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청년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눈빛만큼은 뭔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마치 조금만 더 주저했다가는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것 같은 그 무언의 얼굴. 사내는 그 기세에 억눌려 자기도 모르게 검을 구사했다.
삭삭.
찌르고 베기.
아주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야말로 모든 힘을 기울여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틀렸소.”
삭!
“악!”
이번엔 사내의 허벅지가 베이는 순간이었다. 청년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동작을 취했다.
삭삭.
[찌르고 베기]
“다시 해 보시오.”
사내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베인 상처들이 그리 깊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신체 여기저기에 붉은 선혈로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도망치지도 못하는 신세. 청년의 말대로 다시 검을 시전해야만 했다.
이번엔 그 자신이 모든 심혈을 기울여 저 인간의 마음에 들게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찌르고 베기를 시전했다.
삭삭!
삭.
“억!”
“틀렸소.”
종아리가 베여 버려 그곳에서부터도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본이 안 되어 있소. 자! 기회는 많이 드릴 테니 다시 해 보시오.”
사내는 마치 저승사자를 본 것처럼 말까지 제대로 잇지 못했다.
“도, 도대체 네, 네놈의 정체는 뭐냐?”
청년이 대답했다.
“현재 내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그건 그렇고, 어서 다시 해 보오. 나름 검술에 대한 통념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 같지만 아직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기초 동작에 문제가 있는 것 같소.”
“…….”
“힘과 민첩성, 파괴력, 아마도 그대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 어떤 무형의 에너지 등 다른 것들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아쉽게도 기본기가 부족한 것 같소. 자, 내가 이렇게 지적을 해 드렸으니 다음 동작은 부디 잘하기를 바라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진정한 것은 바로 기본에 있다는 사실.”
“기본?”
“그렇소. 그 근원을 잘 생각해 보시오.”
“…….”
사내는 마치 악마를 대하듯 이제는 사시나무 떨듯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놈은 고수 정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잔혹한 존재랄까.
이미 그 안광으로부터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과 좌절, 아니 체념의 조급한 마음부터 들었다. 이대로 저자의 의도대로 말려든다면 계속 베이며 고문당하면서 고통스럽게 죽을지 몰랐다.
그래서인가. 사내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필격의 비법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 그는 검을 들어 갑자기 그 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홱! 홱! 홱!
엄청나 기세였다. 세상에 저런 파격적인 검술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자리에서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휠윈드 폭풍 검술이다. 그 어떤 자들도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내 필살의 기술!”
파파파파팟.
가히 땅이 헤어지고 주변 관목이 삭둑 갈라질 정도로 그 위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저 대검을 뽑아 들고 자연체 발검 자세로 상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 곧이어 격돌이 일어났다.
홱! 홱! 홱! 홱!
삭삭.
“악!”
사내의 목이 댕강 잘리며 상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 몸뚱이는 그대 지면 앞에 쓰러졌고.
청년은 검을 거두어 그 옆에 있던 소녀에게 다가갔다. 온몸의 상처로 피로 범벅이 되었다. 청년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일단 그녀의 상처부터 지혈해 주었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으니 괜찮을 겁니다.”
아스칼은 처음에는 겁을 냈지만 곧이어 이 사람이 자신과 아버지를 구해 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
청년은 그사이에 팔을 천으로 감싸 주었고, 이번엔 그녀의 허벅지를 살펴봤다. 그곳의 상처는 좀 더 깊었던가. 피가 제법 많이 뱄으니 그는 주저하지 않고 치마를 살짝 걷었다.
“실례지만 여기도 지혈해야겠소.”
바로 그때 뒤 목에 닿는 차가운 느낌. 누군가 검으로 그곳을 겨냥한 것 같았다.
“당장 내 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바로 아스칼의 아버지 가르시아였다. 아까 기절한 채 있다가 지금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청년이 자기 딸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으로 오해했으니.
“죽여 버리겠어!”
순간 아스칼이 소리쳤다.
“아빠!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지금 이놈이 너를!”
“저를 치료해 주고 있단 말이에요. 당장 검을 거두세요.”
가르시아는 멈칫거렸고, 상황을 살폈다. 보아하니 딸의 팔이 천으로 감겨 있으니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던가. 아스칼은 청년에게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
청년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상처만을 넌지시 살펴봤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으니 지혈은 될 것입니다.”
그때 아스칼은 자기 배낭으로부터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거라도 받으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저술한 발검의 묘미라는 책밖에 없으니까요.”
그러자 가르시아가 화를 버럭 냈다.
“이놈이 정말. 내가 개나 소나 주라고 계시받고 그 책을 쓴 것이 아니야!”
아스칼은 아버지의 성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그에게 다가가 그 책을 손에 쥐여 주었다.
청년은 마지못해 건네받고는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검이라도 휘둘러 칠 자세로 엄청나게 흥분해 있기 때문이다.
화르르.
탁탁.
컴컴해진 숲속 공터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그 위에는 꼬치구이들이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아까 낮에 가르시아가 사냥한 날짐승 가죽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완전히 익혀 먹어야 탈이 나지 않는다.”
아스칼은 아빠를 뾰로통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뭐가?”
“아까 그분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쫓아낼 수가 있는 거죠?”
가르시아는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또 그놈 얘기!”
“그분이 우릴 구해 줬다고요?”
