차례 당했던 일이지만 그들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감출 수 없는 불쾌함이 치밀었다.
놈이 걱정 어린 얼굴로 환자복을 들췄다. 근육질의 배가 드러났다. 여기서 더 하면 가슴의 상흔이 보일 판이었다. 당황해서 황급히 환자복을 잡아 내렸다. 동시에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주재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게 뭐 하는 개수작이실까.”
웃고 있는데 웃는 것 같지 않다. 사내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일렁였다. 주재영이 흠칫했고 나도 내 나름대로 놀랐다. 고작 얼음 조각 하나로 스펜타를 침묵시켰을 때 보통이 아니라는 건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은은하게 드러난 힘이 범상치 않다. 중간계에 온 이후 잊고 있던 긴장이 몸을 경직시켰다.
얼이 빠져 있던 주재영이 뒤늦게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가 얼굴을 붉히며 주먹을 휘둘렀다. 가볍게 피한 사내가 손을 놓음과 동시에 주재영에게 발을 걸었다. 형편없이 바닥을 구른 주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아주 새빨갰다.
“쯧쯧, 병실에서 무슨 짓이야. 개념이 없어 보이긴 했는데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는 아주 막돼먹은 놈이었잖아?”
“뭐, 뭐?!”
“철수 씨. 이런 사람과 어울려 좋을 게 없습니다. 몰랐다면 이참에 잘라내는 게 어떻습니까?”
“허,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눈이 뒤집힌 주재영이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실낱같은 이성은 남았는지 능력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마력운용계는 능력 없이 싸워 이길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참 동안 허공에 주먹질을 한 주재영이 마침내 헉헉거리며 물러났다. 사내는 여전히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씨발, 너 뭐 하는 새끼야?!”
“음. 우연히 지나가던 A급 헌터?”
“그게 뭔-”
“그러다 위기에 처한 하급 헌터 한 분을 봤는데, 이게 웬걸. 너무 잘생긴 거야. 그래서 한눈에 반해버렸지.”
거기까지 말한 사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네 새끼가 들어오기 전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다 망했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이거 순 미친놈 아냐?”
살다 살다 주재영의 의견에 동의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정확히 같은 심정이었다. 그냥 돈 것도 아니고 두 바퀴 반쯤 돌아버린 미친놈이다. 사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취미가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인가? 내가 보기엔 너도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할 순 없었지만, 주재영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했다. 굳은 표정이 된 그가 갑자기 내 눈치를 봤다.
그렇게 본들 난 이게 지금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른다. 슬쩍 시선을 피하자 주재영이 다시 사결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핏발 선 눈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기애가 넘쳐도 눈은 있다. 사결은 키도, 몸도, 얼굴도 객관적으로 주재영보다 훨씬 나았다.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라고? 거긴 외곽지역이야. 그 이른 시간에 거길 우연히 지나간다는 게 말이 되나?”
“납골당에 뵐 분이 있었거든. 옛 은사분인데 내가 이래 봬도 바쁜 몸이라서 말이지. 그때밖에 시간이 안 나더군.”
“A급 헌터라고 했지. 소속 도시가 어디지?”
외모로도, 등급으로도, 말로도 밀린 주재영이 이번엔 뒷배를 들먹였다. 사결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뭐, 어디 대단한 뒷배를 둬서 소속을 물으실까. 이런 티끌만 한 도시라면 뒷배가 아무리 대단해 봤자 좀 큰 티끌일 텐데.”
“이 새끼가 진짜!”
“아, 됐어. 대충 무슨 생각인지 알겠으니까 말 안 해도 돼. 비공정? 그래그래 비싸지. 심지어 장거리 이동이면 마정석 먹는 하마가 따로 없지.”
뜬금없는 말에 주재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설마, 하는 감정이 실렸다. 나른하던 사내의 웃음에 상대를 깔아보는 경멸과 오만이 섞인 건 바로 그때였다.
“근방 소도시에서 휴가 온 헌터 출신 사업가 정도로 생각했나 봐?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난 비공정으로도 나흘은 걸리는 곳에서 왔는데.”
주재영이 굳어졌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당황한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나도 의외긴 했다. 백담은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도시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사내의 말처럼 상상도 못 할 양의 마정석이 필요했다. 어지간한 초대형길드의 간부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이 사내가 간부에 필적하는 위치의 사람이라는 건데.
“…….”
그 길드는 길드를 말아먹기로 작정했나?
주재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놈, 틀림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거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주재영에게 공감해버렸다. 눈가가 잘게 떨렸다. 내내 주재영을 향해 있던 사내의 고개가 팩 돌아갔다.
“방금 눈매 찌푸린 겁니까?”
“…….”
“계속 무표정이더니, 이런 거엔 또 반응하는 게 귀엽네.”
뭐?
‘귀, 귀엽….’
상상도 못 한 말에 뇌까지 굳어버렸다. 최악 대신 차악을 택하는 마음으로 주재영을 봤지만, 그는 사내의 ‘비공정 나흘 거리’ 발언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킨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결국 혼자 삐걱거리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단발머리의 간호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김철수 님, 검사를… 여기 무슨 일 있습니까?”
그녀가 당장 비상벨을 누를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사내가 무해한 척 웃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시죠?”
병원에서 일하면 자연스레 얻게 되는 초인적인 감이라도 있는 걸까. 그저 웃기만 해도 호감이 생길 것처럼 매끈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호의적으로 묻는데도 간호사는 여전했다. 오히려 병실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욱 경계하며 내게 물었다.
“김철수 님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보호자가 누구시죠?”
“접니다.”
“접니다.”
사결과 주재영이 동시에 대답하고 동시에 서로를 노려봤다. 간호사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나를 향해 다시 물었다.
“보호자가 누구신가요?”
“없습니다.”
즉답이었다. 중간계에서 내내 겪었던 말의 어려움이 이 순간 싹 사라졌다. 간호사가 마네킹 같은 얼굴로 사결과 주재영을 돌아봤다.
“두 분 다 나가주시죠.”
“…….”
눈치를 보던 사결이 손을 들었다.
“병원비는 제가 수납….”
“나가세요.”
“…….”
두 사람은 맥없이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