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그로부터 두 달 후.
도시 생활은 시골과는 너무 달랐다. 아스칼은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온 지 근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매일 나가는 생활비부터 너무 많이 나간다고 할까. 뒷골목의 가장 허름한 여관 옥탑방조차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비록 여행 중 거쳐 가는 장소이지만 아버지는 이곳에 자신의 책을 알리고자 잠시 머물러야만 했고 그 뒷감당은 순전히 아스칼이 해야만 했다.
그나마 이들 부녀가 산골 베른 지방을 떠날 때 집과 농토를 팔아서 가져온 돈이 아직은 여유가 있기에 당장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계속 고집을 부리며 여기에 남아 있다가는 머지않아 빈털터리가 되고 말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기저기 검술학당을 찾아다니면 책 홍보 및 영업에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당해 쫓겨나기 일쑤였으니 레아는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 그냥 가죠.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어요.”
“아니다. 뭔가 감이 있어. 이렇게 큰 도시라면 내 검술을 알아 줄 검사가 있을 게 분명해.”
“벌써 열 군데나 넘는 학당을 찾아다녔잖아요. 물론 다들 거들떠보지도 않고요.”
“그들이 보는 눈이 없어 서지. 쯧쯧. 한심한 놈들, 하기야 내 검술을 보고 한눈에 그 진가를 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레아는 답답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 벌써 여행 경비 절반을 썼어요. 이러다간 외갓집에 가기도 전에 빈털터리가 될 것 같아요.”
“지금 그게 문제냐? 머지않아 이 애비의 꿈이 실현되면 그때는 돈방석에 앉게 될 거야.”
아스칼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후. 솔직히 말씀드리죠. 아빠가 저술한 발검의 묘미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객관적으로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그건 일찍 포기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순간 가르시아가 역정을 냈다.
“뭐라고! 너마저 이 애비를 못 믿는 게냐.”
“못 믿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제발 현실을 직시하시라는 거예요.”
아스칼은 말하다 말고 가슴 안쪽에 고이 넣어두었던 돈주머니를 꺼냈다.
“직접 확인해 보시라고요. 이제 돈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주머니를 건네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홱!
누군가 확 달려오더니만 돈주머니를 낚아채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러자 가르시아가 순간 소리쳤다.
“우리 돈!”
가르시아는 그가 날치기임을 알았고 급히 쫓으려 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움직였던가! 그만 발이 접질리다 그대로 엎어졌다.
“아이쿠! 발이야!”
아스칼은 아버지에게 급히 달려가서 살펴보았다.
“아빠! 괜찮아요?”
“아아아.”
가르시아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당혹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도와주세요. 아빠가! 다쳤어요!”
한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잠시 멈칫거리다 저마다 다시 갈 길로 갔다.
아스칼은 아버지를 다시 살피다가 너무 아파하자 그 자신도 눈물을 흘리고 엉엉 울었다. 애석한 일이지만 도시 인심이 원래 이랬던가.
순박한 두 시골 부녀는 마지막 남은 돈을 날치기당했고 사람들의 무관심함에 가슴까지 아팠다.
그날 저녁. 여관 뒷골목 담벼락 아래 가르시아와 레아는 둘 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빠. 발목은 괜찮아요?”
“…….”
가르시아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후……. 이젠 고향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게 다 나 때문에…….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아스칼은 아빠의 손을 꼭 쥐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다 제 부주의 때문에 날치기당했는걸요. 제가 정말 죄송해요.”
가르시아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시나 착한 녀석. 후후. 우리 딸 없으면 이 애비는 어떻게 살지.”
“그만 하세요. 제가 어린 애예요?”
가르시아는 아픈 발목을 만지작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걱정하지 마라. 설마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줄 알았더냐.”
“욱!”
그러나 순간 느껴지는 발목의 고통 때문에 그는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떨어지는 빗방울.
“빌어먹을! 여관에 쫓겨나고 오늘 밤은 여기서 버티려 했는데 비까지 쏟아지다니!”
이번엔 아스칼은 자기 망토를 아버지에게 덮어 주었다.
“제가 여관 주인에게 다시 사정이라도 해 볼게요.”
“안 돼! 벌써 몇 번이나 구걸하다시피 했는데 그 못된 주인 놈에게 모욕이나 당하고. 더 이상 우리 딸 고생시킬 수 없어.”
하필 그때 번개가 치더니만 이내 하늘로부터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릉 쾅.
그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폭우.
쏴!
결국 두 부녀는 비를 홀딱 맞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리 아파 그 어디도 갈 수 없는 신세, 레아는 그런 아빠 곁에 꼭 붙어서 망토를 몇 번이나 더 덮어 주었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오히려 역정을 내며 딸에게 망토를 뒤집어씌웠다.
“난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서 써! 혼나기 전에.”
“아빠는 환자라고요! 그러니까.”
바로 그때였다.
착! 착! 착! 착!
빗속을 뚫고 이리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은빛 군장 사내들. 그들 중 한 명이 이들에게 말을 건네 왔다.
“그대가 가르시아요?”
강한 폭우 속인지라 가르시아는 상대방이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요?”
“그대가 가르시아 맞냐 물었소!”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만.”
“그렇다면 저희와 함께 갑시다.”
가르시아는 무장한 은빛 군장 사내들이 다짜고짜 가자고 하니 내심 겁이 났고 아스칼을 꼭 안아 주며 말했다.
“누, 누구시기에!”
