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때 갑자기 한 청년이 나타나서 말했다.
“내가 저 미스릴 금속을 베겠습니다.”
아스칼은 그 청년을 보자마자 외쳤다.
“아버지, 우리를 구해 줬던 바로 그분이에요!”
아버지 역시 그 청년을 보더니 눈빛이 반짝였다.
“아니, 저놈이 여기는 또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청년은 두말없이 검을 뽑아 앞으로 가더니 미스릴 금속을 베었다.
삭!
순간 두 동강이 나 버렸고, 사람들이 놀랐다.
총독 카헤티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청년은 금속을 베자마자 아스칼의 아버지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시공의 궤적의 비급서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가르시아는 말없이 그에게 그것을 건네주었고, 청년은 그대로 자기 갈 길을 가 버렸다.
* * *
여기저기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들이 앞서가는 행렬에 의해 밟히고 있었다. 이곳은 길조차 없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풀들을 뜯었고, 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것들을 고이 날려 보았다.
나는 품 안에서 시공의 궤적의 비급을 꺼내어 다시 살펴보았다.
“흠, 초시공 전사 테스트의 첫 번째 임무는 이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성공했고. 자, 다음 순서는 바로 이 검술을 이용해서 실전에 응용하는 것이지.”
나는 여전히 의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대체 은하 연합에서 왜 이곳 세계에서 이런 비급을 얻게 하여 실전에 임하라 하는 거지? 나는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데……. 흠, 시공의 궤적이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이 세계에서 뭔가 겪어야 할 일이 있음에 그저 순응하기로 했다.
이건 초시공 전사 테스트이니만큼 분명 내가 거쳐야 할 다음 단계가 있을 것 같았다.
일단 가 보는 대로 가 보자.
그나저나 이제 뭐부터 하지.
그저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경험하자.
한낮을 달구었던 태양, 이제는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그 거대한 불덩이를 식히려는 듯 시원스레 서풍이 불었다. 제7 보병 군단 신병 훈련소가 북반부 깊숙한 그 어느 이름 모를 초원에 있는 줄은 몰랐다.
센 제국의 도시에서 징병 모집에 자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이제 겨우 훈련소 근처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대자들 대부분은 강행군에 따른 여파로 다들 녹초가 된 상태였다.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위대한 센 제국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훈련소 소장이 기거하는 대형 막사 주변에 그 초라함을 비교라도 하듯 입대자들의 허름하고 작은 막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왼편에는 제국에서 지급하는 경갑과 검 방패를 지급하고 있었고, 신병들은 그것을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검 이외의 것들만 받기로 했다. 다행히도 지급 병사는 내 낡은 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각 열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개의 막사를 배정받았다.
잔뜩 눈을 추켜세운 교관의 시범 뒤에 신병들은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찌르고 방패로 막기의 가장 기초적인 과정부터 반복했다. 나라 밖에는 크고 작은 전란이 끊임없이 발생했고, 당장 병력 지원이 필요한 시점인지라 교관은 아예 작정을 한 듯 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흐르자 그렇게도 어설펐던 신병들의 검날에 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예전에 배웠던 검술을 답습하는 의미로 나름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결코 실력을 숨기고 두각을 나타내지 않으려 했건만 교관들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 발검 동작이 자신들보다도 완벽하게 보였던가. 어쨌든 신병 훈련소에서 내가 녹슨 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데는 그들이 한몫 단단히 했다.
그들은 이 낡은 검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는 은하검이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고.
“이봐, 녹슨 검. 이번엔 네가 나와서 우리에게 한번 시범 한번 보여 봐.”
“…….”
나는 말없이 나가서 교관의 명을 따랐다. 검술이 조금 뛰어난 신병이 신병을 가르치는 것이 간혹가다 종종 있다고 그랬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신병에게 교관인 자신들을 가르쳐 달라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내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 했고, 응용 동작에 이어서는 감탄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게 부담스러워 일부러 어설픈 동작을 섞어 가며 적당히 하려 했지만 그조차 배우려고 안달이었다.
나에 대한 소문은 훈련소 소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소장의 질문은 뻔했다.
“교관으로 남아 있을 생각이 없나.”
단호한 대답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전혀 없습니다.”
“…….”
훈련소 입소 넉 달 만에야 나는 전방으로 향하는 신병 행렬에 가까스로 낄 수가 있었다.
소장은 나에게 자신의 경호 대장직까지 제의하며 어떡하든 잡아 두려 했지만 끝까지 완강히 버틴 덕분에 드디어 내가 원하던 제7 보병 군단에 자대배치를 받을 수가 있었다.
* * *
제7 군단, 제44 돌격 중대에 나와 농부 출신의 제퍼가 함께 배정받았다. 제퍼와는 훈련소에서 이미 안면이 있는 터라 우리는 서로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로써 유난히 창백한 얼굴, 비쩍 마른 몸매에 마치 병환을 앓고 있는 병자처럼 보였다.
총독의 아들 대신에 약간의 금전을 챙기고 대리 징용으로 들어온 그였다. 이 시대에는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는 귀족들의 그런 편법들이 공공연하게 성행되고 있었다. 제퍼는 늙고 힘없는 부모님에게 그 돈을 모두 드리고 대신 이곳에 입영하게 된 것이다.
