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그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나름 흥미는 있는데 내가 한번 해 볼까.”
파파파팟.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마냥 유연한 몸놀림에 검은 마치 몸과 하나가 된 듯 공중에서 뜬 채로 허공 이곳저곳을 갈랐다. 사내는 가르시아의 검술을 곧바로 따라 한 것이다.
“…….”
역시나 실망한 표정이었다.
“역시 효과가 없어. 그저 고공에서 검술을 한다는 그 자체만 흥미롭지 이건 뭐.”
그러자 가르시아가 화를 냈다.
“발검의 묘미는 제1장 정면 발검부터 너 같은 하류 잡배가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기본자세부터 완벽하게 수련한 자들만이 겨우 가능한 것이지. 고공의 체류 시간부터가 영 말이 안 되지.”
애석한 일이지만 가르시아는 괜한 호기로 사내의 성질을 자극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순간 그는 아스칼의 멱살을 잡아끌었고 검으로 팔뚝을 베어 버렸다.
삭!
“악!”
피가 몽글몽글 이내 선혈을 붉어졌다. 가르시아는 기겁을 하고 사내에게 달려가려 했다.
“아스칼!”
사내는 아스칼을 인질로 잡고 검으로 아스칼의 목에 갔다 대었다.
“오면 네 딸, 죽인다. 검술도 정도껏 했다면 내가 이러지도 않지. 너무 허접하단 말이야.”
순간 가르시아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사내는 히쭉히쭉 웃으며 다시 말했다.
“별로 깊지 않은 상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런데 말이야. 네 검술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에 대한 벌을 네 딸이 대신 받는다고 생각해. 자, 다시 네놈이 정면 발검을 다시 해 봐라. 만일 그게 완벽한 검술이라면 네놈이 스스로 완벽하게 구사해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어쨌든 그 결과에 따라 네 딸이 몸 어딘가에 칼자국이 남겨질 테니.”
가르시아는 딸의 팔뚝에 피를 보고 그 충격이 너무 심하여 정신마저 멍했다. 그때 사내가 검으로 아스칼의 목을 베려고 했다.
“자! 당장 다음 시범을 보여 주지 않으면 네 딸의 목을 안게 될 거다. 자 당장! 내가 원래 성격이 느긋하지 못하거든.”
가르시아는 눈앞에 딸을 살리기 위해 일단 놈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힘을 기울여 발검의 묘미 제1장 정면 발검을 다시 펼쳤다.
파파파팟.
곧이어 들려오는 냉담한 대답.
“시시해! 너무. 폼만 크고 기본이 전혀 없잖아. 점프를 시도하고 체공 시간에 고공 검술을 펼치는 것도 황당하지만 애초 검을 쥐는 법과 자연체 보폭의 순서가 뒤바뀌어 기존의 정교함이 떨어지고 파괴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흐흐.”
삭!
“악!”
아스칼의 다른 팔이 베이고 말았다. 가르시아는 절규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스칼!”
동시에 터지는 실소.
“흐흐, 성의는 다한 것 같은데 이거 어쩌지. 고공 검술이라면 체공 시간 때문이라도 차라리 자연체 동작과 적당한 보폭으로 일곱 개를 네 개로 줄이고 조금 더 쾌검을 사용한다면 그런대로 효율이 있을 텐데 아쉽군.”
“…….”
“내가 원하는 발검은 거센 폭풍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의 기개와 그에 따른 신체와 융합, 아니 합일이라 할까. 일종의 자신의 분신처럼 무기를 써야지 겨우 자기방어 정도 할까. 그런데 너는 그조차 안 되어 있어. 그저 남에게 보여 주기 식의 황당무계한 동작들, 얼핏 폼은 절묘한 것 같지만 허구적인 면이 엿보이니 그건 아냐.”
사내는 나름 검술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 보였다.
“어쨌든 다시 보여 주기 바란다. 그 역시 시시하면 네 딸이 벌을 대신 받을 거다. 자! 당장 해. 아니면 딸의 모가지가 날아간다니까.”
사내의 검이 아스칼의 하얀 피부를 살짝 찔렀고, 피가 한두 방울 나오기 시작했다. 가르시아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안 돼!”
“그럼 해.”
“아, 알았어. 제발.”
“아무래도 인간 중에서도 나부랭이가 걸린 것 같은데. 내가 이걸 꼭 지켜봐야 하나.”
“제발, 기다려. 보, 보여 준다. 이번엔 확실해.”
“기대하지.”
곧이어 가르시아는 다음 장의 기술을 시전했다.
파팟! 파팟! 파팟!
그야말로 딸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검술을 선보였다.
“역시 틀을 깬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 없이 검만 난무하는군. 도대체 그따위 검법에 누가 당하려고 그러나. 아무튼 기본이 전혀 없어. 그저 뜬구름 잡는 식의 실속이 전혀 없는 검술이야. 아니, 검술이라고 입에 올리기도 내가 다 부끄럽군. 게다가 그게 신의 검술이라고! 그 때문에 화가 점점 난다는 사실.”
