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피체… 나 지금 농담 주고받고 싶은 심정 아냐.”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그런데 혼자 하기 벅찬 것 같은데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
“…….”
이안은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기에 혹시라도 있을 사고에 대비해 이곳에서 지켜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 진짜 한다면 하는 놈이라고. 절대 말리지 마!”
“안 말려.”
이안은 의자에 올라가 줄을 천장 봉에다 걸고는 목을 매달려 했다. 그때 들려오는 음성.
“잠깐! 줄이 가늘어서 네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끊어질 것 같은데… 이왕이면 굵은 걸로 구해 오지 그랬어.”
“…….”
“네가 모가지만 잘 매달면 딛고 있는 의자는 내가 발로 가볍게 쳐 줄 수 있는데.”
“넌 내가 지금 장난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게 아니라는 걸 당장 보여 주지.”
처음엔 그저 객기로 목을 매려 했지만 직접 줄과 의자를 준비해 놓자 점차 실제로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가. 사람이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의미가 없거나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아직 반년이란 시간이 남았지만 왠지 그 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지금 이 순간 결행을 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낫다 싶었다.
그리고 결행을 한 순간.
“욱.”
수초도 안 되어 그의 외침이 들려왔다.
“살려 줘! 숨 막혀! 쾍! 쾍!”
빤히 쳐다보는 피체.
“…….”
“사, 살려 줘…….”
시뻘게진 얼굴, 축 늘어진 모가지, 마치 칠면조가 버둥거리는 것 같았다. 헌데 순간 줄이 툭 끊어지면서 바닥 아래로 곤두박질쳐진다.
“헉! 헉!”
피체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죽을 용기도 없는 바보.”
그때 갑자기 이안은 두 손으로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넌 방법을 알고 있지? 아니 틀림없이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 있는 거고. 짐 싼다는 것은 핑계야……. 떠날 마음만 있다면 조금 전에 벌써 갔겠지, 그런데 이곳에 있다는 것은 나한테 그 어떤 말을 하기 위해서 아냐? 내 말이 맞지. 아니 맞는다고 얘기해 줘.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을 알려 준다면 네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
그런 이안의 애원에 피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 창밖에는 서양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그녀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황혼의 빛에 자신의 얼굴을 드리우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마법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앞길이 막막했었지. 비록 장학금을 타긴 했지만 어머니 병원비로 대느라…….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를 찾아와 뜬금없이 자신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말하더라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너한테 빚을 지고 있는 셈이야.”
그녀는 잠시 말문을 멈추고는 다시금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그 빚을 갚아 줄 생각이었는데 잘하면 그때가 지금일 수도 있어.”
이안에게 한 줄기 희망이 비추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가 비록 공부 외에 달리 잘하는 건 없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특별했었지. 그 누구도 관심 없어 하는 취미가 있었는데 나는 그 기술에 끌려서 오로지 그것만 집중해서 수련했었어. 어디 가서 써먹을 수도 없는 꿈 기술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 기술이 잘하면 너를 살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배우길 잘한 것 같아.”
그 말에 이안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살 수 있다고? 무, 무슨 기술인데?”
“…….”
그녀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서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답을 주기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그게 뭔데?”
“지금 와서 이런 얘기하기도 좀 그렇지만 너와 내 관계를 확실히 해 둘 필요성이 있어.”
“관계라니…….”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진심으로 대답해 줘. 딱 부러지는 내 성격상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니까.”
“얼마든지 물어보라고!”
“난 처음부터 그게 이상했어. 네가 나한테 왜 굳이 돈을 많이 주겠다고 가정교사 제안을 했을까. 그것도 우리는 동갑내기인데 말이야.”
“그, 그건…….”
“잠깐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 너 솔직히 처음부터 나한테 흑심을 품고 있었던 거지.”
이안은 당황해서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질문 내용이 이런 것일 줄은 예상 못한 일이었다.
“…….”
“솔직하게 대답하기 싫으면 조금 전 얘기 없었던 걸로 하고.”
“아냐! 아냐!”
“그럼 지금부터 진실게임이다.”
“진실게임?”
“지금부터 내 질문에 그래 또는 아니라고만 대답해.”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그녀가 궁금해하는 그 어떤 사항이든지 성심성의껏 말하기로 다짐했다.
“처음부터 흑심 품고 나한테 접근했었지?”
“흑심은 아니고 첫눈에 반해서…….”
“그래! 아니! 둘 중에 하나만 대답해!”
“그래.”
“그리고 얼마 있다 슬슬 그 본심을 드러내려 하였지? 예를 들어서 여름 목욕탕 사건 말이야. 그거 실수가 아니라 몰래 훔쳐본 거 맞지?”
“…….”
“왜 대답이 없어.”
“그, 그래.”
“그런데 내가 화를 내고 난리를 치자 거기서 내가 보통이 아니구나 하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었지?”
“그래.”
“겨울, 아스란 산장에서 폭설로 길이 막혀 일주일 동안 갇혀 지낸 거 네가 사전에 일부러 눈사태 만들어서 고의로 그런 거지.”
“그래.”
“내 음료에 약을 타려고 했는데 나한테 들켰지. 그러고는 소화제라 끝까지 우겼는데 그거 이상한 거 맞지?”
“…….”
차마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소리를 버럭 지르는 그녀!
“왜 말을 못하는 거야!”
“그, 그래.”
“그 후에도 어찌어찌해 보려 했지만 내가 넘어가지 않자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지?”
“그래.”
“그 앙심으로 월급도 일부러 늦게 주기 시작한 거고.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온갖 잔머리를 써서 나를 괴롭히던 일. 그거 사실이지.”