“이형도, 너와 함께 있으니까 든든하다.”
“나 역시 네가 있어서 든든하군.”
“농담 말아.”
막사 입구로부터 거칠게 생긴 병사 하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너희가 신병인가?”
이곳에 올 때부터 지나치게 군기가 바짝 든 제퍼가 대답했다.
“네!”
“따라와.”
제44 돌격 중대, 선봉에 앞장서서 적의 최초 방어선을 무너트리는 임무를 맡는 돌격 병사들, 과연 그 이름값에 걸맞은 광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지원자들만이 배치를 받을 수 있는, 그야말로 용맹한 자들의 성소(聖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제퍼는 무작정 나를 따라 이곳에 지원했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그만 다리가 후들거렸을 것이다.
이곳이 치열한 전장도 아니건만 마치 조금 전 백병전이 벌어진 듯 비릿한 피 냄새부터 풍겨 오는 것 같았다.
막사들이 이어진 중간에 누워 있는 병사들, 그중 절반은 피가 배어 나온 붕대를 각 신체 부위에 감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금방 실려 온 자가 급히 치료를 받느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대기조로 보이는 병사들이 황급히 대열을 이루어 어디론가 향했다.
그 와중에도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는 자들도 보였다. 검을 닦는 자들, 낮잠을 자는 자들, 왁자지껄 떠들며 대화를 나누는 자들, 서로 멱살을 잡고 티격태격 다툼을 벌이는 자들, 한편에서는 검과 방패를 들고 검술 연습하는 자들.
최전방에서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극도로 위험한 이 임무에 그들이 동참하기로 한 것은 스스로의 용맹성을 과시하기보다는 타 부대에 비해서 진급이 빠른 이유가 컸다.
치열한 전시 기간에 돌격 부대의 생존율은 1년을 기준으로 10퍼센트 이하라 했다. 그 안에 살아남는다면 자신이 원하는 부대의 중대 수장이라는 직급으로 발령받을 수가 있다.
그곳에서도 공훈을 세운다면 이들은 최종적으로 원하는 장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꿈꿀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현재 백 명의 용맹한 병사들을 책임지는 백인대장들의 대부분은 바로 이곳 돌격 부대 출신들이다. 간혹 최고로 진급한 자 중에는 대대장에 오른 사람도 있다고 했다. 신분 제도가 엄격한 센 제국에서 유일하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돌격 부대에 입대밖에 없다는 말이 돈다.
평화로움이란 세상 어디든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이곳 역시 전시 중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고, 나와 제퍼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의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돌격 부대의 특징은 각 조의 수장들을 제외하고는 병사들 간에 상하 계급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실전 외에는 그 모든 것이 자율적이랄까. 보급도, 식품도 넉넉한 편이고 심지어 실전 투입 하루 전날에는 술까지 제공된다고 그랬다. 그래서 이곳은 군율이 적용되는 군대가 아닌 마치 용병들의 집합소와도 같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술이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그것을 일컬어 ‘죽음 잔’이라 비유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의식을 치른다는 표현도 썼다. 하지만 대부분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어차피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던가.
이곳에는 한 가지 룰이 있었다. 친한 동료를 만들지 말 것!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지 모르는 망자들에 대한 그리움은 곧 사기 저하를 시킬 수 있다 하여 아예 규칙을 그렇게 정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죽음을 앞둔 전투에서의 사람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에게 기대려 한다. 특히 술에 거나하게 취한 뒤에는 더욱 그렇다. 제퍼는 혀가 꼬부라진 채 내게 말했다.
“형도. 내, 내가 죽으면… 이걸 부모님에게 전해 줘.”
그는 말하다 말고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
나는 잠시 밤하늘의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초시공 전사 테스트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시린 창공, 가을 햇살이 가득하게 대지를 비추어 주는, 이렇게도 좋은 날…….
저편 지평선과 맞닿아 있는 들판 위에는 날카로운 검과 창을 앞세운 적들이 진정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 형상은 마치 개미 떼가 거대한 검은 군집을 이룬 듯 보였다.
맞은편 이곳, 아군의 진영은 상대에 비해 그 숫자가 적어 보이지만 질서정연한 대대 병력이 정사각형의 도각을 나타냈다. 좌우로 기병대들이 포진해 있는 최고의 정예 군단, 바로 센 제국의 수호자들인 제7 보병 군단이 아닌가.
그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백마를 타고 병사들 앞에 등장했다.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명장이라 불리는 클레이 군단장이었다. 전투에 앞서 연설을 하기 위해 천천히 말고삐를 잡아맸다.
와와.
군단장의 연설에 이어 사기가 잔뜩 오른 병사들의 함성 소리에도 불구하고 제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검과 방패를 움켜잡았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꽉 잡아 주었다. 몹시도 두려워하는 그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퍼! 내 뒤에 바짝 붙어야 해.”
“아, 알았어.”
“절대 나를 놓치면 안 돼.”
부우! 부우!
진격을 알리는 뿔 고동 소리가 맞은편 켈트 야만족에서 먼저 울려 퍼졌다.
적들은 일정한 대열 없이 들판을 가로질러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한가운데 유독 뭉쳐 오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켈트족의 정예 병력으로서 아군의 중앙 대열을 깨기 위한 돌격조였다. 대부분 무지막지한 병기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