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화
프롤로그
사결은 회식이 무르익어가는 내내 여원을 주시했다.
점점 술에 취해가는 인부들에게 아무 말이나 던지는 와중에도 눈만큼은 여원에게 가 있었다. 처음부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는 그 자체로 견고한 성 같았다. 낯선 이에겐 일말의 틈조차 허용치 않는 그런 성.
이런 상대에겐 어쭙잖은 꼼수는 통하지 않고 들켰을 때의 리스크도 큰 법이다.
사결은 결심했다. 우선 클래식하게 가자고.
‘일단 환심을 사고 신뢰를 얻는 것부터.’
검은 속내나 날카로운 독니는 깨끗하게 숨겼다. 병실 문이 닳도록 드나들며 이것저것 사다 나르고 사람 좋은 모습만 내비쳤다. 돌이켜 봐도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런 자신을 비웃듯 홀랑 사라졌다.
쩌적.
들고 있던 유리컵에 금이 갔다. 몰래 저를 보던 인부의 동공이 떨렸다. 사결은 모른 척하고 자리 밑으로 컵을 내렸다.
떠올리자 새삼 속이 뒤틀렸다. 그걸 감추기 위한 온화한 웃음과 함께 그는 다시금 여원에게 시선을 주었다.
“…….”
뭐야 저게.
뒤늦게 상황을 목도한 사결이 당황으로 굳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 * *
“아이고, 이렇게 올리니까 인물이 훤하네.”
“전부터 치렁치렁한 게 영 거슬렸단 말이지. 이참에 가서 확 자르는 건 어때?”
“…….”
“뭐여, 왜 대답이 없어.”
“딱 봐도 취한 애한테 뭘 물어봐.”
“아 그래? 우리 철수가 취했구만!”
그렇게 말하는 사내도 취했다. 옆에 있던 인부가 잘됐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럼 지금이 기회 아냐?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끌고 가서 잘라 달라고 하자고!”
“그거 좋은 생각인데!”
좋긴 뭐가 좋아.
사내는 앞머리를 까서 묶은, 일명 사과머리라고 불리는 머리를 한 채 꾸벅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맛이 간 모습이다. 뺨까지 붉으니 진짜 사과가 따로 없었다. 사결은 기묘한 표정이 됐다.
이 자리를 만들며 자신이 원한 건 분위기였다. 박명석과 인부들의 도움을 받아 경계심을 조금 허무는 정도면 만족스러운 성과겠거니 했다.
‘그런데 마기에 내성이 있는 인간이 알코올에 내성이 없어? 그게 말이 되나?’
이 새끼 귀환자 아닌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자연히 하람과 이노스에서 헛걸음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이현수가 옳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끓으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다들 어느 정도 취한 와중 홀로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는지 유독 취한 인부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 왕년에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했었다고! 어?! 내 밑에만 오십 명이 넘게 있었어. 사람 통솔하는 거. 그거 보통 일 아냐!”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하기로 했다. 더는 참을 이유도 없지 않나. 그런데 나보다 먼저 말을 얹은 사람이 있었다.
김철수였다.
“그렇죠. 그렇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리의 사과 꼭지가 같이 흔들렸다.
“오, 역시 우리 철수는 알아주는구나!”
“예. 저도 군단을 통솔할 때 꽤나 애먹었거든요.”
놈이 눈을 휘며 웃었다. 입을 열자 지금 느끼는 심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하하, 이런 미친.”
저거 귀환자 맞네!
“군단? 무슨 군-억!”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인부를 밀어냈다. 힘없이 밀린 인부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바닥에 모로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주정뱅이들은 왁자하게 웃었다. 조금 덜 취한 이들만 저게 맞나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덜 취했을 뿐 술 들어간 건 매한가지라 그들도 자는 사람은 금방 잊고 다시 저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했다.
“제 군단은… 마계… 읍.”
‘닥쳐라. 이 사과 새끼야!’
술이 올라 발갛게 익은 주정뱅이의 입에 아무거나 쑤셔 넣었다. 새우튀김이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는지 움찔한 김철수가 우물우물 튀김을 씹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 생각이 없는 거다. 사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함정이니 유도심문이니 고민했던 게 다 부질없었다. 이현수도 그리샤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술 먹은 사과 새끼는 앞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귀환자였다.
* * *
1장. 소년기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은 엉망이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거기서 현대기술로는 감당되지 않는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전체 인구의 반절 이상이 사망했으며 그와 비슷한 시기에 1세대 헌터들이 각성했다. 그들은 마물을 때려잡고 게이트를 닫았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같은 자리에 다시금 게이트가 열렸다는 거다. 재생성 주기는 게이트마다 달랐지만 몇 번을 닫아도 게이트는 다시 열렸다.
결국 헌터들은 약한 게이트가 발생하는 땅을 골라 도시를 건설한 뒤, 내부적으로 영구히 청소를 이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밖은 포기하지만 내부만큼은 완벽한 통제로 안전지대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120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도시국가의 시초였다.
* * *
백담은 아주 작은 도시국가였다.
