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병사들은 선장의 말대로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도대체 저 실체가 무엇이기에 바람 방향을 바꾸어 뱃머리까지 돌리게 했던가.
공포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눈앞에 있을 것 같은 존재를 확인해 가고 싶었다. 이어 숲속으로부터 들려오는 괴성.
“다들 귀 막아!”
순간 배 앞쪽에 뭔가 부딪치며 심하게 흔들거렸다.
쾅!
굉음과 함께 배 밑바닥으로 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병사들은 배를 버리고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수심이 깊지 않아 강기슭으로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기괴한 수풀들, 큰 나무의 머리 부분 잎사귀의 가벼운 그림자에 덮인 밑동 부근에 보기에도 흉한 잡목들이 촘촘히 자라고 있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뿐이었다.
엷은 녹색의 얼룩점이 가지 끝에 피어나 있었다. 나머지는 해괴한 모양의 가지를 드러냈고 바위마저 대부분 흑색의 이끼들로 덮여 있었으니 마치 태곳적 원시림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혼자서 숲속 가까이로 가서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내게 소리를 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돌아오세요!”
신병들 중 매우 곱상하게 생긴 자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만 군복을 벗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드러난 갸날픈 몸매. 뭐라 중얼거리는 음성을 듣고서야 여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병 노릇하기도 힘들군. 하지만 아레스 산맥에 오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지. 특히 전란 중에 나 같은 마귀 사냥꾼은 굶어 죽기 딱 좋은 신세라. 치!”
그녀는 이상한 형태의 검을 어깨에 들쳐 매고는 내 앞을 가로질러 태연스럽게 숲속으로 향했다.
마귀 사냥꾼이라…….
그녀가 들어간 숲 안쪽으로 발걸음이 절로 옮겨졌다.
큰 나무 밑동에 앉아 있는 여인. 하나로 묶었던 머리까지 풀어 헤치고 뭔가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 잎사귀 사이로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에 다소 그을린 피부가 윤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매우 특이한 군장 차림, 어깨가 드러난 보호대 아래로 드러난 팔은 어느 여자의 가녀림과 같았지만 정작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은 대검에 가까울 정도로 컸고 묵직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그녀는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리로 가 봤더니 검 손잡이에 밧줄을 매고 자신의 손목을 묶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퉁명스럽게 외쳤다.
“당신 미쳤어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 당장 돌아가요!”
“…….”
그때 숲 안쪽으로부터 지난밤에 지겹도록 들어왔던 괴성이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외쳤다.
“당장 이리 와서 숨어요!”
나는 그녀 말대로 나무 밑동으로 재빨리 뛰어가서 몸을 웅크렸다. 이내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숨이 열 개라도 되나요? 왜 말을 안 듣는 거죠! 지금 내가 쫓고 있는 마귀는 당신 같은 보통 사람들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온몸이 경직되어 그대로 심장이 마비될 정도로 아주 무시무시하고 흉악한 놈이라고요!”
“…….”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답답함이 벌써부터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른의 신검 주인과 대적을 벌였을 때, 멸검 아르테스의 제론과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벌일 때의 그 긴장감과는 차원이 다른 황망함이랄까.
감히 인간이 신적인 존재에 대항하려는 무지함마저 내 영혼 줄을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그녀가 왜 손잡이와 자신의 손목에 밧줄을 연결했는지 궁금했다.
“검에 줄은 왜 묶는 거요?”
“놈은 날개가 있어 날아다니니까 이렇게 비검(飛劍)을 사용해야만 해요. 그나저나 당신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요.”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나무 뒤로 돌아서 숲속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숲 안쪽으로부터 마귀의 괴성과 여인의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나무들이 쓰러지고 바위가 깨지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이어졌다.
내가 기대고 있는 나무 밑동으로부터 불과 수십여 미터 떨어진 곳이 마치 초토화가 되는 것 같았다.
파파파팟
푹! 푹!
이건 신력을 지닌 존재와 인간과의 싸움이거늘, 마치 상상 속에서나 나올 법한 신들의 전쟁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그 광경이 궁금해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살펴보았는데 거대한 나무가 힘없이 무너지고 여기저기 바위 파편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물론 이렇게 지켜보는 것은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났고 현자의 검을 들어 앞쪽으로 전진했다.
수풀을 지나 언덕 아래 공터에 다다르자 믿지 못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박쥐 날개의 산양의 뿔을 한 새빨간 존재, 그 거대한 체구를 가진 녀석이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여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밀리는 추세는 마귀인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던 비검이 마귀를 향해 마구 휘둘러지는데 숲 지대를 초토화시키는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 가녀린 몸매에 뿜어 나오는 힘은 결코 완력이 아닌 것 같았다. 비검에서 가끔 빛을 번쩍이니 일종의 신력을 지닌 무기로 보였던가.
하지만 검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주인의 미세한 손끝 움직임대로 절묘한 공중 검술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여인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듯 엄청난 속도로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마귀의 행동반경을 좁혀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검술에 능한 나조차 그런 그녀의 몸놀림에 절로 혀가 내둘러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기세가 밀린 마귀는 그 흉측한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녀 역시 비검을 날리며 그를 뒤쫓기 시작했고 언덕 위에 멀뚱히 있는 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성난 목소리로 내게 외쳤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나무 뒤에 숨어 있으라고 했는데! 당장 피하든지 엎드려요!”
