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지난 반년 전 시작된 고된 훈련이 이제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병사 중 주조에 능한 병사들 몇몇이 열매를 따서 담가두었던 술을 나는 시공의 궤적, 발검의 묘미 28절기에 대한 졸업을 의미하기 위해 이들에게 풀기로 했다.
그리고 또다시 의문이 든다.
은하 연합에서 요구하는 초시공 전사 테스트에서 오로지 이 세계에서는 시공의 궤적만을 사용해야만 하는 임무. 만일 내 원래 능력을 사용하면 나는 테스트에서 자동으로 탈락한다는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저녁 식사 후 중대 병사들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각자 술을 마시며 서로 간에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마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자들, 오늘은 각자 속에 담아 두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그동안 친해진 동료들에게 털어놓았다.
대부분 농민이나 노예, 혹은 기막힌 사연으로 들어온 자들. 그중 어떤 자는 자신이 제국의 엄격한 신분제도 때문에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는 희생을 감수한다는 푸념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 주제가 봇물이 되듯 여기저기에서 자신들도 희생자의 신세라는 한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중대의 제일 막내, 제나이더,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 이런 모임이 있다면 나서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형님들, 그런 것도 희생이라고 그렇게들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까. 나참, 말도 안 나오네.”
제나이더 역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술이야! 내가 알기로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에 불과 한 놈이! 싹수가 노랗군! 노래.”
“나이가 무슨 상관있다 그럽니까. 저는 명색이 자랑스러운 제44 돌격 중대원 중 하나인데 뭐가 문제죠.”
“말을 하면 뭐 해, 쳇.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뻥을 치려고 감히 형님들 앞에 나섰는가.”
제나이더는 공터 한가운데로 나오더니만 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형님들이 자꾸 희생자라 스스로 불쌍한 척하는데, 정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희생이 뭔지 아십니까?”
대원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녀석은 대체 어디서 왔고 어느 지방 출신인지 몰라도 참으로 일반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얘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 덕분에 그의 상상력이 유발했든, 실제 그런 세계가 존재했든 간에 신비한 내용들을 많이 접할 수가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진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희생에 대한 얘기를 들려 드리죠. 세상 끝마저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 세상 모든 사람에게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대륙,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바람에, 그 바람이 해양을 건너 또 다른 대지의 바람에 전해 주어 결국 이곳에 사는 어떤 마법사가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저는 그분으로부터 알게 되었고요.”
그는 일단 본격적인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늘 지니고 다니는 작고 아담한 하프부터 꺼내 들었다.
“제 노래부터 한번 들어 보시죠.”
곧이어 그의 멋진 노랫가락에 하프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매일 한 줌의 피를 토해 낸다네.
머나먼 인간들, 대지에 사는 한 용사를 위해
검을 받쳤기 때문이라.
검을 얻는 대가로 영혼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세상에서 가장 신념이 강한 자를 선택했기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네~
그에게 꿈으로서 다가갔고
위대한 사랑으로써 신념을
주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네.
늦으면 늦을수록…….
영원히 꿈속에 갇히고 서서히 기억을 잃어 간다네.
결국 생명의 촛불이 꺼져 간다네.
사랑하는 자의 구원만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네.
저 위대하지만 사악한 카타시에나의 피를 얻어야만
그녀를 살릴 수 있다네. 하지만 용사는 그 검의 진가를
모른다네. 현자의 검의 위대함을~
그의 노래는 거기서 끝났다. 워낙 구슬픈 가락이었던가. 내용마저 다소 슬펐고, 병사들은 숙연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제나이더에게 말했다.
“즉석에서 지어낸 노래 같은데, 좋다는 건 인정을 해야겠군.”
“지어낸 거 아닙니다. 바람이 전해 준 이야기라니까요.”
“그나저나 노랫말에 나온 그녀가 누구지?”
“얘기해 줘도 모를 겁니다.”
“네가 말한 그곳은 우리 같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 뭐, 요정이나 여신쯤은 되겠지.”
“미안하지만 인간입니다. 그곳을 갈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은 드림 워커밖에 없거든요.”
“드림 워커라고?”
“세상에는 수백 명의 드림 워커가 있지요. 그런데 말이죠. 자신의 세계도 아닌데 그곳을 구하려고 스스로 희생한 드림 워커가 있답니다. 그곳에서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희생이라 하지요.”
병사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제퍼 역시 잠을 자기 위해 바로 옆에 있던 이형도를 살폈다. 그런데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이미 잠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병사들이 한 잔씩 따라 주는 술에 취해 버려 제나이더의 하프 연주도 듣기 전에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 * *
바트라 제국에서 최강인 제13 군단이 헤몰튼 평원의 언덕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 집정관 다무렌, 그는 젊었을 때부터 뛰어난 통솔력을 바탕으로 30대 초반에 이미 군단을 이끌었고, 오늘날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할 수 있는 무적의 제13 군단을 키워 냈던 것이다.
오늘 격전을 치러야 할 군단은 센 제국의 명장 클레이가 군단장으로 있는 제7 군단이었다. 상대 역시 승승장구하며 올라온 강력한 군단.
센 제국은 동맹국들의 영토를 침략한 바트라 제국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이곳 헤몰트 평원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군단장 클레이는 명장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다무렌이라는 상대의 위명에는 한참 아래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하는 법, 제7 군단 역시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센 제국의 수호신들이 아닌가. 언제가 바트라 제국의 제13 군단과의 숙명적인 대결을 기다려 왔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었다.
