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수장님, 웬만하면 검 좀 바꾸시지요.”
“…….”
나는 잠시 검을 살펴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세상에는 은하검에 대한 그 존재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모조품이 나돌 수 있지.”
제나이더는 마치 내가 그 질문을 하리라 생각했는지 씩 웃어 보였다.
“헤헤, 물론 진품이 있어야 그걸 모방한 가짜도 존재할 수 있겠죠.”
녀석은 다시 내 검을 집어 들더니만 가볍게 휘둘렀다.
“한데 말이죠. 저처럼 명검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조금만 깊게 대화해도 현자의 검이 실존했다는 것을 믿으실 겁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새겨진 문양이나 글씨들은 그 누구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도요. 그나저나 이거 진짜 녹이 많이 슬었지만 가짜치고는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졌군요.”
나는 슬슬 호기심이 일어났다.
“은하검은 망상의 검이라도 하지. 쓸데없는 것을 쫓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태까지 은하검이 실존했다는 소리는 너로부터 처음 듣는 얘기인데 그게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나?”
그렇게 그를 떠보기로 하고 일부러 지어낸 말인데.
녀석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증거요? 그런 건 없는데요.”
“…….”
갑자기 킥킥대며 웃는 녀석.
“하하, 그런데 이거 보면 볼수록 느낌이 묘하네요. 도대체 어디서 구하셨어요. 저도 하나 구입하고 싶군요.”
나는 딴청을 부리는 녀석을 조금 더 추궁해 보기로 했다.
“명검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은하검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고 싶군.”
내가 진지하게 묻자 녀석 역시 눈빛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은하검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혹시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명검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는지 묻고 싶군요?”
“그저 소문으로는 들어는 봤지만 자세히는 몰라.”
“검술에는 그렇게 능하신데 정작 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군요. 지난번 수장님이 제압한 제시우스가 지닌 베른의 신검 역시 명검 축에 속할 수 있지요. 물론 낮은 계열이지만요.”
“낮은 계열이라니?”
“명검 중 제일 하급이란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명검들이 가끔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곤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검이 다 같은 명검이 아니라는 거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도 급수 차이가 엄청납니다. 명검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데 그 첫 번째는 신검(神劍)에 속한 것들입니다.”
신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조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녀석의 말을 계속 듣기로 했다.
“신검의 정의를 잠깐 살펴보자면 그걸 사용하는 자의 검술 능력과는 상관없이 검 자체만으로 신기를 뿜어낼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죠. 베른의 신검 역시 주인을 잘못 만나서 그렇지 나름 위력이 강한 신검 중 하나입니다. 다만 계열이 낮은 건 어쩔 수 없고요.”
“…….”
“어쨌든 신검이 세상으로 나오는 배경에는 그 나름의 전설과 일화가 반드시 존재하는데, 확실한 배경을 아는 사람은 그 주인 외에 없다고 봐야겠죠. 현재 신검 중에는 멸검(滅劍) 아르테스가 일단은 제일 유명하죠. 그것도 주인을 잘 만나서 말이죠.”
[멸검 아르테스]
아르테스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전 주인이 죽고 나면 그다음 시대에 검 스스로가 주인을 선택한다는 신비의 검이었다. 현재는 네오 제국의 검사이자 마법에 능한 제론이란 자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사실 멸검 아르테스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조용히 신기(神奇)를 감추고 아직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상의 검들이 그 어딘가에 제법 존재하거든요. 그걸 찾아다니는 자들, 아직 묻혀 있는 것들, 그리고 주인을 찾은 검들이 곧 세상으로 출현하게 되겠죠. 명검의 두 번째 유형은 인검(人劍)입니다.”
처음 들어 보는 용어였다.
“인검이라니?”
“신검과는 다소 반대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요, 그걸 사용하는 자의 정신과 혼이 담겨진 검이라 해서 인검이라 하지요. 검 자체가 사용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진화(進化)한다고 할까요.”
“…….”
나는 그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세상에 진화하는 검이 존재하다니, 그건 말이 될 법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제나이더는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내게 또박또박 말했다.
“검이 진화를 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으시겠지만 분명 존재합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은하검’이거든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은하검이라고!”
“무사의 혼이 깃든 검이라 해서 현자의 검으로 불리게 된 거죠. 그리고 수천 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마다 최고의 용자들이 그 검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나이를 먹고 세상을 떠날 때마다 검 속에 깃든 무사의 혼(魂)은 그들이 남긴 모든 것들을 그대로 축적했다죠. 어느 순간 그게 감쪽같이 없어졌고, 지금은 그저 망상에 빠진 자들을 비하할 때 쓰는 용어로 타락해 버렸지만…….”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후후.”
“엉? 지금 웃었어요!”
“흥미롭군.”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니, 믿을게. 덕분에 재미있었으니까.”
* * *
군단장 클레이는 일개 돌격 중대 수장인 나에게 제7 군단 돌격 부대 대장 직급을 제의했다. 나는 몇 번이고 사양을 했지만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총 마흔다섯 개 중대에 달하는 돌격 병사의 전체 병력은 3,000이 넘었다. 내가 과연 그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자격이 되는지 몰랐지만 일단 그동안 수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내게는 제44 중대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로부터 시공의 궤적 발검의 묘미 28절기를 소화해 낸 자들이다. 돌격 병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 능력이다. 물론 그들이 내 직속 수하로서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다.
