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불사신과도 같았던 마귀는 거짓말처럼 연기로 화하며 내 검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나 역시 무슨 일인가 하고 검을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하늘빛 검면 맨 하단 부분에 붉은 반점 하나가 생긴 것이었다.
“뭐야. 은하검에 이런 것이 왜 있지?”
그때였다.
“제길 당장 꺼내 줘! 내가 갑자기 왜 이 안에 갇힌 거지?”
검은 마귀를 빨아들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안으로부터 계속해서 그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때 여인이 내게 다가오더니만 검을 보여 달라고 했다. 검을 건네받은 그녀는 검을 이상하게 바라보더니만 갑자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후후. 설마 이게…….”
그녀는 검에 대고 마치 마귀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네가 먹으려 했던 검 주인이 오히려 너를 잡수었네. 후후.”
“그게 무슨 말이야!”
“세상에서 너 같은 마귀들을 잡아먹는 검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봤지만 그걸 진짜 볼 줄이야!”
“아! 답답해! 당장 나를 꺼내 줘! 차라리 네 노예가 되어 끌려가는 게 낫지! 빌어먹을! 게다가 여긴 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도대체 저것들은 뭐야. 마치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여인이 물었다.
“그 검 어디서 난 거예요?”
“…….”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가 검을 계속 살펴보며 말했다.
“세상에 마귀의 정신과 육체를 제압하는 자는 오로지 그것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검 은하검 아닌가요?”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랬었군요. 후후. 어떻게 이 세계에서 그걸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악마 하나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주인이 되었네요?”
“주인이라니요?”
“만일 그가 이 검이 은하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애초 싸우지도 않고 멀리 도망쳤을 거예요. 그런데 두 번이나 베였으니 첫 번째는 육신을 바쳤고 두 번째는 영혼을 바치는 꼴이 되었으니 당신은 악마를 품은 유일한 인간이 된 셈이죠.”
나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 검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주인이라니! 내 권능을 저까짓 하찮은 인간에게 강요받으라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여인은 아주 얄미운 말투로 응했다.
“그럼 죽어. 멍청한 크라크츠 악마여! 그러니까 네가 악마의 한참 하등격인 마귀라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
“…….”
그리고 여인은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쟤 말이죠. 암묵의 세계에서는 그래도 잘나가는 악마였는데 하는 짓이나 행동이 잡배 수준이라서 우리 같은 사냥꾼은 그저 마귀로 부르지요.”
“암묵의 세계라니? 거긴 뭐죠?”
“드림워커의 본향이라고 그러죠.”
“드림워커라니요?”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드림워커라니? 처음 들어 보는 용어지만 이상하게 내 정신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말이었다.
‘드림워커……? 드림워커……. 왜 그 용어가 낯설지 않지?’
그때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권능은 꽤 강해요. 아마도 수하로 부리면 꽤 쓸 만할 겁니다.”
그날 저녁.
화르르.
탁탁.
모닥불의 불토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추가로 올려놓은 낙엽 타는 냄새가 가을의 정취의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날짐승의 껍질을 벗겨 고기를 굽고 있는 한 여인에 대해 여전히 신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저는 루첸트입니다. 아시다시피 마귀 사냥꾼이죠.”
“그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여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같은 사람을 처음 보니 궁금하시겠죠. 하긴 마귀 사냥꾼들이 사람들 앞에 이렇게 나타나서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퍽이나 드문 일이니까요.”
사실이 그랬다. 마귀나 악마와 같은 초월적 존재들을 사냥하는 실력이라면 내가 지금 있는 이런 일반 세상에서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에 속하지 않던가. 나는 앞으로 나타날 신검의 소유자들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여인에 대해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때 검 안에서 들려오는 외침.
“치사하게 너희들끼리 처먹을 거야?!”
악마 크라크츠였다. 루첸트는 검에 대고 일침을 가했다.
“너희들이라니? 너는 새로운 주인에게 막말하는 법을 어디서 배웠냐?”
“주인이고 나발이고 당장 꺼내 줘. 아주 배고파서 죽겠다.”
“…….”
아무리 봐도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검이 악마를 빨아들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나는 루첸트에게 말했다.
“악마를 꺼내는 방법은 있긴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거기 검면에 생긴 붉은 반점을 살짝 문지르면 됩니다. 다시 불러들일 때도 같은 방법을 쓰면 되고요.”
“…….”
“염려하지 마세요. 악마는 주인을 절대 해칠 수 없거든요. 해치려는 그 즉시 자신도 소멸이 되기 때문이죠. 그게 바로 드림워커의 법칙이랍니다.”
그 말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드림워커……?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도대체 드림워커가 뭐죠? 그곳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내 질문에 대답을 들은 척 만 척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훗날 오직 당신만이 그를 자유롭게 풀어 줄 수가 있어요. 단, 악마 크라크츠를 길들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인간에 대해 한없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현재 자신의 처지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니까요. 물론 어떻게 길들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지만요.”
순간 검 속에서 성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똥강아지냐! 길들이게! 정녕 내가 소멸을 당하면 당했지 그저 하찮은 인간에게 명령을 당할 만큼 자존심이 없는 악마는 아니라고!”
