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총독께서 직접 나섰어.”
“혹시 도전이라도 하실 건가?”
“그런 것 같은데.”
“후후, 도시에서 내놓으라 하는 검사들 모두가 실패했는데 총독이라고 별수 있겠어.”
“그냥 한번 해 보자는 것 같은데.”
“어쨌든 재미있겠군. 한번 지켜보세나.”
초여름의 미풍 한 자락이 이마 위로 고이 올린 은빛 머리카락 한 올을 살랑거렸다. 그런 카헤티의 풍모에 군중들은 저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그가 이 도시에 총독으로 처음 부임해 올 때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열성적인 반응이었다.
당시 부임해 온 카헤티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현재 헤트벅트 제국의 실세인 집정관의 셋째 아들로서 파격적인 임관에 시선이 고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이 줄어들기 시작했으니, 바로 약관의 나이에 탁월한 행정력 덕분이었다.
전임 총독의 너무도 폐쇄적인 정책을 일시에 바꾸어 도시의 모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각지로부터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종의 해안 도시가 지니는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중계 무역이랄까.
사실 그의 본래 의도는 평소 검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니 대륙 각지로부터 유능한 검사들이 드나들게 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지닌 비기나 혹여 비급이라도 수집할까,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여러 귀한 검술 비급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이 저술한 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왔던 가르시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곧이어 헤카티는 검을 뽑아 미스릴 금속 기둥을 가격했다.
틱!
틱!
두어 번 휘둘러 쳤는데 귀에 거북할 정도로 둔탁한 음들이 들려왔다. 물론 그런 허접한 발검에 미스릴 기둥에는 그 어떤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헤카티는 무슨 이유인지 입가의 미소를 지었고, 이내 군중들을 향해 물었다.
“이게 가능하다 봅니까? 한마디로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저 인간이 철검으로 미스릴 금속을 베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때 헤카티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손을 하늘로 뻗어 군중들에게 잘 보이도록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사람에게는 각자 엇비슷한 수준으로 손아귀의 힘이 이렇듯 거기서 거기로 한계점이 있지요. 물론 각 개인의 신체적 능력에 따라 그 차이가 있어서 유난히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겠지만 결국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겠죠.”
그가 이번엔 검을 잡았다.
“그런 손아귀로 이 검을 잡은들 검술의 역량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수련해 왔던 검사들이야 더욱 능숙하고 쉽게 무기를 다룰 수야 있지만 그들도 다 거기서 거기일 것입니다.”
“…….”
”그래도 나는 혹여나 그 어떤 미지의 힘이 있을까, 하고 그동안 수많은 검사를 초청했고 그들의 비급들을 큰돈을 들여 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의 힘을 초월하거나 마법 같은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나는 우연히 한 책을 접하게 되었고, 곧바로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가 가슴 안쪽으로부터 책 한 권을 꺼내 보여 군중들에게 들어 보였는데, 책 표지에는 시공의 궤적이라 쓰여 있었다.
“이 책에는 총 스물여덟 개의 발검 기술이 적혀 있소. 그리고 제1장만 익히면 미스릴 금속을 벨 수 있다는 확언도 나와 있지요. 그 때문에 나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 책을 복사해 적어도 이 도시 안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검사가 있는지 오늘의 실험을 강행한 것이오. 그런데 결국 없으니 이번에도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지요.”
그때 큰 소리로 외치는 한 중년인.
“병신 중에서도 상병신이로군!”
바로 가르시아였다. 군중들의 이목은 일시에 그에게 집중이 되었다. 가르시아는 총독의 말에 화를 참지 못하고 성질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이 도시의 총독에게 그런 욕을 할 수 있던가. 미치지 않고서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계속해서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계시받은 검술은 존재하지만 이따위 하급한 존재들이 사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그 자체의 진가를 모르니 말이야. 하기야 그런 자가 쉽게 나타날 리도 없고, 그저 자기가 실력이 없어서 모르면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멸시하니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을지로다!”
순간 헤카티가 검을 앞세워 가르시아 앞으로 다가와서 목에 겨누었다.
“사기꾼의 언변은 늘 화려하지.”
그는 이어 군중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오늘의 이 자리는 바로 이런 검술 비급 사기꾼을 단죄에 처하기 위한 것이오. 그것도 신의 계시를 받은 양 얼토당토않지 않은 얘기로 순진한 검사들을 현혹하는 아주 죄질이 나쁜 자, 혹은 정신 이상자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총독으로 있는 한 내 도시 안에서는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는 그 본보기를 보여 줄 참이오.”
그러고는 검을 치켜들어 가르시아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에 아스칼은 아버지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살려 주세요. 제 아버님은 정상이 아니라고요. 그러니 제발 선처라도.”
그러자 가르시아는 딸을 밀쳐 버렸고, 총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꼭 자기 잣대로 기준을 정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법.”
순간 헤카티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뭐라!”
서슬이 시퍼런 검이 그의 목을 베려는 순간 누군가 외쳤다.
“멈추시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 골이 깊은 한 노인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일단 총독에게 예의를 표하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진정하시고 내 말씀을 들어 보시겠소?”