“총독께서 그대를 모셔 오라 하셨소.”
“초, 총독이라니요?”
“만나길 원하십니다.”
“왜, 왜요?”
“가 보면 압니다. 자! 일어나시죠.”
결국 기사들이 가르시아를 부축했고 아스칼 역시 겁에 잔뜩 질린 채 그 뒤를 따라갔다.
마주한 총독은 총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청년이었다.
한 올조차 없이 뒤로 넘긴 은빛 머리칼. 오뚝한 콧날에 여자보다도 더 고운 피부, 살짝 다문 입술에 미소가 담기니 절로 매력이 발산되는 꽤 준수한 미남이었다.
“제 수하들이 무례를 끼쳐드렸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는 저녁 만찬이 차려진 크고 넓은 테이블 맞은편 두 부녀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가르시아와 아스칼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고 총독이 왜 갑자기 자신들을 초대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총독은 그런 그 둘을 안심시키기 위해 본론부터 말했다.
“그대가 발검의 묘미라는 책을 저술하셨죠?”
이에 가르시아 눈빛이 번쩍였다.
“그,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제가 모셔 온 것입니다.”
“…….”
“저는 이곳 레알 도시 총독인 카헤티라고 합니다. 평소 검술에 흥미가 많아 검술에 관한 책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보거나 수십 해 오는 게 취미입니다. 그러던 중 그대가 저술한 발검의 묘미를 보고 단번에 흥미를 느꼈고 결국 수소문해서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시아는 상대의 호의에 그다지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뭘 느끼셨소?”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오히려 아스칼은 총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
하지만 다소 무례한 질문에도 카헤티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책 제1장 정면 발검을 보니 처음부터 파격적으로 그 순서가 뒤죽박죽되어 있더군요. 왜 이런가 하고 살펴보게 되었는데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그런데 나중에야 그대의 검술에 도약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게 혹시 체공의 더욱 많은 지속을 위한 사전 동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더군요. 왼손과 오른손의 방향이 바뀌어 아예, 점프하려고 보폭의 넓이도 기마자세와 같이 넓고 그 무릎 반동을 이용해 허공에 튀어 오르려는 몸짓.”
그 말에 가르시아는 다소 감탄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 거기까지 꿰뚫어 봤다면 검술에 전혀 문외한은 아니구려.”
“하지만 그다음이 어려웠소. 고공에서 펼칠 수 있는 검법이라니. 보통은 자연체 동작으로 발로 지면을 딛어야만 그 힘을 제공하는 원동력이 될 터인데 어찌 허공에서 몇 가지 동작으로 그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그대를 직접 모셔 오게 된 것이요.”
가르시아는 피식 웃었다.
“후후. 그걸 이해하려면 검술에 조예가 더 있어야 할 것이오. 이미 지면에서 힘을 받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면 오히려 그 힘의 가속이 붙어 파괴력은 수배가 될 터인데.”
카헤티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속에 의한 힘의 증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그게 정말 가능하단 말이오.”
“가능하죠.”
하지만 카헤티는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세상에 지면의 힘을 공중에서조차 이어 가는 능력의 검사가 어디 있겠소.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검술 같은데 혹시 이론만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 아닌가요?”
순간 가르시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론만 가능하다면 아예 나는 그 책을 내지도 않았을 거요.”
“그렇다면 도대체 그 검술은 어디서 착안을 얻은 것이오?”
카헤티의 질문에 가르시아는 당당하게 말했다.
“계시를 받았소.”
“계시라니요?”
“신이 내려 주셨소.”
“…신이요…….”
“신의 검술이오.”
“…….”
카헤티의 안색이 다소 굳어지고 말았고 일순간에 분위기마저 썰렁해지고 말았다. 이때 아스칼은 이들의 대화에 껴들었다.
“제 아버님께서 평소 농담을 즐겨 하시는데 그만 실수한 것 같군요. 조금 지나쳤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제야 카헤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아를 바라보곤 말했다.
“농담이라……. 뭐 좋소. 적어도 신의 검술이든 아니든 일단 그대의 부친께서 꽤 흥미로운 것을 만들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내겐 무료함을 달래 수 있는 아주 즐거운 시간이요.”
그리고 그는 시종에게 손짓했다.
“술 좀 내오게나.”
잠시 후. 총독이 권해 준 술을 먹고 잔뜩 취한 가르시아, 그런 아버지를 매우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아스칼. 혹시라도 무슨 실수라도 할까 봐 가슴이 아주 조마조마했다. 그때 카헤티가 가르시아에게 물었다.
“그대의 검술은 도대체 어떤 유형의 검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오?”
“유형 같은 거 없소. 그저 지면을 밟을 줄 아는 자.”
카헤티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면을 밟는 줄 아는 자라니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그것도 모르오?”
“…….”
순간 침묵이 흘렀고 아스칼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가 또다시 말실수한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카헤티는 술잔이 오가는 대화에서 여러 번 미간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나름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참는 듯 보였다.
“내가 좀 우둔해서 그런지 그 뜻을 모릅니다.”
가르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하기야 지면을 이해하는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카헤티는 다소 냉소적인 표정으로 변하더니만 가르시아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지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혹시 대지를 딛고 있는 검사의 그 어떤 발검 자세와 관련 있는 건가요.”
“그렇소. 그다음에 비로소 후자가 검이요.”
“흠. 대충 감은 잡겠는데 이왕이면 조금 쉽게 설명해 주기를 바라오.”
가르시아는 갑자기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저으며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