그중 가장 강한 샤칸과 도지가 부대장직을 흔쾌히 수락했다. 제나이더는 왜 자신에게는 직급을 올려 주지 않느냐고 찡찡대었지만 결국 제퍼와 함께 내 수행관이 되기로 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도지가 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예로서 집정관이었던 주인이 전장으로 갈 때마다 늘 함께했기에 그가 나보다 통솔력이나 여타 것들이 나은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그에게 부대장 이외에도 작전 참모라는 직급도 부여했다.
센 제국의 제7 군단은 초기에 밀집 장창 보병대와 다를 바 없었다. 긴 역사를 통해 다양한 전술을 습득함으로써 근대 이전 가장 강력한 보병 집단이 되었다. 이후 정복 전쟁의 여파로 장기간의 원정이 필요해지게 되는 시점에서, 군단의 주력 병사들의 총원을 60,000명의 군단과 그에 맞먹는 수의 보조병으로 구성하였다.
군단 중핵은 중장 보병과 기마병으로 나누어지고 보조 병사들은 투석, 공성, 돌격으로 나누어진다. 나는 비록 3,000여 병사를 이끄는 돌격대장이지만 군단의 중핵이 아닌 일반 보조 병사에 속하는 소모성 지휘관이었다. 주력 병사들을 위해 우리 돌격 병사들이 희생된다면 그만큼의 숫자를 충원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든 신병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대장으로 있는 한, 한 가지 결심을 하기로 했다. 초반의 희생양이자 소모성이 아닌 어떻게든 살아남게 만들어 보조가 아닌 주력 병사들과도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확고하게 정해진 군단 체제에서 거의 가능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일 내가 전체 돌격 병사들에게 강도 있는 검술 훈련을 시킨다면 희생 숫자가 줄어들 테고, 언젠가는 중장 보병이나 기마병들과도 같이 중핵이 될 수 있다는 일종의 야망을 가져 봄 직했다.
군단장 클레이는 센 제국의 많은 장군 중에 전술적으로 가장 유능했으며 군단 체제를 가장 잘 사용한 인물이었다. 다수의 기병을 이용한 측면 후방 공격으로 전선의 보병대에 충격 효과를 일으키는 데 능했다. 또한 그는 주력 군단과 보조 병사들의 그 유기적 체제를 이용하여 다양한 전술적 국면에서 적절한 전투 상황을 유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중장 보병과 맞먹는 수효의 보조 병사들을 운용함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극대화되었으며 공성전이나 방어전에서도 많은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는 보조 병사에 지나지 않는 내 돌격 대대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제7 군단은 또다시 긴 휴식에 들어갔다. 바트라 제국의 제13 군단이 자신들의 조국으로 귀환을 서둘렀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든 돌아올 그들에 대비하기 위해서 국경 근처에서 진영을 이루어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이때 한 가지 좋은 점은 경계를 위한 진영에서 주력 병사들이 그 임무를 맡기로 했으며 반대로 보조 병사들은 각 지휘관의 소량으로 자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체제를 이용해서 내 돌격 병사들과 함께 인근 드넓은 숲 지대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유인즉 3,000에 달하는 그들 모두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검술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발검의 묘미 28절기]
이미 제44 중대원들 120명이 익힌 검술이기에 그중 가장 뛰어난 자들을 뽑아서 각 중대장을 역임시키는 동시에 검술 수련을 맡게 하는 것이 내 계획이었다.
나는 일단 지휘관으로서 생전 처음으로 참모 회의라는 것을 하기로 했다. 내 막사 안에는 나와 수행관인 제퍼, 제나이더, 그리고 작전 참모인 도지와 부대장 샤칸 외에 이제 막 배정을 받은 중대장들이 참석해 있었다.
회의 내용은 특별한 내용은 없었고, 그저 서로의 안면을 익히지는 의미가 중요했다. 나는 원래 취지대로 전 병사들의 전투력 강화를 강조했고, 훈련에 힘써 달라는 당부를 했을 뿐이다. 회의가 끝나자 중대장들은 자리를 떴다. 이제 남아 있는 자들은 나의 핵심이 할 수 있는 참모들이었다.
도지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님… 갑작스레 이런 말씀드린다는 것이 저로서도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꼭 해야 하기에…….”
여성보다도 그윽한 눈길, 나 역시 그가 동성애자라는 선입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지라 그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말해 보오.”
“다음에는 절대 군단 간에 일대일 대결을 피하시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의외의 말에 나는 다소 어리둥절했다.
“일대일 대결을 피하라니요?”
그는 절실한 표정으로 다시 말문을 이어 갔다.
“신검의 시대에는 오로지 신검의 주인들만이 서로 간에 대적을 할 수 있을 뿐, 평범한 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대장의 검술 실력이 가히 출중할지라도 신검 앞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대장님은 이제 제7 군단의 정식 돌격대장 직급에 올랐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동안 죽음의 압박에 시달려왔던 보조 역할에 소모성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에게 대장님은 한 줄기 광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굳이 생명을 건 도박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