“구해 주기는 뭘 구해 줘! 이 아비가 다 처치해 놓은 걸 그놈은 나중에 와서 공을 가로챈 거지.”
아스칼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빠는 기절해 있었다고요!”
“그런 기억 없는데. 아무튼 그 고기가 익었으니 먹어도 될 것 같다.”
“아빠!”
“나 귀 안 먹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은혜는 갚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고맙다고 인사는 했어야지요!”
순간 가르시아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 그놈이 네 치마를 올리고 허벅지를 만지려 했는데!”
“그건 치료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순진한 녀석! 그걸 어떻게 알아. 생각을 해 봐라. 요 며칠 사이 그놈과 세 번이나 마주쳤다는 것이 우연이라 여기느냐? 분명 그놈은 우릴 일부러 쫓아다니고 있는 게 틀림없어. 게다가 그런 놈에게 내 귀한 책을 주다니.”
“그분이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우릴 쫓아다닌다고 그래요.”
그러자 가르시아는 갑자기 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만 진지하게 말했다.
“넌 너무 예뻐. 베른 지방에서도 너 때문에 상사병 걸려 죽는다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냐. 아마도 그놈 역시 너를 보자마자 흑심 품고.”
아스칼은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해요! 정말 말이 통해야지 무슨 말씀을 드리든지 하지, 이건 참.”
그때 가르시아가 꼬치 한 개를 집어 아스칼에게 건넸다.
“먹어라.”
“싫어요.”
“배고프다고 했잖아.”
“입맛이 없어요.”
“갑자기 왜 그러냐?”
“갑자기가 아니라 답답해서요.”
가르시아는 그 자신이 꼬치를 입에 물고는 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아스칼, 세상은 험하단다. 너는 어려서 모르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나쁜 놈들이지.”
“아빠는 남자 아니에요?”
“나는 다르지. 오로지 네 엄마만 일편단심으로 살아왔지.”
“아무튼 아까 그분이 마음에 걸려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는데.”
“흠, 나는 오히려 걱정된다. 그놈이 또다시 우리 앞에 기웃거리면 어떡하나, 하고. 물론 그때는 요절을 내야겠지. 고얀 놈 같으니라.”
결국 아스칼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가르시아는 조금 전 먹으려 했던 꼬치구이를 내려놓으며 침을 삼켰다.
‘안 먹어… 내일 아침 우리 딸 주려면 모자라.’
허기가 몹시도 진 상태에서 그는 오로지 딸 생각밖에 없었다. 육질에 다소 탄 부분을 손으로 세심하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긴 한숨 내쉬는 가르시아.
‘아무래도… 아스칼을 그냥 고향에 두고 왔어야 했나.’
다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그였지만 앞으로 여행에서 딸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그는 이내 가슴 안쪽으로부터 책 한 권을 꺼내어 보았다.
[시공의 궤적]
계시받고 그대로 적은 스물여덟 개의 기술들이 적혀 있는 책, 그는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마을 떠났다. 본래 소박했던 그로서는 큰 야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로운 일을 한다고 여겼을까.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자 했던 순수한 욕망.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든지 말든지 그의 주관은 뚜렷했다. 아니,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발검의 묘미는 검사를 지망하는 지원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적어도 베른의 지방에서는 그런대로 먹혔다.
물론 정신이 이상하거나 허풍이라고 자신을 손가락질했던 사람들도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바로 죽은 아내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 모두 자기를 비웃어도 아내만큼은 항상 밝고 환한 미소를 지어 주며 자신의 검술을 칭송했다. 그런 아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것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만 갔다.
그때 가르시아는 잠이 든 아스칼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스칼, 너도 나를 이상하게 본다는 거 다 안다. 하지만 아버지는 미치지 않았단다. 절대로…….”
그는 모포를 집어 딸의 얼굴 위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중얼거렸다.
“아냐, 난 미쳤는지도 몰라. 아까 낮에 당한 모욕을 생각하면……. 분명 내 검술은 붉은 군장을 입은 그놈에게 무시당했다고, 제길.”
순간 그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잠시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가르시아.
“아냐! 아닐 거야. 그 책이 임자를 아직 못 만나서 빛을 보지 못하는 거야. 나는 직접 검술을 시전하지 못하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맞아, 언젠가는 발검의 묘미 스물여덟 개 동작을 이해하고 깨달을 위대한 검사가 나타날 거야. 나는 그 누군가를 위해 계속 여행해야만 하고…….”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푸른 먼동이 떠오르는 새벽녘, 아스칼은 모포 속으로부터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거의 벗겨져 버린 모포를 다시 덮어 주며 눈물을 흘렸다.
“아빠, 불쌍한 우리 아빠.”
그는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빠 걱정 때문일까. 사실 아까 아빠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 듣고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랐다. 예전보다 증세가 더욱 심해지신 것일까. 그냥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면 얼마나 좋으련만.
하지만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여전히 꿈속에서 본 검술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허황한 꿈에 부풀려 계신다. 그리고 아스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옆에서 함께 있는 것.
아스칼은 스스로 다짐했다. 아버지와 함께 외갓집에 가기를 말이다. 그곳에는 엄마의 명망 높은 가문이 있고, 아버지의 정신 착란증을 치료할 수 있는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막상 마을 떠나 세상에 나와 보니 이토록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아까 그 청년이 구해 주지 않았다면 벌써 아버지와 그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두려웠다.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아스칼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아빠한테 아무 일이 없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