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도지는 제나이더와 마찬가지로 지난번 내가 제시우스를 제압한 것이 단지 운이 좋아서 이겼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기는 베른의 신검이 그 위력을 내뿜기 전에 나는 그의 손목을 잘랐고, 그대로 즉사시켰으니 맞는 말이었다.
샤칸 역시 한마디 했다.
“현재 돌격 병사들의 사기는 오를 대로 오른 상태입니다. 그러니 도지의 말대로 이제는 대장의 안위를 챙겨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이들은 아직 나에 대한 진면목을 모르고 하는 얘기인 것 같기에 말이다. 내가 익힌 시공의 궤적에 대해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가. 하지만 도지의 그토록 총명한 눈빛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대장의 다음 상대가 걱정이 됩니다.”
“다음 상대가 걱정이 되다니요?”
“베른의 신검의 주인인 제시우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필이면 바로 네오 제국의 멸검 아르테스의 주인인 제론이라는 자입니다.”
“…….”
친구 사이라는 내용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더군다나 바트라 제국의 집정관 다무렌은 조카 제시우스의 죽음에 몹시 슬퍼할 테고, 결국은 복수를 위해 제론을 이미 불러들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멸검 아르테스는 현재 세상에 나와 있는 신검 중에 가장 강력한 신기를 지니고 있는 명검 중에 하나입니다. 더군다나 그 주인인 제론의 검술은 이미 네오 제국에서도 정평이 나 있기도 하지요.”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제나이더 녀석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무조건 피해야죠! 세상에 멸검 아르테스에 대항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요, 후후.”
[멸검 아르테스]
나는 또다시 말문을 닫고는 생각에 잠겼다. 도지 말대로 이 시대는 신검의 시대일 수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검술 능력보다는 그 어느 곳에서 신기를 잔뜩 뿜은 무기들을 들고나와 설치는 세상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제론은 검사일 뿐만 아니라 마법사라는 얘기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멸검 아르테스를 사용한다면 그 효과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상상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승부욕이 타올랐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도지의 예측이 정확했다. 바트라 제국의 집정관 다무렌은 군단장 클레이에게 전령을 보내왔다. 대규모 접전이 아닌 일대일을 재추진하자는 것이다. 그 승패 결과에 따라서 제법 큰 협상까지 제안해 왔던 것이다.
자신들이 패할 경우 센 제국의 동맹국 영토인 헤몰트 평원의 침략을 자신의 재임 기간 중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 단, 이길 경우에는 반대로 평원을 차지하는 것으로 말이다.
클레이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번 내가 제시우스를 제압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는지라 이번에도 내게 기대를 걸고야 말았다. 대결 장소는 바트라 제국의 원형 경기장인 적진 수도 한복판이었다.
원래 대결은 양측 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바트라 제국은 이미 군 병력을 수도로 퇴각시킨 후인지라 일대일 대결만을 위해 다시 이곳으로 이동해 오려면 적지 않은 군자금이 소요가 된다. 그리고 서로의 전력이 비슷한 경우, 그것도 자국의 영토가 아닌 동맹국의 영토에서는 가능한 대규모 전투는 피하는 것이 전례였다.
집정관 다무렌이 내건 헤몰트 평원의 불가침 조약은 그들로서 한발 뒤로 양보한 것이 된다.
제7 군단 군단장 클레이는 처음에는 고민했지만 생각해 보니 유리한 조건이었다. 어차피 전쟁에서 승리할지라도 아군 측 희생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제7 군단의 병사들은 고향을 떠난 지 수 년이 된다. 처음의 병력이 그동안 수많았던 전투로 절반만 남은 셈이었다. 군단장은 남은 그들만큼은 무사히 귀환시키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결국 그는 내게 정중히 부탁을 했던 것이다.
또한 중립국이라 할 수 있는 페론 신전으로부터 대결의 공정성을 위한 심사관이 파견되니, 적국에서의 시합일지라도 그 결과에 따라 조약의 내용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군단장 클레이가 상대방의 일방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대결에 응할지 안 할지는 대표 검사 스스로에게 결정권이 주어지지만 나는 기꺼이 적국에 가서 불리한 대결을 하기로 자청했다. 괜한 전쟁으로 인하여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오로지 내 수행관 중 한 명만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군단장은 그런 내 결정에 완강히 반대했다. 적어도 대국의 대결에서는 참모급과 장교, 그리고 호위 병사들이 뒤따르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극구 고집을 세웠다. 애초 나는 적국의 다무렌이 평원을 놓고 대결을 치르자는 제안 그 뒤 배경에는 자신의 조카에 대한 복수의 무대를 마련하리라 예상했다. 상대는 승부의 결과에 따라 어떤 화를 자초할지 몰랐다. 그렇기에 굳이 많은 사람을 대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나의 집요한 주장에 결국 군단장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또한 도지 말대로 제시우스의 절친인 멸검 아르테스의 주인 제론이라는 자는 자기 스스로 자청해서 바트라 제국에 이미 와 있는지 몰랐다. 사실 나는 내 안으로부터 솟구치는 일종의 승부 기질과 멸검이란 검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대결로 여겼기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퍼는 심약한 나머지 그곳에 가는 것을 꺼려 했지만 제나이더는 얼씨구나 좋다 하고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헤몰트 평원을 놓고 양 제국 간에 제법 큰 규모의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주사위의 숫자는 내가 결정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 물론 나는 패하면 그곳에서 뼈를 묻고, 이 세상을 마감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꺼이 이 대결에 나서기로 했다. 과연 이런 용기가 전에 내게 있었던가? 하고 여러 번 생각해 봤지만 답은 없었다. 이건 신념도 아니요, 객기도 아닌 그저 흘러가는 강물처럼 덧없이 떠내려가는 부표(浮漂)의 삶과도 같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하지 말아요.
