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페론 평원의 전투는 제7 군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아군의 희생자 수도 적지 않았지만 켈트족 병력은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다. 들판에 널브러진 시신들이 지평선 아래까지 이어졌다.
제44 돌격 중대는 120명 중 예순일곱 명만이 살아서 이렇듯 가을 햇살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제퍼는 절반의 생존율에 그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깨끗한 천으로 녹슨 검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제퍼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형도, 제44 돌격 중대 수장이 된 것을 축하해.”
“…….”
나는 말없이 검에만 신경을 썼다. 그때 제퍼는 자신에게 내 검을 달라고 했다. 대신 닦아 주겠다고 천까지 뺏어 갔다.
“이제부터 수장이신데 이런 건 앞으로 나한테 맡겨. 그나저나 이런 보잘것없는 녹슨 검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뭐지. 날은 제대로 서긴 섰는데 검면 이곳저곳에 회녹색의 이끼들이 아예 눌어붙어 있어 전혀 닦이지가 않는데.”
“…….”
돌격 중대에는 한 가지 룰이 있었다. 전투 중에 수장이 전사하면 가장 큰 공훈을 세운 병사가 그 자리를 대신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전장에 단 한 번의 출전으로 수장이 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지만 다른 병사들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는지라 나는 제44 돌격 중대를 통솔하는 수장이 된 것이다.
* * *
대규모 전투에 있어서 돌격 중대의 역할이 적의 선봉에 맞서는 것이라면 소규모 국지전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나는 기존 병사들과 신병들로 채워진 제44 돌격 중대원들을 이끌고 금번 켈트족의 영토에 진입해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법 깊은 숲 지대 안까지 들어왔다.
나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으로부터 신뢰와 믿음이 느껴졌다. 지난번 전투에서 내가 보여 준 활약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오로지 시공의 궤적이라는 검술 비급만을 사용하라는 은한 연합의 지시를 따랐고, 이게 초시공 전사 테스트의 과정이라는 것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나마 그 검술 비급의 지식으로 다행히 12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이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겼다.
패잔병 소탕 작전 역시 평원 전투와 마찬가지로 매우 위험한 임무라 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제12 돌격 중대원들 전원이 적의 매복과 기습으로 인해 전멸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나는 행보에 있어서 극히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들은 나를 믿고, 의지하는 내 대원들이기에 말이다.
제퍼는 항상 내 옆에 붙어 다녔다. 우린 언제나 동료 관계지만 그는 상관을 모시듯 내게 특별한 관심을 쏟아 냈다.
지난 3일 동안 삼림으로 울창한 이 지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디도 패잔병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반년이란 매우 긴 시간이었다. 할당 지역에 척후병을 보내어 다시 한번 확인 했지만 이 근방에는 적들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군단에 복귀하기에도 너무 이른 것 같아 일단 숲 한가운데 공터를 골라 그곳에서 병사들과 함께 야영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퍼가 그렇게도 원했던 검술을 가르치는 수련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강요는 아니었고 수련을 원하는 자들만 받는 지원 형식이었지만 병사들 전원이 동참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하기야 그들은 돌격 대원들이 아닌가.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할 테고, 어떻게든 기회가 있을 때 실력을 쌓아 두어야만 할 것이다.
한 달 후.
고된 훈련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기하거나 낙오된 병사들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가르치는 검술의 다음 단계에 모두 잔뜩 기대하는 눈빛들이었다. 나는 모질게 마음을 먹기로 했고, 그들에게 훨씬 강도가 높은 수련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길만이 실전에 임하는 저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시공의 궤적]
과연 병사들이 상급에 속하는 그 기술을 소화해 낼지 모르지만 일단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제 남은 기간은 5개월, 혹독한 훈련과 최선을 다해 가르치다 보면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이곳은 검술 학당이 아닌 그야말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배우는 곳이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발검의 묘미 28절기와 같은 살수 검술이야말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병사 중 대부분은 이미 기본적인 검술 능력이 있었고, 미천한 신분을 증오하고 오로지 살기 위해 싸우려는 그들의 열망은 내가 요구하는 그 모든 훈련을 받아 내고 있었다.
숲 뒤편으로부터 들리는 다급한 외침.
“이형도!”
제퍼였다.
“큰일 났어! 도지가 또 발작을 일으켰어.”
“도지라고?”
잠시 후 입에 거품을 물고 흙바닥에 뒹구는 도지에게 다가가서 그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 어떤 응급조치도 소용없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스스로 안정을 되찾기 때문이었다.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그의 고통에 일그러진 눈빛이 안쓰러웠다.
[도지]
도지는 사내치고 유난히 여성적 이미지 때문에 동료들로부터 계집애란 놀림을 받았지만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원래 그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당당히 얘기할 만큼 단단한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센 제국의 검사관을 주인으로 모셨던 노예, 남자인 그와 사랑에 빠져 동료 노예들에게 질타와 손가락질을 많이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전쟁터에 주인이 전사하자 그는 크나큰 충격을 감당하지 못했고 지금과 같이 발작 증세가 시작되었다 했다.
도지는 중대원 중 시공의 궤적 발검의 묘미 28절기의 성취가 가장 빠른 세 명 중 하나이다. 같은 남자가 봐도 확 이끌리는 매력적인 이미지, 여인보다도 그윽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고 해박한 지식에 지혜로 가득한 눈빛은 처음 그를 동성애자라는 부정적 선입관으로 대했던 동료들조차 점차 그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친화력을 쌓아 가는 중이었다.
