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마병은 한나라의 은빛 갑주 기마대임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기마대의 무장을 감안 하면 최소한 80~90㎏의 중량을 가볍게 이겨 낼 수 있어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은빛 갑주의 덩치와 힘, 뛰어난 지구력을 보유한 말 품종이라면 한나라의 그 유명한 사천 산일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나는 온통 금속으로 무장한 기마대를 공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고 지금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일단 적들의 무장이 판갑이냐 사슬 갑이냐에 따라서 내 행동은 그에 맞추어질 것이다.
또한 창이냐 검이냐. 후방 지원으로 투창 조냐 아니면 일반 활 조이냐 하는 것도 중요했다.
철기는 사람 힘보다 강하다. 사람 힘으로는 철기를 자르거나 뚫거나 부러뜨리기 힘들다는 것은 상식이다. 갑옷과 방패를 무 자르듯 자르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강도의 칼이 있어도 그렇게 자를 수 있는 팔 힘을 가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이 시대에 있어서 신검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나는 ‘시공의 궤적’을 배웠기에 통으로 된 판금 형은 내 검술의 파괴력에 의해 그리 어렵지 않게 갈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슬 갑은 조금 달랐다. 검이 사슬의 빈틈을 찾아서 정확히 찔러 들어감과 동시에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을 제압하여야만 하기에 다소 벅찰 수 있었다. 처음 내 쪽으로 달려오는 기마병은 긴 창을 조준하고 있었다.
긴 창을 사용하기 위해선 작은 방패를 들어야 하는 약점도 있다. 나는 적의 창끝 부분을 손으로 잡아당겨 말에서 떨어트림과 동시에 작은 방패를 향해 무지막지한 일격을 가했다.
짝!
“억!”
예상보다 은빛 사슬 갑이 쉽게 갈라졌다. 첫 번째 공격이 보기 좋게 성공을 거두었으니 나는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사실은 말이 사람보다 더 겁 많은 동물이다. 보통 이를 막기 위해서는 보병들의 긴 창의 방진을 이루는데 사실은 더 짧은 창으로도 말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일단 말에게 겁만 주면 되기 때문에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
“멈춰!”
공력이 실린 음성에 선두 조의 말들 네 필이 움찔했다. 그 틈을 이용해 처음과 같은 방법으로 긴 창을 잡아당김으로써 두 번째 전사를 즉사시켰고 바로 옆쪽의 말 위로 도약과 동시에 적의 투구를 반쪽으로 갈랐다.
삭!
“욱!”
그때였다.
홱! 홱! 홱! 홱!
기마대 후방진의 활 조가 나를 향해 활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그 주위에 자신의 동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활 속도는 일반 투창보다 매우 빠르다.
물론 나는 그보다 빠른 동작으로 몸을 비틀어 피할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날아오는 화살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단 공격을 멈추어야만 했다.
그러나 잠시 잊었던가. 현재 이 전투에 있어서 나 자신 말고 루첸트가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후방 활 조의 대응을 이미 꿰뚫고 있었던가. 어느새 뒤쪽으로 다가가 비검술로 그들을 무지막지하게 도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상이 마치 은어 떼 위로 홱홱 지나가는 낚싯대의 날카로운 미끼 고리와도 같았는데 실제로 그녀는 물고기가 아닌 사람들을 낚고 있는 듯 보였다.
다만 한가로운 낚시가 아닌 단말마의 비명을 쏟아내는 참상을 연출하고 있었으니 나는 그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파파팟.
“쿠억!”
“악!”
“내 목이!”
가느다란 밧줄과 연결된 검은 사방 수십여 미터 반경 안에서 제멋대로 비행을 하면서 적들의 목과 사지들을 절단했다.
파파파팟.
“컥!”
그 대상들은 주로 후방의 궁사들이었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내 앞에 있는 적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적의 은빛 갑주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빨간 핏방울들이 계속해서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공성 탑 건설 중인 돌격대원들, 그리고 도지와 수하들은 자신들 앞에 벌어지는 전투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단 두 명이 무적으로 보였던 은빛 갑주 기마대 속을 휘저으며 일방적인 도륙을 감행하니 그들의 개념으로 언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싸우는 듯 몰입 중에 있었으며 적들이 하나둘씩 줄어들 때마다 탄성을 자아냈다.
또한 멀리서 지켜보는 성기 장군은 이 중요한 전투 장면을 위해 다른 부대들로부터 장수들을 초청해 놓기까지 했다.
“저 투구 쓴 젊은이가 그 기라성 같은 신검의 소유자들을 제압한 이형도라는 자가 맞소이까?”
“그렇소.”
“허. 과연 소문대로 굉장하구려. 그나저나 그와 함께 싸우는 자는 누구이요?”
“글쎄올시다. 이형도와 함께 온 자인데 나 역시 처음 보는 병사인데.”
“내가 보기에는 비검술을 익힌 것 같은데 그것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가히 예술이나 다름없군요.”
장군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군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두억, 그런데 그와 버금갈 정도의 고강한 병사가 그와 함께 싸우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어리둥절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 장군에게 다소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적의 은빛 갑주 기마대는 뒤에는 죽음의 도검 소유자가 있을 텐데…….”
그 말에 장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소.”
기마대 뒤편에 바위에 걸터앉은 자,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도륙을 당하는 데에도 마치 구경꾼처럼 여유를 부리며 자신의 검만 살펴보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이익!