“그래…….”
“너 나쁜 놈이지?”
“그, 그래.”
“천하에 색만 밝히는 놈 말이야.”
“그건 아냐! 나는 진심으로…….”
“시끄러! 어디서 거짓말이야.”
서원은 답답한 심정으로 말했다.
“너는 다른 애들하고는 다른 부류였어. 뭐라 할까. 섣불리 손대기에는 너무도 귀한 보석 같은… 아무튼 이건 정말 믿어 줘.”
“그럼 이거 한번 물어보자. 너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지?”
그는 이번만큼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
“어떡하든 수작 부려서 품에 안아 보고픈 마음 말이야.”
“…….”
“정곡을 찔려서 당황스럽지.”
“솔직히 그건 그런데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지. 어차피 죽을 몸인데… 그래서 말인데 소원 한 번 들어 주면 안 돼? 하루만 나랑…….”
순간 그녀의 손이 허공으로 치켜져 올라갔다.
“일단 한 대 맞아야겠다.”
짝!
“억!”
그러고는 이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배운 기술은 바로 루시드 드림이야.”
“루시드 드림?”
“쉽게 얘기해서 자각몽(自覺夢)이라고도 하지. 더 나아가서 드림워커.”
“드림워커? 그게 뭐지?”
“중요한 것은 과연 네가 그걸 배울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할게! 무조건 할게! 지금 내 사정을 봐! 내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루시드 드림인지 자각몽인지 뭔지 당장 가르쳐 줘! 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거야!”
피체는 잠시 그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런데 안 되겠어. 아무래도 너로부터 강한 정신력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겠지. 루시드 드림은 한마디로 기 싸움인데 하필 상대가 두억시니라니……. 자칫 목숨을 건 게임일 수도 있고. 미안한 얘기지만 그냥 죽는 게 어때? 잠시 희망이나마 준 내가 미안하다.”
그러자 그는 열통이 터졌다.
“지금 농담하는 거야! 난 이래 저래 죽게 되어 있다고! 제발 뜸 좀 들이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 봐. 이러다 속 터져서 먼저 죽겠다.”
피체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너 꿈 잘 꾸는 편이야?”
“꿈이라니. 그건 왜 묻지?”
“그냥 묻는 말이나 대답해. 매우 중요한 거니까.”
이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흠. 생각 좀 해 보고. 글쎄다. 별로 꿈꿔 본 기억이 없는데.”
“하기야 매일 술에 잔뜩 취해서 새벽녘에 들어오니 꿈꿀 일이 있겠어. 그런데 이젠 어쩌겠어. 앞으로는 지긋지긋하게 꿈을 꿔야 할걸.”
“무슨 뜻이야?”
“루시드 드림의 드림워커가 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꿈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기술이야.”
그러자 이안은 다소 실망스런 기색을 했다. 그녀는 그런 그의 심중을 일기라도 한 듯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칙칙한 반응에 이런 말은 하지 않고 싶지만 무슨 대단한 마법이라도 얻을 거라는 생각은 일절 가지지 않는 것이 좋겠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
이안은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이거저거 따질 자격이라도 있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근 이천 년 동안이나 자신의 가문을 대대로 괴롭혀온 끔찍한 마왕 카시아스였다.
석 달 남짓 남겨 둔 상태에서 그 어떤 방법이라도 통하지 않을 시점에 뜬금없이 꿈 얘기를 하다니? 당연히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거 모던 마법 같은 건 아니겠지? 현실성 없는 가짜 이론 마법 말이야.”
“아니.”
“아니라고.”
“엄밀히 본다면 일종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기술이랄까.”
그 말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가 기대했던 비전 마법 따위와는 거리가 먼 듯했다.
이안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가득했다.
“루시드 드림이 뭐기에 그걸 배우면 살아남을 수 있단 거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은 안 했어. 다만 가능성이 있다 했지. 그것도 두억시니가 얼마나 똑똑한가? 아닌가에 확 달라질 수 있거든. 굳이 확률로 말하자면 네 생존율은 루시드 드림을 완전히 숙달하고도 대략 50%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지.”
“50%.”
“아니지! 이제 보니 25%… 아니 10%… 5%…….”
“왜 생존율이 점점 내려가지?”
“내가 십 년 동안 비밀 동호회에서 배운 걸 네가 반년 안에 끝마칠 수 있는가에 따라 확률이 확 떨어질 수 있거든. 물론 내가 전력을 다해 도와주는 조건하에서조차도.”
일그러진 이안의 얼굴, 이내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거 배우는 데 그렇게 어려워?”
“어려울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아주 쉬울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단시일에 수련을 끝낼 수 있지만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고… 영원히 배우지 못하는 경우도. 뭐라 딱 꼬집어서 말은 못 하겠는데 이걸 어떻게 도대체 표현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어.”
이안은 참다 못해 외쳤다.
“그만! 그만하라고! 루시드 드림인지 뭔지 그 효과를 당장 내게 보여 줘 봐. 내가 직접 판단할 테니까.”
피체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앞에서 당장 보여주기는 좀 그런데…….”
이안은 급기야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아아! 피체!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못 행동했기에 이렇게 피를 말리는 거냐. 만일 죽을 운명에 놓인 사람을 데리고 놀리는 거라면 너 역시 천벌을 받을지 몰라.”
그녀의 입가로부터 웃음이 터졌다.
“호호. 미안. 사실 이미 시전해 놨어.”
“시전이라고? 뭘?”
“루시드 드림에서 최상의 기술인 드림워커를 말이야.”
“언제?”
“어제.”
“어제…….”
“응. 어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