그녀는 이번에도 얄미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어쩌시나! 여기 계신 분은 그저 하찮은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암묵의 차원에서조차 신비스런 전설로 내려오는 ‘은하검’ 주인이신데 너라고 별수 있냐. 후후.”
“그래 봐야. 허상의 너울, 드림워커에 불과할 뿐 나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나는 또다시 놀랐다. 악마 크라크츠 역시 드림워커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드림워커가 뭐기에 이들이 자꾸 그 용어를 쓰는 거지. 드림워커…….’
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마치 거대한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현기증이 다가오는 게.
실제로 나는 다리가 휘청거렸고 하체가 비틀거려 하마터면 쓰러져 흙바닥에 자빠질 뻔했다.
‘드림워커……?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 있어. 도대체 그게 뭐지? 드림워커…….’
* * *
나와 루첸트는 험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강기슭에는 더 이상의 병사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 모두는 뒤에 따라오는 범선을 타고 미리 출발했음이 분명했기에 우리 둘은 육로를 택하기로 했다.
원래의 군복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 머리카락을 묶고 투구를 눌러쓰니 그런대로 남장이 어울렸지만 가냘픈 몸매에 고운 선은 중성적 이미지를 풍겼다.
그녀가 나를 따라오는 이유는 바로 내가 은하검의 주인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전란 중에 사냥하는 일이 무척이나 어렵기에 잠시 속세에 묻혀 지내면서 이것저것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주로 이 세계가 아닌 암묵의 차원에서 활약했다고 했지만 그 이상의 언급은 회피했다.
특히 드림워커에 대해서 말이다.
그곳에서의 일을 발설하는 것은 금기(禁忌)사항이라나.
언덕 위로 올라서자 칠면조 볏처럼 집들이 아련하게 성곽을 이룬 듯 보였다. 그것은 태곳적 세월을 겪은 암벽의 협곡을 둘러싼 아름다운 리본의 외곽 마을 풍경이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해안에 도착할 테고 우린 한창 공성전이 벌어지는 전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한나절 후.
드디어 짠 냄새가 콧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곳 둔덕으로부터 모래 언덕이 길게 뻗어 있었다. 먼 곳에서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는 시내가 모래벌판을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교차지점, 강의 군데군데 물이 괴어 있어 마치 내 검의 하늘빛을 크게 옮겨다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하늘과 하늘이 이어져 있는 그 너머에는 파도가 푸르스름한 선과도 같아 보이며 근처에는 수많은 암초들이 물 위로 솟아 있었다.
눈을 수평선 오른쪽으로 옮기면 리본 지방의 짙은 녹음의 숲 지대가 길게 펼쳐져 있는 것이 신선함과 상쾌함이 심장을 관통하는 듯 내 정신은 반짝했다.
하지만…….
점차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진한 감동의 자연 풍광은 사라지고 막사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다소 혐오스런 광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리본 공성전의 후방 진영, 정확히 이곳이 몇 군단이 위치하는지 몰랐지만 멀리서나마 보이는 병사들의 군복이 센 제국의 독수리를 상징하니 분명 아군은 틀림없었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지난 7년 동안 전쟁의 상흔을 입어 왔던 치열한 전쟁터의 초입 지역이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구조물의 연장선들은 어머니의 고향 리본 대도시일 것이다. 내 외가 쪽 친지들이 결사 항전 하는 성지, 나는 이 길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을 적으로 대하고 싸워야 만 할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하들 역시 저곳을 향해 칼을 겨누고 지금도 전투 중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나와 루첸트는 드디어 제7군단이 위치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내 돌격부대의 근황이 궁금했다.
나 대신 임시 대장을 맡고 있을 샤칸, 그리고 작전참모 도지, 수행관인 제퍼와 제나이더, 삼천여 명의 부대원들 역시…….
잠시 후, 드디어 나는 돌격부대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를 알아보는 병사들, 그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대. 대장님!”
“대장님이 돌아오셨다!”
“흑!”
감격의 눈물을 보이는 자도 있었다. 헌데 사방에서 나는 통곡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를 반겨주는 기쁨의 눈물이라기보다는 슬픔이 배여 있는 모습들이랄까.
그제야 나는 내가 없는 동안에 그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저 멀리서 나를 반기러 나온 키 큰 청년, 그는 바로 도지였다. 그 역시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대장님…….”
얼굴부터 온몸에 이르기까지 붕대로 감겨져 있어 그가 누군지 처음에는 식별이 가지 않았다. 붕대가 거의 피로 젖었을 만큼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커다란 체구, 간간이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가 귀에 익었고 나는 그가 샤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막사 안에는 도지와 제퍼, 그리고 제나이더가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귀환한 나를 반기기에 앞서 병상에 누워 있는 샤칸을 바라보며 저마다 울분에 섞인 음성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여기에 싸우러 왔지 공사만 하다 죽을 일 있습니까?”
제나이더 말에 제퍼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그건 맞아. 돌격부대라면 적어도 공성전에 투입이 되어야 하고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다면 억울하지도 않지만 이건 한마디로 개죽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