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나는 시공의 궤적, 발검의 묘미의 그 첫 장을 기본으로 일부러 허튼 몸짓을 함으로써 그의 반응부터 살폈다.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조금 비틀었고 그 조준은 그가 아닌 왼편 허공 쪽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제시우스는 나의 그런 발검 동작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즉 정공법이 아닌 사검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검사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지면에서의 안정 자세인 자연체 발검 보법마저 조금의 변형을 일으켜 오른발 대신에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유인즉 내가 검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기에 당연히 오른손잡이이고 오른발을 내밀어야만 정상인데 왼발을 내미니 내 예상대로 그의 눈빛은 가늘게 흔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쿡!
그는 갑자기 대검을 바로 앞 지면 위에 강하게 박아 넣는 게 아니던가.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는 여유 있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어떤 식으로 공격하던지, 얼마든지 받아 줄 테니 마음대로 덤벼 보라는 오만한 자세로 말이다.
그런 행위는 검술의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강자의 권리이다. 아직 초합을 겨루지도 않은 격돌 전이건만 그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굉음.
우지직!
단지 검을 지면에 꽂았을 뿐인데 땅이 방사형으로 갈라졌던 것이다. 베른의 신검의 위력 그 자체만으로 신기를 일으킨 것이다. 제시우스는 애초 그런 현상을 내게 보여 줄 심산이 분명했다.
자신이 바로 이 검의 주인이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보여 준 것이다.
즉 함부로 덤볐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렬한 눈빛과 조소 어린 미소가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배운 것은 방어적 개념이 아닌 오로지 공격을 통한 실전 검술. 때마침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휘잉.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지만 바람이 그를 훑고 지나가며 내게 흔적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현재 그의 모든 미세한 동작, 예를 들어 손끝의 떨림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는 초연의 자세. 이어 나는 지면을 딛음과 동시에 빠른 도약으로 내 녹슨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타다닥.
홱!
삭!
“억!”
제시우스의 황금빛 대검, 그리고 그 손잡이를 움켜쥔 손목이 함께 절단되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어 내 검 끝이 그의 목덜미를 관통하며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
“…….”
평원을 가득 메운 양측의 군사들, 방금 전 나와 제시우스의 그 순간적인 격돌 광경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정적을 지켜야만 했다.
그들의 성스러운 대결의 장 한가운데에는 서 있는 자와 쓰러진 자만이 있을 뿐, 예상했던 치열한 격돌의 장면은 전혀 없었다. 나는 내 녹슨 검을 어깨에 메고 진영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대결은 끝이 났건만 그 어떤 함성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바트라 제국 제13군단의 최고의 검사인 제시우스의 죽음, 쌍방 간 그 어떤 병사들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승리에 대한 기쁨의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걸어서 돌아올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내 결정이 옳은 것 같았다. 대결 전에 나는 상대가 베른의 신검 주인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정공법으로 치고받고 싸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승부는 최대한 빨리,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허점을 노려 일 검만으로 충분하다 느꼈다.
제시우스라는 자의 허점이란 바로 신검을 너무 믿는다는 것이었다. 팔짱을 낀 채 여유를 부린 것은 내 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무모한 짓에 불과했다.
[세상에 빠른 것보다 강한 것은 없다.]
시공의 궤적이란 상대의 발검 동작 전에 이루어지는 쾌검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베른의 신검과 굳이 부딪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사검의 자세로 혼란함을 주어 그가 신검을 잡는 순간 손목을 절단했고 가속이 붙은 검 끝이 목덜미를 뚫어 버렸던 것이다.
제시우스의 멋진 위용에 어우러지는 현란한 검술, 그리고 베른의 신검이 내뿜는 엄청난 신기 현상을 기대했던 자들은 허망했을 것이다. 너무도 말이다. 어찌 본다면 그들은 나를 편법을 사용한 비굴한 대적자로 볼 것이다. 심지어 아군에서조차 그런 자들이 있을 법했다.
그러나 승부란 결과만이 존재할 뿐. 또한 나는 내 녹슨 검이 베른의 신검에 견딜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안 된 상황인지라 굳이 모험을 걸 필요는 없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군단장 클레이와 기병대장 아르제니, 그리고 참모 페르시우스와 론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자신들 쪽으로 뚜벅뚜벅 돌아오는 나를 바라보며 그저 멍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전장에서 숱한 경험을 쌓은 기병대장 아르제니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체 어찌 된 것이요?”
군단장 클레이는 감탄을 이기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대단한 승부사를 본 느낌이요.”
페르시우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론 역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이제 막 일 검의 신화가 시작되었을 뿐인데요.”
군단장은 여전히 넋이 빠진 사람과도 같았다.
“일 검의 신화라…….”
내가 진영으로 돌아오자 수만의 병사들은 마치 나를 귀신 보듯 했고 내가 향하는 곳곳에 자연스레 길을 터주었다. 여전히 함성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신기한 마술을 본 듯 어리둥절했다.
그나마 저만치 앞서 나를 반겨 주는 자들은 제44 돌격 중대원들 뿐이었다. 그렇게도 말수가 없고 과묵했던 샤칸이 제일 먼저 나와 나를 반겼다.