S급도, A급도 없는 낙후된 도시 중에서도 가장 그늘진 곳.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지하 단칸방이 나와 아버지가 사는 곳이었다.
내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입만 열면 욕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고 술이 없으면 당장 사 오라고 물건을 던졌다. 술을 마시고 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손찌검을 하다 이내 고꾸라져 잠을 잤다.
드물게 함께 나갈 일이 생기면 욕을 하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는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따라가기 벅찰 만큼 빠르게 앞서 걸었다.
목적지는 언제나 헌터 협회의 복지 센터였다. 직원들은 우리가 갈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멍 자국 봤… 애가 불쌍… 협회에서 나오는 보조금이나 타 먹는….”
“왜 저런 놈들까지? 세금 낭비잖아.”
“뭐, 어쨌든 아이가 …니까.”
그들은 늘 아버지와 나를 보며 숙덕댔다. 마치 우리가 상종하기 싫은 벌레라도 되는 양 말이다.
“친구. 혹시 책 좋아하니?”
그런 대우가 익숙해져 갈 때쯤 갈 때마다 유일하게 말을 걸던 젊은 직원이 하루는 내 손에 책을 쥐여줬다. 아주 어린애들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이었다.
나는 책을 힘있게 쥐었다. 처음 받아보는 선물에 살짝 마음이 들떴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이런 거 줄 필요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집에서처럼 낚아채 던지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동화책을 옷 속에 숨겼다. 아버지는 내가 거슬리는 이유가 ‘눈에 보여서’라고 했다.
‘안 보이면 안 거슬리겠지.’
다행히 예상은 들어맞았고 동화책은 그날 밤까지 무사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잠든 후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동화책을 펼쳤다. 세상의 끝에 자신만의 얼음 성을 세운, 공허한 마음을 가진 여왕에 관한 내용이었다.
* * *
집에 있는 낡은 브라운관 티비는 항상 영화 아니면 뉴스였고, 첫 뉴스는 늘 그날 헌터들이 백담에서 잡은 마물을 보여줬다.
영화의 괴물보다 훨씬 괴물 같은 모습이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진짜 무서운 건 이미 죽어서 트레일러에 실려 가는 괴물 같은 게 아니었다.
“저런 거 한 마리가 몇천만 원에서 몇억이라니. 씨발 진짜.”
아버지가 역정을 냈다. 눈치를 보다 ‘밥 사 올게요.’ 하고 문을 나섰다. ‘이 새끼, 미리 안 사다 놓고 뭐 했어!’ 걸걸한 외침이 날아왔다.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기분이 나빠진 아버지에게 맞지 않으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빈민가에서 번화가로 이어지는 골목의 경계에 항상 가는 편의점이 있다. 좋은 사장님이 있는 곳이라 때때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받곤 했다.
편의점 근처에 다다르자 멀리 번화가의 고층빌딩 사이로 노을이 길게 드리우다 사라졌다.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 거대한 전광판은 기다렸다는 듯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침 광고가 끝났는지 화면 위로 백담시 전도가 떠올랐다. 당일 열릴 예정인 게이트를 표시한 지도였다.
사람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게이트 오픈 예정 시간이 되면 협회에서 주변을 통제하고 헌터는 미리 대기하다 마물이 나오기 무섭게 도살해 협회로 옮긴다. 현대의 게이트 사냥은 그 과정의 반복이다.
검게 가라앉은 화면이 다시 광고를 내기 시작했다. 나도 멈췄던 걸음을 재게 놀려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을 열고 인사를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앙!
멀리 내가 지나왔던 길의 끝에서 폭발이 일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길을 내달렸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거리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 잡아당기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편의점 사장님이었다. 재빨리 가게의 불을 끈 그가 나를 데리고 카운터 아래로 들어갔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검지를 입술 위에 댔다. 나는 순순히 침묵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정보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공고-통제-도살의 과정을 반복하는 일반적인 게이트 현상을 벗어난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열릴 때가 됐는데도 열리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좋은 경우, 다른 하나는 주기의 시작점인 첫 번째 게이트가 열리는 아주 나쁜 경우다.
사람들은 후자를 ‘이레귤러’라고 부르며 무서워했다. 이레귤러 게이트는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열렸고, 그 특성상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모든 걸 찢어발길 것 같은 폭발의 굉음을 들은 직후, 나는 그 말뜻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높은 비명, 인위적으로 부서지고 무너지는 건물의 소리, 이계의 짐승들이 내는 울부짖음까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것들이 끔찍하고 공포스러웠다.
그럼에도 사장님과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전광판에 떠올랐던 붉은 점. 그중 한 곳의 위치가 여기서 가까웠다. 과연 오래지 않아 그쪽에 있던 헌터들이 지원을 왔다.
이레귤러 게이트에서 나온 마물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잡아먹느라 장소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에 사망자 수는 단 세 명에 불과했다. 이레귤러 게이트치곤 적은 피해였다. 이번 사망자들은 정말 더럽게 운이 없었노라고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았다.
내 아버지가 그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