그러자 절반쯤 남은 기마대원들이 뒤로 퇴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한복판으로 진한 녹색 갑주 차림의 중년 전사가 걸어 나왔다.
“제법이군. 정말 제법이야.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동이 밀려오는군. 내 생전에 이런 훌륭한 전투 기술을 지니고 있는 자들을 직접 보게 되니 말일세.”
나와 루첸트는 한숨을 돌리며 그를 살펴보았다. 애초 나는 그가 신력의 도검 소유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금속성의 검이라기보다는 작은 묘목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이상한 차림의 존재, 마른 북어 대가리 같은 몰골에 독수리 코, 쭉 찢어진 두 눈매에 은근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루 공성전에서 그 이름이 제법 알려진 자였다. 아군이나 적이나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도검 소유자들이 아직은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가운데 이제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첫 번째로 드러내려는 인물이었다.
그의 행보에는 적들 또한 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성곽에 병사들로 가득했으니 이 싸움을 보기 위해 몰려든 것이 분명했다.
이런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 쌍방 간에 내로라하는 최고의 장수들의 일 대 일 대결은 그 나름의 묘미를 더해 줌과 동시에 그 승패에 따라서 사기가 충천되거나 저하 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구경인 셈이다. 그가 말했다.
“둘 중 누가 나와 싸우겠는가?”
나와 루첸트에게 하는 말이었다.
“…….”
“둘 다 함께 나서도 상관은 없지만…….”
그때 루첸트가 내게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나설까요?”
“아니오.”
나는 그녀를 뒤로 물러서게 하였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투구를 꾹 눌러쓴지라 조금 답답했지만 절대로 적에게 나의 신분을 알리거나 얼굴을 보이지 말라는 장군의 당부가 있었기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물론 최대한 말수도 아끼는 것이 잊지 않았다. 일단 은하검을 빼어 들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 역시 바닥에 꽂아 놓았던 묘목 비슷한 검을 뽑고는 내게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루첸트의 음성.
“상대의 도검이 특이하게 생겼는데 일단은 본격적인 격돌 이전에 어떤 신력이 들었는지 그 속성부터 파악하는 것이 좋을 듯싶네요. 암흑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을 지닌 듯해요. 아니 그보다도 악마 카라쿠츠를 소환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요?”
“…….”
물론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다. 루첸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녀답지 않은 걱정스런 눈빛을 띠었다. 그때 그자의 코웃음이 들려왔다.
“후후. 파악이라고? 그 전에 이미 혼(魂)이 흡수되어 사지가 네 쪽으로 찢어져 있을 텐데. 전투를 지켜보니 쾌검에 이은 발검기술과 속도에 가속한 파괴력이라, 그리고 기마대를 공략하는 법을 미리 알고 있는 듯 제법 힘을 쓴 모양인데 나와의 대결은 그까짓 물리적인 기술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세상에는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고 너는 곧 즉사하게 될 것이다.”
루첸트 역시 내게 한마디 했다.
“그의 말이 맞아요. 아마도 암흑세계 출신일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러니까 악마의 힘을 사용하던지, 아니면 그냥 내게 맡기시는 것이.”
도대체 누구 편인지? 물론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은 알지만 내 자존심과 승부 기질을 꺾을 수는 없었다.
묘목같이 생긴 검으로부터 가지가 급속히 자라듯 이내 여러 줄기들로 변하여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인지라 발검 동작을 취하기 전부터 적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점점 쥐어 들어왔다. 정작 문제는 줄기들에 나 있는 촉수 비슷한 것들이 살갗을 파고들면서 그의 정신이 혼미해져 간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가. 그가 상대할 자가 신검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루첸트 말대로 그 검에 어떤 신력이 깃들어져 있는 파악조차 하지 않고 무모하게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들려오는 상대방의 음성.
“도검을 보고도 그대로 달려오다니. 하하. 그 무지막지한 정신은 가상하다만 인간의 무술은 한계가 있는 법. 너의 그 낡고 녹슨 검에 신력이 없는 한 절대 빠져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지닌 죽음의 도검은 서서히 혼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지. 나는 고리타분한 검술 따위로 대적하다 이기는 그런 건 사양하거든. 그저 내 묘목의 가지들이 촉수를 뻗어 너의 혼을 흡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만인 것이다.”
혼이 흡수당한다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점점 몽롱해져 가는 정신, 힘없이 축 늘어지는 각 부분의 신체들, 갑자기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시공의 궤적에서 배운 것은 소위 신력에 대항하는 법, 인간 고유의 힘만을 가지고 시작한 기술은 고도로 집중된 정신을 통해 몸의 급격한 움직임을 통제함과 동시에 잠재성을 끌어낸다고 했다.
‘인간이 무기라는 도구를 사용한 이례로 영적인 자기 도구로 여겨질 수 있다 했는데…….’
인간의 정신력이 극한으로 끌어 올려진다면 퇴마 의식에 대한 완벽성과 더 나아가 도검의 대항마로 부각 될 수 있는 점을 강조하셨다.
하지만. 지금으로서 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나약한 그 자신이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 인간아! 내가 도와줄까? 네가 죽으면 나는 영원히 이 검 속에 갇히게 된단 말이다.
검 속에 봉인된 악마 크라쿠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