헤카티는 검을 거두었고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
“저는 한평생을 떠돌아다니는 늙은 방랑 검사요. 내가 이렇게 나선 것은 총독께서 검술을 보는 안목이 없기에 안타까워서입니다.”
“안타깝다니요?”
그러자 노인은 카헤티가 들고 있던 책을 보며 말했다.
“바로 그 시공에 궤적에 대한 것에 말이오. 제가 보기에는 기존의 틀과 전혀 다른 획기적인 발검 동작들이 쓰여 있는데 단순히 그 자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보오. 바로 그 너머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다를 수 있다는 거죠.”
카헤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너머를 이해한다고요?”
“적어도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의도로 이것을 저술한 것 같소.”
“무슨 의도를 말하는 거요.”
“내가 그에게 직접 물어봐도 되겠소?”
그 즉시 노인은 가르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책의 제목을 시공의 궤적이라 지었소?”
그러자 가르시아는 갑자기 히쭉 웃었다.
“후후, 그게 궁금하오?”
“그렇소.”
“어차피 얘기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데 괜히 입만 아프게 말하기는 싫소. 대신 노인 양반에게 기회는 주겠소. 내가 왜 제목을 지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러자 노인은 잠시 입을 꾹 다물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시공은 시공간을 뜻하는 것일 테고 궤적은 그 어떤 대상의 흔적을 말하는 것이라. 그렇다면 시공이란 미지로부터 그 누군가의 신호를 포착해서 글로 표현했다는 것일 텐데…….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사람에게는 눈이 달려 있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 대상체가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마도 가르시아 그대는 세상 사람들을 일부러 혼란케 하려고 그런 제목을 지은 것 같소.”
가르시아는 피식 웃었다.
“얼추 비슷한데.”
노인도 같이 따라 웃었다.
“허허, 내가 비록 백 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아직도 숨이 붙어 있다지만 아직은 망령이 들지 않았소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소. 그대의 책은 마치 그 어떤 그림을 보고 그것을 글로 나타낸 것 같은데 맞소.”
가르시아는 코를 후비며 다소 거만한 말투를 내뱉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저 상상만으로 그런 동작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이오.”
“쳇,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노인이 가르시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주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그대는 수수께끼를 원하는 것 같은데…….”
“수수께끼라니요?”
“그 누구든 절대 풀 수 없는 명제를 가지고 세상에 내놓았고, 절대 풀 수 없음을 자신하는 것 같소.”
“생각은 자유지만 노인 양반이 뭐를 말하는지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구려.”
그러자 노인이 자신의 품 안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꺼내 들더니만 말했다.
“그래서 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요?”
“초대라니?”
노인은 또다시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내가 모를 줄 알았소. 이 책을 내게 보낸 것은 그대가 분명할 테고 나는 그 때문에 이 머나먼 길을 달려온 게 아니요.”
노인은 말하다 말고 도시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이오? 검술의 메카로 알려진 도시들은 대륙에서 수십, 수백 군데나 되는데 왜 이런 변방의 아주 작은 도시를 선택했는지 모르겠소.”
가르시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도대체 뭔 얘기를 하는지, 나 원 참.”
“이런 곳에서 그대의 검술을 알리기에는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그대의 의도가 정말 궁금하오. 일단 서론은 여기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대의 책 내용에 쓰인 구절만을 읽고도 제1장의 발검 기술을 추측은 할 수 있었소.”
그때 카헤티가 이들의 대화에 껴들었다.
“노인 양반, 이자는 미친 자요. 세상에 그런 허무맹랑한 내용이 어디 있다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오. 어쨌든 나는 총독으로서 이런 사기꾼을 처단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저리 비켜서시오.”
그러자 노인이 갑자기 검을 들어 미스릴 금속을 베는 게 아닌가.
홱!
팍!
순간 손가락 한 마디의, 다소 깊게 베인 것이 아닌가. 이에 군중들은 저마다 감탄을 자아냈고, 카헤티 역시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미스릴 금속 베기에 저 왜소하고 노인이 그걸 해냈기에 말이다.
노인은 그런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소!”
“…….”
광장에는 일순간에 침묵이 흘렀고, 이어 노인의 쩌렁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저 흉내만 낸 것뿐이오. 그것도 시공의 궤적 제1장 12기술 중 1할에 가까운 아주 미미한 기술만 가지고서.”
카헤티는 다소 흥분한 듯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대는 누구요! 성함이라도 말씀해 주시겠소.”
“나는 아가리코라 합니다.”
아가리코라는 말에 군중의 반응이 술렁였다.
“아가리코라면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그 옛날 레알 제국에서 활약했다가 홀연히 사라진 그분 아닌가?”
“이제 생각났군. 고대 검술의 대가 말일세!”
“고대 검술의 대가라고!”
“수십 년 전의 검사이니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걸세. 하지만 당시에 아가리코를 모른다면 그건 정상이 아닐 정도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지. 주로 고대 문헌의 검술을 연구해서 그걸 바탕으로 자신의 검기를 이루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