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속에서 얻은 레어템, 현실에는 역대급-128화 (128/143)

128화

바람이 불어왔다. 며칠째 감지 못해 떡이 진 머리칼조차 부드러운 강아지풀처럼 가벼이 일렁이게 만드는 강력한 해양풍, 짠 냄새마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구릉지 아래로 펼쳐진 드넓은 도시의 전경, 보름여의 여정 끝에 나와 제나이더는 드디어 바트라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곳부터는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고, 우리는 저 끝까지 이어진 성문으로 향했다.

과연 대국답게 성루 역시 마치 하나의 신전을 보는 듯 거대했고, 그 모든 조각마저 섬세함이 베여 있는 예술품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망루와 좌우 성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의 은빛 군장들이 햇빛에 눈 부시게 빛났다.

표범을 상징하는 깃발들만 수백 개나 되었고, 바트라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바람에 찢어질 정도로 펄럭였다. 망루 위에 붉은 깃털 투구의 장교로 보이는 자가 나와 제나이더를 살피더니만 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나 역시 당당하게 소리쳤다.

“센 제국 제7 군단 소속 이형도라 하오! 나는 그대들의 검사와 대결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소.”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자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즉시 성문이 열렸고, 나는 제국을 대표하는 검사로서 정중한 안내를 받았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소.”

성안에는 대략 백 명이나 되는 호위 병사들이 대기 하고 있었는데, 나와 제나이더의 주변을 감싸더니만 도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길 양옆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누군가를 환영하는 군중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 어린 시선이 나와 제나이더에게 향할 때 그제야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바트라 제국의 영웅, 베른의 신검 주인인 제시우스를 죽인 자, 바로 그 원흉을 보기 위한 시민들의 관심이 이런 인파를 만들어 냈고,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취지에 나는 철통같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제나이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는지 오히려 개선장군이라도 된 마냥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이내 돌멩이들이 날아왔다.

홱! 홱!

탁! 탁!

경비 병사들의 두툼한 쇠 방패 덕분에 아무 탈은 없었다. 어쨌든 적진의 수도에서 분노한 시민들의 돌 세례를 적병들이 막아 주니 묘한 기분이었다.

광장을 지나니 더 이상의 군중들이 없는 제한 구역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난 두 명의 남녀. 그중 매우 고풍스런 신관 분위기 차림의 여인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저는 중재자의 자격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두 제국 간에 공평한 대결을 위해 페론 신관으로부터 파견된 에스더입니다.”

“에스더 님이라고요?”

그때 제나이더는 무척이나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녀석은 워낙 흥분된 상태였고, 말을 빨리해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내용은 이랬다.

에스더는 대결 심사관이자 중재자로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대륙의 수많은 명검(神劍)들에 대해 연구하는 신관이었고, 이번에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멸검 아르테스에 대해 그 주체가 되는 원천의 힘을 연구하려고 나온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여하튼 에스더라는 여인은 녀석이 나름 귓속말로 전해 준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내게 다가와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심사관으로 온 거 맞으니까 안심하세요. 저는 이미 제국 간의 대결들을 공정하게 심사했던 경험이 이번으로써 20회가 되거든요. 공정한 승부와 그 결과에 대해서 양 국가 간에 거래한 협상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대의 수행관의 말대로 명검 연구자이기도 하지요. 조금 더 저를 소개하자면 대륙의 명검에 관한 소재로 일명 ‘페론 연대기’를 준비 중에 있는 편저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명검에 관한 소재인 ‘페론 연대기’라니?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당신에 대한 얘기는 이미 주변 국가들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검으로 베른의 신검의 소유자인 제시우스를 제압하고 이번에는 멸검 아르테스와 대결을 하시게 되어 있지요. 저는 그대가 어떻게 멸검에 대항할지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했고, 급기야는 직접 제가 페론 신전에 요청해서 파견 나온 것입니다.”

“…….”

와와.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 소리, 나는 그 한가운데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페론 신전의 신관 에스더는 경기장 한복판에 설치된 시합장을 눈여겨 살펴보더니 다소 놀란 표정으로 집정관 다무렌에게 말했다.

“시합장이 유별나군요.”

“조금 독특하게 꾸며 봤습니다.”

“제 생각에는 의도적으로 그러신 것 같은데요. 어느 한쪽이 유리하게끔 말이죠.”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명색이 대국끼리의 중요한 대결인데 그저 평범한 흙바닥에서 치르게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심사관님.”

에스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생각에는 저건 멸검 아르테스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된 구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요.”

“어차피 두 시합자 역시 똑같은 배경에서 대결을 하는 것이니 주변 환경을 탓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뭐, 정 억울하면 상대방도 그럴듯한 신검 하나 가지고 와서 시합을 하든지 말입니다.”

“…….”

에스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센 제국의 이형도란 검사는 그저 일반 검, 아니 그조차 미치지 못하는 녹슨 검을 사용한다고 그랬다. 하기야 집정관 다무렌은 자신의 조카의 복수를 갚기 위해 확실한 구도를 짜 놓고 그 결과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심사관으로 지금의 저런 광경은 뭐라 탓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두 대결자에게 같은 환경이니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그녀의 목적이 심사라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멸검 아르테스를 연구함으로써 페론 연대기를 쓰는 것이 아니던가.