“수장……. 수고했소.”
도지 역시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수장 부하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다소 심약한 제퍼는 내게 다가올 생각조차 못 했다. 다른 병사처럼 그저 놀란 토끼와도 같이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말 많은 녀석 제나이더는 이 순간에도 그 성격은 여전했다.
“와우. 수장님! 어쩜 그리고 멋있습니까. 큭. 솔직히 실망했어요. 나는 베른의 신검이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한번 구경 좀 해 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쉽게 끝내다니요. 나 참. 상대가 신검을 집자마자 손목을 절단 낼 줄이야. 신검이 그렇게도 두려웠습니까?”
“…….”
사실 두려웠다. 신검이 내뿜어 댈 그 위력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구경꾼이 아닌 냉정한 대적자일 뿐, 그런 신기 현상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오로지 이기면 그만인 것이다.
잠시 후 화려한 군장 차림의 군단장과 참모진들이 직접 나와 나를 반겼다.
“오호. 자네 이름이 이형도라 했던가!”
군단장 클레이는 내게로 다가와서는 직접 내 손을 잡아 주기까지 했다.
“바트라 제국의 제13군단의 최고의 검사인 제시우스를 일 검에 제압하다니. 세상에 이런 인재가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그 유명한 아르제니 기병대장조차 나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그런 실력을 갖추었다면 당장이라도 내 기병대 최정예 전사로 기용할 수 있을 텐데. 혹시 기마술은 배운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군단장이 그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보시오! 이형도는 엄연히 제7군단 소속이요.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는 게요.”
그가 이번엔 나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현재 제44 돌격 중대 수장이라 했지?”
“네.”
“이번 기회에 보직을 바꾸어 볼 생각이 없는가? 물론 지금의 직급보다 훨씬 나을 걸세.”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저는 현재로서 만족합니다.”
“…….”
“이만 할 일이 끝났으니 제 진영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샤칸, 도지, 제나이더, 제퍼, 그리고 내 중대원들에 쌓여 나는 허름한 막사들이 빼곡히 있는 제44 돌격 중대 진영으로 향했다. 다들 흥분했고 열띤 분위기였다. 이런 순간에 제나이더 녀석이 빠질 리는 없었다.
“수장님은 대체 멋있는 척은 혼자서 다 합니까! 나 참. 엄청난 일을 해내고도 안 그런 척, 속으론 좋으면서 표정은 담담하고, 지금 연기하는 거죠. 그냥 솔직히 내숭이라 말하시죠.”
순간 샤칸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탁!
“왜 때려요!”
“너는 말이 너무 많아.”
“…….”
* * *
[살펴봐요
그 안에 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어요.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하지 말아요.
목숨을 바칠 가치가 없다고 하지 말아요.
싸워 볼 가치가 없다고 하지 말아요.
내 꿈의 신념이 되어 주세요.
무엇이라도 희생하겠어요.
당신의 사랑을 어디에 비견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의 사랑도 더 위대하지는 않아요.
그 어디에서나 당신이 없다면 더 이상 저는
갈 곳도 없어요.]
마치 플린시아가 녹슨 검을 통해 내게 전해준 메시지, 아직도 내 영혼의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었다. 지난 날 그녀와 함께 있던 시절, 초시공전사 테스트를 위해 그녀를 떠나야만 했던 순간.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저는 항상 이곳에 머물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함께 했던 기억들은 당신만의 것이 아닌 우리들 것이니까요.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여기로 돌아와서 옛 추억들을 떠올려 봐요.
삶에 그 모든 상처들이 치유될 테니까요.
그거 아시죠.
제 영혼은 항상 그대 곁을 맴돌며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세상 바깥으로 당당히 나아가 당신의 위대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 주세요.]
저물어 가는 서녘 황혼에 갑자기 검 날이 주황빛 섬광을 번쩍였다. 그제야 나는 확신했다. 그녀 대신에 남겨진 이 검이 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진한 감동이 밀려왔고 녹슨 검을 뺨에다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회상의 끝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녹슨 검을 다시 살펴보았다.
내가 이리저리 검을 살펴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수장님. 뭐 하세요?”
제나이더였다.
“도대체 녹슨 검에 한 맺히셨나요. 하루에 반나절은 온통 그거에만 신경을 쏟으시니 말이죠.”
그때였다. 녀석은 가만히 내 검을 살펴보더니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엉? 이거 요기 손잡이에 새겨진 문양이나 검 면에 빼곡히 보이는 글씨체들이 은하검 하고 비슷하게 생겼네요.”
“…….”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은하검을 알지?”
그저 씩 웃고 마는 녀석.
“후후.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제가 한번 자세히 살펴봐도 되겠죠?”
정말이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내가 레벨 업을 하면서 얻은 그 아이템. 그런데 이 녀석이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은하검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인지….
“생각보다 가볍네요.”
“…….”
“그런데 이거 참 상당히 녹이 슬어서… 문양이나 글씨들이 잘 보이지 않는데요. 물론 이것도 요즘 돌아다니는 모조품들 중에 하나겠죠.”
녀석은 검을 내게 돌려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