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결국 양측 기병대가 참가함으로써 이 전투는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군은 평원 후방 쪽으로 수백 미터를 물러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적의 주력 군단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나와 돌격대원들 역시 사력을 다하며 적의 진군을 막으려 했지만 수만에 달하는 그들에게는 그저 바위에 계란 깨기 식으로밖에 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부우! 부우!
아군의 양옆으로 등장한 수천의 기병대원들. 초록빛 깃털에 은빛 군장, 철갑을 휘두른 말들이 적진을 향해 돌입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 아군들의 눈빛들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마냥 잔뜩 기울어져 갈 패전 분위기에 크나큰 한 줄기 광명을 맞이하는 그런 분위기였다.
[아르제니 기병대]
센 제국의 수호신이 제7 군단이라면 아르제니 기병대는 가히 신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일종의 상징이 아니던가. 최고의 검사들이 최고의 기병 기술을 지녀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정예 중의 정예, 기병대장 아르제니는 제7 군단장 클레이의 도움을 받아들여 이곳에 참가했던 것이다.
애초 전세가 밀리는 상황에 전개될 즈음 해성과도 같이 나타나서 일시에 전세를 역전 시키는 작전이던가. 그런 전술은 곧이어 현실로 드러났고, 이제는 바트라 제국의 제13 군단이 뒤로 밀리는 역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와와.
언제나 그렇듯 해가 중천에 떠서 시작된 대규모 전투는 서녘의 황혼이 세상을 붉게 물들 즈음이면 격렬했던 막을 서서히 내려간다. 그 누구의 승리도 아니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쌍방 간 희생자들 수만 늘어났고, 병사들의 시체만이 드넓은 초원을 뒤덮을 뿐이었다.
* * *
그로부터 한 달 후.
제7 군단은 여전히 적과 대치 중에 있었다. 그동안 총 다섯 번의 격전이 있었지만 전력이 비슷해서 서로 간에 이득도 없이 현재는 각자의 진을 꾸리고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적의 제13 군단의 다무렌으로부터 느닷없이 전령이 왔고, 그 내용에 대해 군단장 클레이는 참모 회의를 소집해 긴급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아르제니 기병대장과 그의 젊은 참모인 페르시우스와 론도 참석했다. 클레이가 말문을 열었다.
“방금 전 다무렌이 전령을 통해서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 왔소. 쌍방 간 병사들의 희생만 따르는 소모전 대신에 각각 최고의 전사를 내보내어 대결을 치르게 하여 그 승패 여부에 따라 헤몰튼 평원의 요충지 확보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자고 말이오.”
순간 참석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런 방식의 대결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가다 종종 있는 경우도 있었다.
양쪽의 전력이 비슷할 경우에 군단장들은 각자의 아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일대일 대결을 추진하는데, 그 승패 여부에 따라 영역을 차지하느냐 아니면 물러나느냐, 하는 결정에 따른다. 하지만 클레이의 작전 참모들은 이구동성 반대의 의사를 밝혔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그건 다무렌의 책략이 분명합니다. 그의 제13 군단에는 불멸의 검사라 불리는 제시우스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조카이자 현시대에 있어서 가히 독보적인 검사로 하여금 이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자들도 백 번 동의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제시우스는 베른의 신검 소유자 아닙니까. 그의 검술이 뛰어날 뿐 아니라 베른의 신검은 상대의 검을 두 동강 낼 정도의 명검으로써 아직까지 그와 그의 검을 뛰어넘는 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군단장 클레이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르제니 기병대장에게 물었다.
“그대의 기병대에는 검술에 출중한 자들이 많이 있지 않소이까. 혹시라도 제시우스를 상대로 나설 용사가 있다만 말씀해 주오.”
아르제니 역시 그다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옆에 착석해 있는 페르시우스를 슬쩍 쳐다보며 그를 군단장에게 소개했다.
“여기 페르시우스가 있긴 있지만…….”
군단장 역시 그가 현 집정관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검술도 뛰어나다는 것을. 하지만 불안했다. 상대는 베른의 신검 소유자인 제시우스가 아니던가. 페르시우스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우스는 그 자신이 기꺼이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때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아르제니 기병대 참모인 론이라 합니다. 제 사견이지만 제시우스와 겨룰 만한 자가 현재 이곳 제7 군단에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제1 군단장의 차남인 론, 그 역시 군부의 실세 가문으로서 군단장 클레이도 아는 청년이었다.
“제시우스와 겨룰 만한 자가 있다니, 그게 누구인가?”
“바로 이형도입니다.”
클레이와 아르제니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형도라…….”
“들어 본 것도 같은데.”
“돌격 중대에 속해 있는 자입니다.”
론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제야 그들은 기억이 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놀라운 검술로 상대 적장을 베었던 그 중대장.”