전방에 병사들이 앞길을 터 주어 경기장 안쪽을 보니 사각으로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보였다. 그리고 그 둘레에 두꺼운 쇠 창들이 사선형으로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병사가 나를 그쪽으로 가까이 안내해 줄 때 나는 그제야 쇠 창들의 용도를 알 수가 있었다. 일정한 규모의 사각의 시합장에서 자칫 뒤로 물러날 경우 날카로운 창끝에 박히도록 의도적으로 만든 죽음의 공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맞붙게 될 상대는 멸검의 소유자. 닿는 즉시 그 어떤 강력한 힘에 나는 그 자리에서 소멸할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이 두려워 뒤로 피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저들의 계획이 있음이 분명했다.

이제까지 그 누구와의 대결에서 지나치게 대담하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나였지만 눈앞의 광경에 그만 깜깜하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 나는 멸검과 부딪치지 않고 오로지 쾌검으로 급습을 노리려고 했다. 그러나 저 작은 시합장에서 창끝들을 의식한 채 과연 그런 기술이 통할지에 회의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멸검 아르테스의 주인 제론이란 자는 검술에 상당히 능한 자라 했다. 시공의 궤적이 제아무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검술일지라도 검끼리 닿지 않고 시합을 이기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그 위로 먼저 올라갔고, 곧이어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한 흑색 법복 차림의 중년인이 맞은편 계단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금속이 아닌 각질의 대검, 제나이더의 말대로 굵직한 힘줄들이 검면을 칭칭 감고 있었고, 손잡이에는 멸옥으로 보이는 검은 보석이 윤기를 발했다.

[멸검 아르테스]

제론이란 자의 얼굴에는 분노로 가득했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제시우스를 죽인 장본인인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벌써부터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멸검을 앞세워 다짜고짜 공격해 들어왔다.

타다닥.

홱!

나는 멸검과 닿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약을 했고, 그대로 한 바퀴 공중 회전한 다음에 그의 뒷목을 노렸다. 그러나 그가 홱 돌아서더니만 멸검을 치켜올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상체를 비틀어 그것을 피했다.

“이얏!”

미처 균형도 잡기 전에 또다시 들어오는 멸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옆으로 비켜서려는 찰나 시합장 안쪽으로 향해 있는 창끝에 내 팔이 푹 박히고 말았다.

“욱!”

다행히 제론은 더 이상의 공격을 하지 않았고 그저 나를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독 안에 든 쥐라 생각했던가. 도저히 뒤로 물러날 공간이 없는 이 좁은 곳에서 서서히 피를 말려 죽이려는 그의 의도를 그냥 알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창끝이 박힌 팔을 가까스로 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름 일검의 신화라 불렸던 내가 오히려 상대의 일검의 제물이 될 뻔했고, 이어 두 번째 격돌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조차 눈앞이 캄캄했다. 그가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이얏!”

홱!

비좁은 공간에서 내가 할 일은 도약밖에 없었다.

붕!

삭! 삭!

연이은 두 번의 칼질에 나는 상체 비틀림과 공중제비돌기로 겨우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착지와 동시에 이번에는 어깻죽지에 창끝이 박히는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

“억.”

조금 깊숙이 박힌 것 같았다. 몸에 힘을 주어 빼내려고 하니 고통이 심했다.

겨우 신형을 틀고 일어났고 제론의 동정 어린 눈길이 내게로 향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 예상한 대로 그는 나를 그냥 쉽게 죽이려는 심산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일단 한 가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창들을 모조리 잘라 버려야겠어.’

삭! 삭! 삭! 삭! 삭! 삭!

사각의 시합장 안쪽으로 빼곡히 박혀 있는 쇠 창들의 몸뚱이들이 내 녹슨 검에 의해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비좁은 공간에서나마 내 뒤를 위협하는 장애물들을 제압함으로써 나는 보다 넓은 곳에서 내 기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때 여기저기에 관중들의 감탄 어린 목소리가 들여왔다.

“두꺼운 쇠 창을 모조리 절단 내 버리는데.”

“후, 역시 보통내기는 아니었어. 보아하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녹슨 검인데 그걸로 수백 개의 쇠 창을 순식간에 잘라 버리다니 말일세.”

잠시 후 날카로운 창끝이 모두 사라진 다음에야 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제론이 조소 어린 눈빛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 봐야 뭐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텐데.”

그가 공격해 왔다. 이번에도 그의 검과 닿지 않으려고 도약을 했지만 이미 그것조차 읽혔던가. 그 역시 도약으로 공중에서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얏!”

“헉!”

멸검의 검 끝이 내 복구를 스쳐 지나갔다. 닿지는 않았지만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추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쿵!

“욱!”

쾌검의 한계는 여기까지란 말인가. 제론 역시 신검에만 의존하지 않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검사였다. 이 시합에서의 칼자루는 그가 쥐고 있는 상황, 그다음에는 도저히 답이 없었다.

그때 햇빛에 번쩍이는 검면의 한 부분. 나는 엎드려 있는 채 내 검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비친 내 얼굴, 아니 내 눈빛에 이제는 확실한 죽음이 드리워졌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얼굴 뒤로 보이는 하늘, 나는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그저 담담한 생각뿐이었다. 언제가 누구나 죽는 법. 한데 이상했다.

‘가만있어 보자.’

내 얼굴이 비친 검면 한 부분은 이전에 녹이 슨 부분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은 서슬이 시퍼럴 정도의 거울과도 같았다. 아마도 아까 전엔 수백 개의 쇠 창을 제거하면서 그 부분의 녹이 벗겨진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