목숨을 바칠 가치가 없다고 하지 말아요.
싸워 볼 가치가 없다고 하지 말아요.]
또 한 번 녹슨 검이 플린시아를 통해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 같았다. 그때 들려오는 제나이더의 익살스런 음성.
“대장님, 혹시 시합에서 패하더라도 수행관인 저는 어쩌지는 않겠죠? 이왕이면 저만이라도 살아서 돌아가 대장께서 정말 훌륭하게 싸우시다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은 전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어쩌면 나는 제나이더의 말대로 죽음으로 치닫는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몰랐다. 화려한 불꽃에 이끌려 뛰어드는 불나방과도 같이 나 또한 이 세계에서는 그런 미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저 멀리 서녘으로 지는 붉은 노을의 장엄함이 진한 감동으로 밀려오고, 그것을 느끼며 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하다 못해 스스로의 갑갑함을 분출하려는 욕망, 분명 나는 진정 살아 있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좁은 문을 지나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그 문들의 폭이 점점 넓어질 때의 흥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서 이내 다가올 바트라 제국의 거대한 성문이 기다려졌다. 그러나 제나이더는 처음부터 이 싸움에 있어서 내게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쯤에서 그냥 돌아가시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승산이 없다고요.”
물론 그런 녀석의 걱정스러움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멸검 아르테스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다면 얘기해 봐.”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흠, 이제 슬슬 겁나겠죠. 대장님은 그냥 봐도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한 것 같은데 군단장의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일 테고, 나름 승부사의 기질로 무작정 대결을 하기로 결정했고요. 그렇지만 제 얘기를 듣고 나면 확실히 마음이 달라질 겁니다.”
“…….”
“일단 멸검 아르테스의 유형은 대검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다만 금속성이 아닌 각질로 만들어졌는데, 검면이 굵직한 지렁이와 같은 힘줄들로 칭칭 감겨져 있는 것이 방금 도살된 그 어떤 가축의 뼈다귀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답니다.”
“…….”
“사실 멸검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그 정도는 대장님도 들어 봐서 알 겁니다. 하지만 그 유래는 저같이 명검에 대해 학식이 높은 전문가들만이 아는 사실로써 일반인들은 자세히는 모르는 내용이 있지요.”
보통 신검의 유래는 주인 외에는 은밀한 비밀로 간직되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손잡이의 끝에 알 수 없는 검은 타원형의 보석이 박혀 있는데, 사실상 그게 멸검의 힘을 일으키는 원천적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감정사들은 그것이 영물의 정수라 불리는 멸옥이라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그 역시 처음 듣는 용어였다.
“멸옥이라고?”
“신검들의 원천을 살펴보자면 신, 정령, 악령, 신성, 악마, 심지어 잡신들 등등 그 종류가 다양한데 멸검 같은 경우는 영물의 정기로 탄생한, 아주 희귀한 것이죠. 물론 이쯤에서 그 영물이 드래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멸검은 불의 기운이 아닌 닿는 즉시 소멸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그 주체적 동물은 용을 잡아먹는 ‘드라고나’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거죠.”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드래곤, 그런데 그것을 잡아먹는 영물이 있다는 것 역시 생소한 얘기였다.
“드래곤이 불을 내뿜는다면 드라고나는 흑색 기류를 뿜으면서 그것에 닿는 것들을 멸절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속성이 있지요. 그걸 원천으로 탄생한 멸검 아르테스는 상대의 무기 혹은 신체에 닿기만 하면 즉시 소멸을 시켜 버리니 현재 세상에 출현한 신검 중 매우 강력한 것 중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대장님이 무슨 수로 그런 검을 가진 자와 대결을 할 수 있단 말이죠.”
녀석은 말하다 말고 걸음까지 멈추었다.
“자! 이제 돌아가시죠. 군단장도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대장님이 현재 지닌 그 녹슨 검이나 여타 처지를 볼 때 그리 크게 탓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검술이 아무리 뛰어난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는 법! 신검에 대항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물론 신검의 반대 속성을 지닌 인검을 지니고 있다면 모르지만요.”
“…….”
나 역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녀석이 좋아했다.
“하하, 진작부터 그랬어야죠.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것도 필요한 법. 그렇다고 대장이 겁쟁이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나는 이미 태양을 삼켜 버린 서산을 바라보았다. 이내 땅거미가 어둑어둑 밀려왔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치려 했던 것이다.
그다음 날.
아침부터 징징거리는 녀석.
“왜 고집을 피우시는 겁니까. 나참, 대장님 상대가 아니라니까요!”
이제 보니 제나이더가 수행관으로서 나를 따라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바로 나를 설득시켜 내 마음을 돌리게 하려는, 다소 속 깊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지도를 보니 저 언덕만 넘으면 도시 성곽이 보일 텐데.”
“대장님! 저길 넘으면 다시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다고요.”
“상관없어.”
“상관없다니요!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을.”
지난 4년 동안 대륙 여행을 했지만 바트라 제국의 수도는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대양과 대양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해상 교역 제국, 머나먼 바다로부터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상선들의 풍부한 무역품들 덕분에 재정적으로 상당한 부를 이루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군부에 투자해 오늘날 서반의 영토 3할을 통치하는 강대국으로 올라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