왼편 수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수련에 있어서 내가 가장 기대하는 병사의 수련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샤칸]
상당한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근육질로 단단한 30대 초반의 사내, 한때 센 제국에서 유망한 검투사였지만 자신의 아내가 어느 귀족의 사병들에게 골목에 겁탈당하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너무도 분노하여 직접 저택으로 쳐들어가 사병들을 모두 도륙했다.
이미 검증을 통해 최고의 검투사로 오를 수 있는 그의 재질에 그에게 사형 대신에 바로 이곳 돌격 부대로 배치를 받게끔 하는 상부 고위 관료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고, 전장에서 그 한을 달래려 하는 가장 용맹한 전사 중 하나였다.
아내의 일로 냉혹하게 변해 버린 인성은 주변 동료들조차 쉽게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주변에 단단한 벽을 치고 있었고, 언제나 혼자만이 조용한 공터에서 검술 수련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가끔 세상을 살다 보면 의외의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 누구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다가가려는 해맑고 장난기 가득한 어린 영혼이 있었다.
“샤칸 형님! 28절기 십자 베기에 이은 회전 발검 동작에서 뒤꿈치가 지면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으니까 검 끝에 힘이 실리지 않는 거라고요. 헤헤.”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44 돌격 중대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제나이더였다.
‘또 저 녀석이군.’
[제나이더]
워낙 쾌활한 성격이던가. 이제 10대 후반에 지나지 않는 그가 왜 돌격 중대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로부터 그 무엇인가 신비한 능력을 엿볼 수 있었다.
수련에 있어서 가장 게으르고 남의 일에 참견이 많았지만 사실상 그는 이미 소드 48절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최초의 병사 중 하나였다. 물론 파괴력에 있어서는 보다 강도 높은 수련이 필요했다.
원래 마법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내가 볼 때는 천부적으로 검술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또한 녀석에게는 치유의 능력도 있었으니, 수련 중 부상당한 자들이나 아픈 자들에게 자신이 채집한 약초들을 조제해서 바르거나 먹이면 거짓말처럼 낫곤 했다.
나는 세상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여행 중에 수많은 사람을 만나 봤지만 제나이더처럼 여러 면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영혼은 처음 대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동료 중 누구도 접근하기 꺼려 하는 샤칸에게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마치 자신이 검술 마스터인 양 하나하나 동작들을 지적해 주니 이상한 녀석이었다.
늘 그렇듯 샤칸은 귀찮다는 듯 검을 휘둘러 꺼지라고 위협을 가하지만 녀석은 줄행랑을 쳤고, 어느새 다시 돌아와 참견을 계속했다.
“그게 뭡니까! 지면으로부터 허공을 훑고 지나가는 수직 상승 검술에는 왼편 허리로부터 강력한 원심력이 일어나야 하는데 너무 뻣뻣해요. 큭! 큭!”
나는 병사들이 한참 수련하고 있을 때면 숲과 다소 떨어진 이곳 자그마한 호수를 찾는다. 제인피어와 함께 발을 담그며 대화를 나누었던 별장의 강가와 비슷한 분위기, 햇살에 부서지는 수면을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다. 버드나무 군집으로 길게 물속으로 드리워진 가지들, 짙은 녹음에 덧없는 향취가 더해져 늘 이렇게 묻곤 한다.
태양은 따듯하고 그 빛을 듬뿍 받아들이는
대지는 여전히 역동적이라오.
하지만 세상은 당신이 말한 것처럼 거칠다오.
그대와 떨어져 있는 고통은
결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 것 같지 않소.
다만 그저 세월 따라가고 있을 뿐.
어디를 가던 추억의 순간들이 떠오른다오.
그때마다 난 언제나 머리를 치켜들고
지금처럼 하늘을 올려다볼 것이오.
할 수만 있다면 그대와 함께한 날 하루와
앞으로의 천 일을 바꿀 것이오. 이 거친 세상.
도대체 내가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의미를 아직도 모르겠소.
잔잔함과 애틋함이 묻어난 내 심정, 나는 손끝을 물 위에 대어 작은 동그라미 하나를 그린다. 아스라이 중앙로 번져 가며 별장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잠시 후 안개 저편으로부터 신기하게도 반응을 하듯 동그라미가 그려지면 그 파문이 내가 있는 이쪽으로 밀려오는 것이었다. 바람에 수면이 부서지는 소리, 그것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달콤한 속삭임, 바로 그녀의 영혼이 전해 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내면을 살펴봐요
그 안에 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어요.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하지 말아요.
목숨을 바칠 가치가 없다고 하지 말아요.
싸워 볼 가치가 없다고 하지 말아요.
내 꿈의 신념이 되어 주세요.
무엇이라도 희생하겠어요.
당신의 사랑을 어디에 비견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의 사랑도 더 위대하지는 않아요.
그 어디에서나 당신이 없다면 더 이상 저는
갈 곳도 없어요.
플린시아……. 호수 맞은편 그녀의 존재가 느껴졌다.
‘아, 내 사랑.’
당장 그곳으로 건너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나는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내 팔에 안기어 있는 녹슨 검을 슬며시 뺨에 대었다. 플린시아의 숨결……
아~ 벌써 네가 그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