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진담인 건 알겠는데 대체 나한테 왜 그러나.
나는 그 후로 말을 잃었다. 반드시 의사를 전달해야 할 일이 생기면 필담을 나눴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 자체도 줄었다. 나는 담담하게 스스로를 걸어 잠갔다. 그게 무엇이든 새어 나가지 않도록. 크라투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새끼. 더럽게 마음에 드네.”
“…….”
크라투스는 나를 옆에 끼고 살았다. 그것까진 견딜 수 있었다. 견디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와 조금이라도 친해졌다 싶은 마족을 전부 죽여 버리는 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마음의 한 자락도 아니다. 그저 얼굴을 익히고 정을 조금 붙였다 싶은 상대라면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결국 나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게 됐고 내 시중은 크라투스의 그림자가 세뇌한 마족들이 들게 됐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었다. 그림자가 지시하는 것만 기계적으로 수행했다.
인형들 틈에서 나 또한 인형이 되어 갔다.
크라투스는 만족했다.
* * *
평상시 하는 행동이나 내게 하는 걸 봐선 다시없을 폭군인데 그는 의외로 성실하게 집무를 봤다. 나도 그 옆에 붙들려 있느라 사방이 책으로 가득한 서재에 틀어박히게 됐다.
“심심하면 책이라도 보든가.”
마왕성에 끌려오고 5년, 마계에 떨어진 지는 이제 15년째였다.
마계어도 능숙하게 구사하고 글도 읽을 줄 알았지만 이런 건 처음 봤다. 다른 나라 언어인가. 마계에도 나라가 있나. 무심하게 생각하고 닫으려던 찰나였다.
“고대어네. 고대어에 관심 있었어?”
뒤에서 불쑥 크라투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가르쳐 줄까?”
차마 싫다는 말을 못 해 어쩔 수 없이 고대어를 배웠다.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내가 가르치는 것 따위 배울 가치도 없다 이건가?’라고 할 수도 있는 녀석이라 열심히 했다.
세상에 헛된 배움은 없다고 했던가.
고대어 강의.
그게 내가 크라투스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일이었다.
서재 구석에서 그 책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책의 겉면이 어두운 붉은색이라서, 장식이 화려해서 등 그런 이유로 선택한 책을 손에 쥔 순간 형제처럼 자란 고목에 등을 기댄 것 같은 묘한 안정감이 전신을 감쌌다.
홀린 듯 책을 펼쳤다. 그 안에서 낯익은 마법진을 발견했을 땐 숨이 멎을 뻔했다.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건물 바닥에 있던 바로 그 마법진이었다.
고대어로 쓰인 책을 첫 장부터 집중해서 읽어 내려갔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전부 다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그러다 맨 마지막 장. 휘갈겨 쓴 듯한 서명에 시선을 빼앗겼다.
일레이스 레기아투스.
마왕의 계보는 용마족에게만 이어진다. 하지만 현재 마왕성에서 레기아투스라는 성을 쓰는 용마족은 크라투스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이 이름의 주인은 대체…
신경은 쓰였지만 당장은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책을 움켜쥐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
‘돌아갈 수 있다.’
심연에 처박혀 있던 희망이 꿈틀, 몸을 뒤집었다.
‘도망칠 수 있다.’
손을 들어 심장 위를 짚었다. 종속의 계약. 이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마계에 떨어지고 20년이 흘렀다. 나는 스물여덟 살이 됐다. 그리고 그해 초 마계의 구석진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왔음을. 도끼를 꺼내 등에 짊어지고 크라투스를 찾았다.
그는 아침부터 가신들을 모아 군사회의를 하고 있었다. 성실한 폭군다웠다.
만류하는 기사들을 제치고 내 손으로 문을 열었다. 장내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빙룡의 눈이 위아래로 길게 찢어졌다. 그걸 마주하자 하려던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어딜 가려고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었어.”
크라투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주변의 공기는 서리가 떠다닐 만큼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는 와중, 그의 그림자가 나섰다. 나와 말을 섞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그에 대한 크라투스의 신임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속으로만 실소했다. 어쩌다 보니 신임측정기가 된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다.
“군단장께선 출전을 청하고자 오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지만 크라투스는 나를 데려올 때 군단장직을 주었다.