“아마 시공의 궤적이라는 검술이었죠. 그만이 제시우스를 상대할 자격이 있다고 보고 감히 추천을 드리는 바입니다.”
클레이는 의아해했다.
“그런 자가 제7 군단에 들어왔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장교가 아닌 신병으로 입대했기에 모르실 겁니다.”
순간 깜짝 놀라는 클레이.
“신병이라니?”
론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군단장은 잠시 고민을 하나 싶더니만 이내 참모진에게 명령했다.
“당장 이형도를 찾아서 이리로 데려오게나.”
나를 바라보는 군단장 클레이와 기병대장 아르제니, 그리고 참모진들 모두가 실망 가득한 눈빛을 했다. 제7 군단의 돌격 중대 소속 병사들의 허름한 차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 대부분 목숨을 걸고 싸운다지만 실상 이들에게 지급되는 것은 최소한의 경갑과 하급 계열의 무기들, 나무 방패가 전부였다. 물론 수장인 나는 그나마 어깨와 무릎 보호대가 추가 지급되어 있다지만 그조차 장교들이 쓰다 남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나를 가장 안쓰럽게 본 것은 바로 허리춤에 찬 녹슨 검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 자리에 옛 교우였던 페르시우스와 론이 있음에 내심 무척 반가웠다. 녀석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고, 눈짓으로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한데 내가 느닷없이 이곳 최고 사령관 회의실에 불려 왔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감히 눈도 마주치기 어려운 제7 군단장인 클레이가 나를 살피며 직접 물었다.
“자네 이름이 이형도인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이쯤에서 여기에 불려 온 이유를 조심스럽게 묻기로 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부탁이라니… 군대에 있어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체제에서 최고의 상관이 부하에게 쓰는 용어는 아니었다.
“알다시피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이번에 자네를 제7 군단 대표로 바트라 제국의 검사와 대결을 추진하려 하는데.”
나는 직감했다. 결국 이 지루한 전투에 있어서 쌍방 간 가장 강한 검사를 내보내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제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나 역시 돌격 부대 일개 수장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네만, 4년 전 자네가 보여 주었던 그 검술 실력이라면 한 번은 기회를 주어도 괜찮다고 느꼈네.”
“…….”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어렸을 때 잠시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이런 대규모 군단의 전사 대표로 출전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런 일이었다.
“상대가 누군지 여쭈어봐도 될는지요.”
“물론이지. 상대는 다무렌의 조카 제시우스라는 자이네. 자네 역시 익히 들어 봐서 알 걸세. 베른의 신검의 주인이기도 하지.”
“…….”
솔직히 제시우스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지난 수년 동안 연을 끊고 있었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른의 신검에 대해서는 얼핏 들어 본 적은 있었다.
“바트라 제국에서 그의 명성은 대단하다네. 그는 주로 이런 실전에서 군단을 대표하여 출전하여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다네. 그런 그를 자네가 상대할 수 있는지 그것부터 물어보고 싶군.”
나는 솔직한 심정을 말하기로 했다.
“자신 없습니다.”
“…….”
장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 *
풀잎을 뜯어 허공에 날려 보아라.
그리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주변 공기를 느끼도록 노력하라.
상대의 미세한 동작에도 바람이 이니
검은 이미 그 작은 흐름에 내맡겨질 준비가 되었으리라.
바로 그것이 지금부터 네가 배워야 할 검술.
‘시공의 궤적’이니라.
[시공의 궤적(軌跡)]
은하 연합에서 내게 요구한 바로 그 검술.
검보다 그 주체자의 발검 동작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진리. 느껴라, 반드시 느껴야만 된다. 검날이 펼치기도 전에 상대의 비틀림, 그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와와.
양측에 포진한 군단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평원 한가운데 나는 제시우스라는 인물과 마주하고 있었다.
금빛 번쩍이는 군장에 엄청난 크기의 황금빛 대검, 햇살에 번뜩이는 검날이 너무도 눈이 부셨다. 그건 세상에 몇 개 안 되는 명검 중의 명검인 베른의 신검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나는 여전히 초라한 돌격 중대 수장 차림새, 검마저 녹이 슬었으니 아군 측 진영에서는 왜 나 같은 자를 군단을 대표하는 전사로 내보냈는지 실망 가득한 분위기였다.
제시우스라는 자의 눈빛부터 살폈다. 보통은 상대의 열악한 차림새에 다소 내리 보고 자만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매우 침착하고 속을 내보이지 않는 인물인 것 같았다. 세상을 초연한 검사의 표정처럼 마치 나를 성스러운 대결자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고강한 자들의 고독이 서려 있는 모습이랄까.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발길을 옮긴 것은 나였다.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감으로써 이 대결의 서막을 시작하기로 했다. 제시우스 역시 내 동작 하나하나에 그 모든 신경을 쏟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라도 흔들리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