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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얻은 레어템, 현실에는 역대급-121화 (121/143)

121화

아군 쪽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 냈지만 그들의 두툼한 방패는 뚫지 못했다. 만일 켈트족의 돌격 병사들이 아군의 중앙 대열을 와해시킨다면 뒤이어 새까맣게 진격해 오는 엄청난 병력에 하나의 길을 터 주게 되어 삽시간에 백병전으로 돌변할 것이다. 적은 바로 그것을 노렸다. 체계화된 아군의 도각 대열이 무너지기를 말이다.

물론 아군에도 적의 그 돌격조를 막기 위해 결성된 부대가 존재하지 않는가. 쌍방 돌격 병사들 간의 격돌은 전투 초반에 그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돌격!”

각 중대 수장들의 명령에 아군의 돌격 부대 역시 앞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들은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아닌가! 천한 신분을 증오하고 목숨을 건 도박으로써 싸우는 전사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용맹이란 단어도 부족했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랄까. 떳떳하고 당당하게 말이다.

나는 이 첫 번째 실전에 있어서 그들과 함께 나설 수 있다는 것이 진정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쌍방 간 최강의 전사들로 이루어진 강렬한 군집들이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서로에게 방어란 개념은 없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기선을 잡기 위해 오로지 공격에 이은 공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각자의 무기를 앞세워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와와.

제퍼는 나와 약속한 대로 내 뒤를 바짝 쫓아왔다. 다리가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지만 내가 팔을 뻗어 가까스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어 적군 하나가 우리를 향해 무지막지한 도끼로 공격해 왔다. 나는 상체의 유연한 몸놀림으로 피했고, 내 녹슨 검으로 목 부위를 사정없이 찔러 들어갔다.

쿡!

“컥!”

무거운 군장을 착용한 상대의 동작에 비해 경갑 차림의 내 손놀림이 빠른 덕분에 최초의 적병 하나를 즉사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옆쪽에서 아군 하나가 적의 둔기에 머리가 으스러지며 피와 골수를 뿜어내며 힘없이 쓰러졌다.

실전에 처음 임하는 것은 제퍼뿐만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훈련소에서 돼지 사체를 달아 놓고 베는 수련을 수차례 했지만 직접 사람을 도륙하는 것과 반대로 아군이 당하는 광경에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죽고 사는 이런 급박한 순간에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할 뿐, 나는 조금 전 아군을 무참히 죽인 적병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그 역시 둔기를 앞세워 내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한 것이었다.

오로지 시공의 궤적의 비급에 적힌 검술만을 사용하라는 은하 연합의 그 임무.

삭!

“욱!”

적을 속이기 위해 수직 베기의 발검 자세에서 재빨리 허리를 숙여 상대의 하체를 공격했다. 복부 아래 급소에 내 검의 박히는 순간이었다. 손잡이를 비틀어 검을 빼내자 적병은 고통의 비명 소리를 지른 뒤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때까지도 겁에 질려 있었던 제퍼였지만 그 역시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자연스레 동화가 되는 듯 내 공격으로 인해 쓰러진 적의 뒷목을 향해 검을 꽂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감행했다. 적의 피가 자신의 얼굴에 튀자 몹시 당황했다.

“제퍼! 당장 허리를 숙여!”

다급한 외침에 제퍼는 내 말에 따랐고, 갑작스레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한 적병의 대검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투구를 비켜 갔다. 내 위치는 경사가 진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엎드려 있는 제퍼의 등을 밟고 힘껏 도약을 했다.

“이얏!”

지면으로부터 허공을 향해 내 검이 그어졌고, 적병의 흉갑이 반으로 갈라지며 피를 뱉어 냈다.

“아악!”

지면에 안착하자마자 제퍼를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리고 주변을 살펴!”

죽이고 죽고, 어느 한 편이 우세하거나 밀리지 않는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졌다. 쌍방의 돌격 병사들은 서로 간 전투 기술의 우위에 따라 검에 쑤셔 박히는 신세가 되는가 하면, 반대로 여러 명을 죽이고 먹잇감을 찾아 도륙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나 역시 주변에 보이는 대로 인정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이 시점에서 검술에 능한 것이 대세는 아니었다. 오로지 죽지 않기 위해 적의 급소만을 노려 살수를 펼쳐야만 했다. 살인의 개념보다는 오로지 쏟아지는 적들의 숫자를 줄여 나가는 것이 최선일 뿐.

그러나 그 어떤 명분 있는 전쟁일지라도 상대의 살을 베어 피를 뿜고 내장이 튀어나오게 하는 그 행위 자체는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가축 도살자의 기분이었으리라.

백병전에도 서로 간의 한 가지 룰이 있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싸우면서도 곳곳에 눈에 띌 정도로 실력이 강한 자들이 보였고, 그 주변에는 아군이든 적이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일정 반경의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 바로 그런 현상이 나와 제퍼 주변에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죽인 적들만 열 명이 넘었던가. 설마하니 실전에 처음 임하는 제퍼에게도 냉정한 전사의 기질이 있음에 조금은 놀랐다. 여전히 내 뒤에 바짝 붙어 있다지만 내가 선제공격을 감행해 부상을 당해 비틀거리는 자들은 어김없이 그의 먹잇감이 되곤 했다.

아군의 희생도 만만치가 않았다. 특히 1시 방향 둔덕 아래 적병에 의해 쓰러진 아군의 시체들만 대략 20여 구, 유난히 덩치가 큰 적병이 내 시선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는 방패조차 지니고 있지 않았다. 자기 키보다도 큰 대검으로 한 번 휘둘러 치면 아군들의 방패가 쪼개지면서 한 번에 두세 명이 피를 토하고 쓰러질 정도로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내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하게 된 것은 검술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닌 아군의 희생을 줄이자는 동료애가 발동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제퍼는 내 팔을 잡고 만류했지만 이미 나는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타다닥!