“맞아. 예니스는 군단장이었지.”
그가 오, 하고 감탄했다.
“설마 날 위해 반란을 진압하러 가겠다고 나선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한 짓이었지만 지적하는 자는 없었다. 그저 숨을 죽인 채 놀란 표정으로 나와 크라투스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주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찬 서리가 내렸던 공기가 봄날처럼 따듯해졌다. 놈은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군. 그런 거라면 당연히 허락해 줘야지.”
이건 예상외였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왜 놀라. 내가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허둥지둥 아니라며 고개를 숙여 보이곤 자리를 벗어났다. 출정 준비를 서두르는데 누군가가 나를 따라왔다. 그림자였다.
“예니스 군단장.”
뒤를 돌자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내게서 뭘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림자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아니, 표정이 있는 마족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항상 나와 비견될 무표정을 고수하던 자가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들킨 걸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짓을? 그의 그림자에게?
‘죽일까.’
내 마음의 소리와 교차해 그가 말했다.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크라투스에게 돌아갔다.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말이 내 귀에는 ‘절대 들키지 마십시오.’처럼 들렸다.
* * *
전장은 이미 전투가 한창이었다.
나는 고지대에서 전황을 살폈다. 옆에는 크라투스가 붙여준 다른 그림자가 함께했다. 그는 촉새 같은 자였다. 크라투스를 칭송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 교묘하게 나를 깎아내렸다.
내가 실수인 척 그의 말에 대답하고, 그 소식이 크라투스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저렇게 떠드는 걸까. 시끄러운 주둥이에 도끼를 꽂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런 놈이라도 쓸 곳은 있었다.
피아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난전이 벌어지는 전장의 한복판. 드디어 때가 왔다.
옆에서 나를 열심히 보조하던 그림자의 손발을 공허로 고정했다. 산 채로 박제된 그가 당황해서 침을 튀겼다.
“무슨 생각이냐!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한 귀로 흘리고 상의를 찢듯이 벗었다. 가슴 중심부부터 왼쪽 가슴까지 새겨진 종속의 계약진을 피부 채로 뜯어냈다. 뜨끈한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고통으로 눈앞이 아찔했다.
“대,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심상찮음을 느낀 그림자가 겁에 질렸다. 실혈로 비틀거리면서도 눈을 부릅떴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었다.
놈의 옷을 벗기고 심장 위에 피가 뚝뚝 흐르는 거죽을 올렸다. 그리고 섬세하게 마기를 운용해 놈에게 융합시켰다.
치이익.
“으아악!”
살이 눌어붙으며 독한 마기를 분출했다. 놈이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덜덜 떨었다. 온갖 저주의 말을 뱉으며 녀석이 눈과 입에서 피를 쏟았다. 융합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잠깐이지만 나와 크라투스간의 연결이 매우 약해졌다.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도끼를 휘둘러 놈의 목을 벴다. 몇 번 경련하다 축 늘어진 몸을 바닥에 눕히고 그 위로 불을 질렀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정석을 꺼내 바닥에 깨트렸다. 고대의 진이 새겨진 마정석은 나를 순식간에 마왕성의 지하로 옮겨줬다.
“헉. 하아.”
사슬에 매인 마물들이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해 날뛰었다. 놈들의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바닥에 그려진 진의 모퉁이마다 하나씩. 전부 다섯 마리다.
떨리는 손끝으로 중앙을 짚었다. 피가 고이기 시작한 진이 빛을 뿌렸다.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영주성에서부터 몰래 모아왔던 게이트석을 꺼내 진 위에 떨어뜨렸다. 후두둑, 조각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진이 내뿜는 빛도 강렬해졌다.
화아악!
흐려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마력을 운용했다.
끼에에-
키아악!
매개체로 묶여 있던 마물들이 발작했다. 첫 번째 마물의 머리가 퍽 터져나갔다. 바로 연이어 옆의 놈이 고꾸라지고 세 번째 놈이 사슬을 끊을 기세로 날뛰었다.
‘조금만 더.’
사슬의 소리가 사라졌다. 세 번째 놈이 죽고 네 번째 놈이 죽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의 머리가 부풀어 오르며 마물이 경련했다.
세상이 하얗게 삼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