하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쥐고 있는 현자의 검 손잡이로부터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마치 자신을 이용하라는 절실한 외침 같았다. 그 사이에 마귀는 어느새 내 앞 전방 10여 미터까지 다가왔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바로 앞 바위 지면을 딛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마귀와 정면 승부를 보기로 했다.
하늘빛 검 면에 비친 새빨간 형체, 사람이 아닌 존재와 대결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마귀는 내가 자신을 공격하려 하자 그대로 하강하며 그 긴 팔과 손톱으로 내 몸을 찢어발길 태세였다.
그 어떤 힘에 내 몸이 경직되어 평상시의 몸놀림보다도 둔해졌지만 다행히 현자의 검으로부터 갑작스레 뿜어 나오는 고색의 창연한 빛이 순간적으로나마 내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또한 바로 옆 바위인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었으니 두 번의 도약으로 내 몸은 오 미터 이상까지 솟구쳐 오를 수 있었다.
파팟.
내 검은 허공에 하나의 사선형의 원(圓)을 만들어 냈고 마귀의 목이 그대로 절단이 되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몸통은 비틀거리다 그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이어 수급이 바로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툭!
놈의 날개는 여전히 퍼덕거렸지만 점점 힘을 잃어갔다. 이번에도 보기 좋게 일 검이 먹혀들어 갔던가. 그것도 인간이 아닌 존재…….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쉬운 전투 결과에 나는 왠지 불안했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 역시 여전히 걱정 가득한 빛이 아닌가.
그때였다.
목과 몸통이 분리된 마귀의 시신이 꿈틀거렸고 날개는 다시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겨우 일어나 바로 앞의 자신의 목을 집어 들어 목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내 안의 상식 안에서 살아 왔던 나는 하나의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를 눈앞에 두고 당혹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 날개를 가진 마귀라는 자체도 터무니없는 허구 속 주인공이라 믿어 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정상으로 돌아온 마귀는 나를 바라보며 그 흉악한 얼굴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미소 사이로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오랜만에 고급 요리를 만난 느낌인데.”
다시금 느껴지는 굉장한 압박감, 거기에다 두려움까지 더해졌다. 마귀는 정말 맛있는 요리를 눈앞에 둔 식탐가의 눈빛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지켜보던 여인이 이리로 뛰어오며 외쳤다.
“크라크츠! 이 세상에서 오로지 네가 먹을 거라고는 우릿간 구정물 속, 병들은 돼지밖에 없겠지. 그러니 당장 그에게서 떨어져!”
“네 이년! 루첸트! 나는 오랫동안 굶주려 왔다. 전에는 그저 평범한 인간들이 먹잇감이었지만 간만에 내 정신을 회복시켜 줄 강한 용기와 신념의 소유자를 만났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내 신체 기능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지. 그래서 너 같은 것에 쫓기기나 하고 말이야. 지금으로서는 내 피부와 근육을 활동시키고 위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당장이라도 이놈의 영혼과 육신을 잘 곁들여서 잡아먹어야 한다고!”
마귀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놈이 지니고 있는 검이 문제로군. 원래 먹음직스러운 것에는 가시가 달린 법이지만…….”
순간 그의 눈빛으로부터 쏟아지는 붉은 안광에 숨이 막혀 왔다.
“욱!”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를 보고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는다니! 가끔 신검을 믿고 내게 반항하는 인간들이 있다지만 이놈은 과연 별종이군. 헌데 이 세계에서 신검이 아닌, 뭔지 모를 저 이상야릇한 하늘색 검으로 내 목을 잘라 버리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크크. 이거 점점 구미가 당기는데.”
그때였다. 나는 전광석화와도 같이 그대로 놈에게 달려들어 바닥으로부터 위쪽으로 강하게 검을 올려 버렸다.
삭!
방심한 틈을 노렸는데 그게 적중되었던가. 이번엔 몸통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털썩!
헌데 두 몸 쪼가리는 하나의 물방울처럼 다시 합체가 되어 순식간에 원래의 마귀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의 입으로부터 짧은 한마디가 내뱉어졌다.
“빠르군. 게다가 검마저 예사롭지 않은데… 내가 수천 년을 살아오며 갖가지 병기(兵器)들을 봐 왔지만 저 검에 베이는 느낌은 생전 처음 맛보는 거랄까. 정말 신기한 일이야.”
그는 실제로 내 검을 주시하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들어 턱밑을 다듬어 생각이 잠긴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귀의 몸이 흐물흐물 거리기 시작하더니만 이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허어억! 이, 이게 무슨 일이지.”
하나의 붉은 물체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졌고 그 형태가 액체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내, 내 몸이!”
곧이어 불길이 확 일어나더니만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것은 일정한 틀의 흑색 기류로 변하여 내 검으로 스멀스멀 주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옆에서 바라보던 루첸트란 여인도 깜짝 놀랐는지 그저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내가 왜 검 속에 빨려 들어가는 거야! 빌어먹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