적병 역시 나를 발견하고는 그 무지막지한 대검을 앞세워 정면으로 뛰어왔다. 그를 대적함에 있어서 방패가 무용지물이란 것을 알았고,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대신 낡은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으레 체격이 큰 자들은 민첩성에서 조금은 느릴 법한데 상대는 거의 완벽한 발검 자세로 빠르게 전진해 오니 초반부터 그 어떠한 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적병에게는 없는 흑색의 망토 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그가 일반 병사가 아닌 최소한 중대 수장이거나 그 이상의 직급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의 대검과 맞부딪치는 척하며 재빨리 허리를 비틀었고, 가속이 붙은 내 오른발이 그의 왼쪽 허벅지를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대한 체구, 그는 설마하니 왜소한 체격의 내가 자신의 신체를 이용해 뒤쪽에서 공격하리라 생각을 못했던가.

틈이 없다면 틈을 만들라. 상대가 방심한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뒷목에 박아 넣어 버렸다.

꾹!

“욱!”

상대의 빠른 동작보다 내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검을 뽑자마자 지면에 안착했고, 그와 동시에 적병은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이곳이 격전의 장이라지만 아군이나 적군이나 잠시 싸움을 멈추고 이곳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야 알았다.

“수장이 죽었다.”

적들로부터 하나의 작은 동요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점차 흐르자 아군의 용맹한 돌격 부대 덕분에 백병전의 양상은 우리에게 기울어진 것 같았다.

뒤에서 제7 군단 병사들 역시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가. 그들의 전의가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군의 진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마침내 신호탄이라도 터트린 듯 후방의 도각 부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착! 착! 착! 착!

중앙 수천의 병력이 방패부대를 앞세워 진군을 하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대지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떠밀려 가듯 센 제국의 병사들은 한 발 한 발 힘찬 군화들을 옮겼다.

착! 착! 착! 착!

휘잉.

거센 강풍은 제7 군단의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휘날리게 했다. 방패들 틈 사이로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들은 켈트족의 병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발사되는 투석기,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화살들.

삭! 삭! 삭! 삭!

제2선에서의 투창 부대까지 합류함으로써 그야말로 전장은 격전의 장이 되어 버렸다.

“발사!”

홱! 홱! 홱! 홱!

그러나 일정한 대열 없이 물밀 듯이 들어오는 적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엄청난 병력으로 끝없이 밀고 들어왔다.

와와.

제7 군단의 중앙 주력 부대가 아무리 위대한 전의(戰意)를 불태운다 할지라도 적의 월등한 숫자 앞에서는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쌍방 간의 병력 차이는 거의 세 배에 이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명장 클레이가 있었다. 그의 명령에 좌우에 포진해 있던 두 파의 기병대들이 학 모양을 이루어 양면의 안쪽으로 동시에 포위해 들어갔다.

평원 전투에서의 기병대 역할은 가히 적들에게 있어서는 지옥의 사자와도 같았던가. 고작해야 수천 기마대 병력이라지만 수만의 보병들을 도륙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철갑으로 두른 말들과 함께 긴 창으로 마구 쑤셔 대니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적병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났다. 이에 방패를 앞세운 중앙 주력 군단이 함께 전진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가자 켈트족 병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팔 소리.

부우! 부우!

초반에 격돌로 지쳐 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던 돌격 부대의 제2차 진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와 제퍼, 그리고 수천의 용맹한 부대원은 앞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와와.

드넓은 페론 평원은 수십만의 병사로 뒤범벅이 되어 서로 간에 마구 칼질을 해대는 그들의 피와 살점들을 흡수하고 있었다. 짙은 녹음의 풀잎들은 검붉은 액체로 적셔졌고, 하얀 골수는 허공에 씨앗처럼 마구 뿌려졌다.

투석기의 돌에 맞아 아예 머리통이 박살 나는 적병들,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고도 몸부림치며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자들, 나와 제퍼 역시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적들에게 검을 휘둘러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양쪽으로 좁혀 들어오는 기병 대원들의 무자비한 도륙 덕분에 적들의 예봉이 서서히 꺾여 가기 시작했고, 진격의 수위가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들 역시 여기까지의 전투 상황을 예견했던 것일까. 뿔 고동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켈트족의 숨겨져 있었던 기병대가 이번엔 중앙으로 치고 들어왔다.

히힝!

말들의 거친 호흡과 울음소리, 양측 기병대들이 격돌을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도각의 방패 군단마저 대열을 버리고 각각 백병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제7 군단의 병사들은 완전 군장에 이어 철로 두른 방패로 진격해 들어갔고, 그에 반해 열악한 경갑 차림의 가벼운 나무 방패를 쥔 켈트족 병사들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태양이 서녘으로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오전만 하더라도 하늘빛을 듬뿍 담은 싱그러웠던 초원이었건만 이제는 악마의 대지로 변해 버렸다.

제퍼는 허벅지가 베여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상을 모르는 듯 계속해서 칼질을 해 댔다. 나 역시 오른쪽 팔뚝에 적의 화살이 박혔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목이 탔다. 나와 제퍼는 각자 물 가죽 통을 입에 대고 정신없이 마셨다. 서로의 상처 부위로부터 흘린 피의 양이 너무 많았던가. 둘 다 한 통을 거의 다 채운 뒤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리 위로 물을 뿌려 피딱지로 얼룩이 진 얼굴을 닦아 냈다. 나는 제퍼에게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그 자신이 전장에서 전사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해 달라는 바로 그 징표였다.

“살아남았으니 이거 도로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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