나는 제44 돌격 중대 수장으로서 120명의 병사를 세 개조로 나누어 전투에 임하기로 했다. 제1조 마흔 명은 내가 선두로 돌진하기로 했고, 제2조는 샤칸으로 하여금 이끌게 하였다. 나머지 제3조는 도지가 함께할 것이다.
내가 중대를 세 개 조로 나눈 이유는 각 조의 전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처음 돌격 전투 시에 일단 세 갈래로 나뉘어져 적들을 맞이할 것이고, 우린 중간 지점에서 다시 모여서 백병전의 묘미라 할 수 있는 ‘교합포진’을 취할 것이다.
적은 숫자로 열 배에 달하는 병력을 상대할 때 가장 적합한 전술. 만일 중대 병사들이 소드 48절기를 익히지 않았다면 ‘교합포진’형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햇살 줄기들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그 아래 드넓게 펼쳐진 초원 곳곳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 풍광 아래 이처럼 장엄하고 좋은 날에 천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로지 파괴를 위한 미물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무적(無敵)이라 불리는 저 위대한 바트라 제국의 돌격 병사들이 강철의 검 날들을 앞세워 이쪽으로 돌진해 왔다.
와와.
그야말로 사납고 거친 기세였다. 초반 최강의 군단 전력인 돌격 조의 압도적인 질주를 막을 자들은 제7 군단의 돌격대원들밖에 없었다.
돌격.
아군 측 진영에서도 도각의 방패 부대가 열어 준 사이로 수천의 돌격 병사들이 저 푸른 초원 아래도 쏟아져 내려갔다. 이건 살기 위한 싸움이요, 오로지 죽지 않으려는 생존의 몸부림과도 같았던가. 양측의 돌격대원들은 전장 한가운데에서 맞부딪쳤고, 곧바로 백병전으로 돌입을 했다.
와와.
제44 돌격 중대 역시 그들과 한데 어우러져 드디어 피의 향연 속으로 거침없이 검을 꺼내 들었다.
바트라 제국의 제13 군단의 돌격 병사들 역시 죽음을 불사르는 투혼의 전사들, 초반의 강공은 폭풍이라도 꺾을 기세였다. 지금까지 상대한 자 중 강한 전투 능력을 지닌 백전의 노장들, 초반 아군은 지리멸렬 피를 토하고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이끄는 중대원들만이 저들과 감히 맞설 수 있었으니, 처음 전술대로 세 개의 조로 나누어진 채 각자 눈앞의 적들을 해치며 중간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겁탈당하여 하루아침에 잃은 샤칸의 슬픔, 세상에 대한 끝없는 분노, 유망한 검투사였던 그의 질풍노도를 적들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를 따르는 대원들 역시 각자의 사연과 함께 그와 한 몸이 되어 강대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소드 48절기의 완전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위력은 곧바로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샤칸의 마흔 명 병사는 서로 군집을 이룬 채 적들을 베어 나갔고, 그 왼편에는 도지가 이끄는 3조 부대원들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릴 정도로 가냘픈 몸매, 동성애자라 볼 수 없는 강인함, 하지만 검술의 미려하고 유연함이 어우러진 몸놀림은 가히 검무(劍舞)를 추는 것과도 같았다. 그토록 우악하게 덤벼드는 적들이 그의 섬세한 검술에 쓰러져 갔고, 그를 따르는 대원들 역시 사기가 충천되어 한발 한발 적진으로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끄는 제1조 역시 그들과 부합이라도 하는 듯 오른편의 굴곡진 평원을 내달렸다. 나와 제퍼가 선두로 적들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바로 뒤에는 제나이더 녀석이 뒤따랐다. 녀석은 이런 다급한 전장에서조차 말이 많았다.
“와우! 도대체 수장님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네요. 완벽 그 자체입니다요! 그나저나 제퍼 형님은 수장님만 너무 따라다니는 거 아네요. 아주 꼭 붙어 다니네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강아지처럼 말이죠. 큭!”
다른 중대 병사들의 희생이 속출하고 있었지만 제44 돌격 중대만이 선전을 하고 있었다. 우린 처음 약속했던 전술대로 일정한 지점에서 한데 모여 ‘교합포진’을 펼치기로 하였다.
서로가 운집을 한 상태에서 등을 맞대고 주변의 적들을 제압하는 형식, 앞사람이 지치면 뒷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서로 간의 기력을 보충해 주며 가장 효율적인 전투에 임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이런 아비규환의 백병전에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으니, 삼삼오오 몰려드는 적들은 이 앞을 지나가기도 전에 검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전세는 묘한 상황으로 이어져 갔다. 전체적으로 아군이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유독 우리가 있는 중앙 왼편 지역에서만 뚫릴 기세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 역시 당황스런 기색이었다. 고작해야 120명의 돌격 병사였지만 그 위세는 가히 천 명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결국 나팔 소리와 함께 뒤에서 도열했던 주력의 방패 군단들이 지면을 내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착! 착! 착! 착!
쌍방 간의 전투 체계는 거의 같았으니 이제는 돌격 부대원들이 뒤로 빠져 주고 주력 군단들 간의 진검승부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투석기와 화살들, 투창 부대의 순서 역시 양측이 똑같았다. 하지만 최고의 명장 다무렌이 이끄는 바트라 제국의 제13 군단의 기세가 조금은 더 높았고, 그의 일정한 전술 패턴 아래 그 힘을 더해 가고 있었다.
제7 군단 군단장 클레이 역시 상당한 전략가였지만 상대인 다무렌은 이 시대에 있어서 전설이라 불릴 만큼 전장의 신(神)이 아니던가. 최선을 다하여 전군을 지휘했지만 아군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