이어 다시 들려오는 비명.
“악!”
이번엔 아스칼의 허벅지가 베였던가. 급기야 가르시아는 놈에게 달려가서 아스칼부터 구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사내는 그런 의중을 알기라도 한 듯 태연하게 말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인다며 네 딸 죽인다.”
“아아…….”
가르시아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 버렸고,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자신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사내는 냉혹하게도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다시 펼쳐 봐. 이번엔 내가 백번 양보해서 기본기라도 보이면 좀 손속을 거두겠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이미 여러 군데에 베인 딸의 피범벅 된 모습에 눈물까지 흘렸다.
“제발!”
“그럼 보여 줘. 이 허접 중에서도 개허접 같은 새끼야. 내가 만족할 만한 검술을 보여 달란 말이야! 기본부터 다시 정리해 해 봐.”
“아, 알았어.”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검을 집어 들고는 발검의 묘미 다음 장을 시전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넋이 나간 상태, 검이 제대로 잡힐 리 없었다.
탁!
“아!”
순간 검을 놓치고 마는 가르시아. 이에 사내는 몹시도 실망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신……. 더 이상 볼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이만 끝내지 그래. 물론 그 대가로 네 딸의 목을 자르겠다.”
이에 가르시아는 무조건 그에게 향했다.
“안 돼!”
“뭐가 안 돼! 너는 신성한 검법에 모욕을 준 더럽게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팍!
가르시아는 사내의 발길질에 그대로 실신하고 말았다.
“악!”
울부짖는 아스칼.
“아빠! 아빠!”
사내가 검으로 아스칼의 목에 대려는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사내는 왼편으로 고개를 들어 살펴보았다. 흑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온 인간 청년, 그의 등 뒤에는 커다란 낡은 철검이 메여 있었다.
“또 한 놈이 내 결계에 걸려들었군.”
사내는 다시 청년을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뭐야?”
청년이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시전할 검술이 마음에 든다면 그들을 살려 주기 바라오.”
사내는 그 말에 흥미로웠는지 일단 아스칼을 풀어 주고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마음 들지 않는다면?”
“그땐 마음대로 하시오. 단, 조건이 있소.”
사내의 눈빛이 번뜩했다.
“조건이라니?”
“내가 하는 대로 그대 역시 똑같이 따라 해야 한다는 조건이요.”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풋, 얼마나 대단한 검술을 펼치려고. 보아하니 날고 부러진 철검이라. 또한 네놈을 보니 아직은 30을 넘기지 않은 청년이라. 평생 수련해 봐야 고작 수년 정도는 됐겠지. 어차피 이미 결과가 나온 것 같은데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되겠나?”
이에 청년은 아까보다 더욱 부드러운 말투로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도 한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의 하나는 바르군. 그럼 나 타란토는 명한다. 지금 당장 네 검술을 보여 주어라. 물론 나는 그대로 따라 할 것이다. 그다음에 네 목숨을 거두겠다.”
그때 청년이 검을 들어 동작을 취했다.
삭! 삭!
[찌르고 베기]
청년은 단 두 가지만 선보인 다음 검을 거두었다. 이에 사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 한 거야.”
청년이 말했다.
“보여 줬잖소.”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를?”
“조금 전 나는 검술을 펼쳤소.”
“지금 장난치는 건가?”
청년이 무덤덤하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보여 준 것이오. 자, 이번엔 그대 차례요. 내가 한 동작을 따라 해 보시오.”
“…….”
사내는 무슨 기가 찬다는 듯 검을 들어 그대로 따라 했다.
삭, 삭.
“찌르고, 베고. 자, 했다. 싱거운 인간. 흐흐, 이리 와서 그냥 내 칼에 찔려 죽어라.”
그러자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의 조금 전 동작은 내가 한 것과 다르오.”
“다르다니?”
“약속을 어겼으나 이번은 봐주겠소. 하지만 경고를 드리겠소. 다시 똑같이 따라 하지 못한다면 그에 상응한 벌을 내리겠소.”
순간 사내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뭐라!”
감히 자신 앞에서 농락을 벌이다니. 그래도 내심 흥미로웠던가.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전 저 인간의 찌르고 베기의 단순 발검 동작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던가.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나름 성의껏 해 보기로 했다.
“한 번 더 해 보지.”
삭! 삭!
“찌르고 베기.”
이어 들려오는 청년의 음성.
“틀렸소.”
“…….”
사내는 잠시 침묵을 지키는가 싶더니만 이내 안광이 폭발할 정도로 노했다.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이다.”
사내는 청년에게 다가와 마치 벌레 보듯 노려보더니만 그 자리에 검을 휘둘러 죽이려 했다.
삭!
삭!
두 번의 파공음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사내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오히려 그의 뺨이 베이고 만 것이다.
“억!”
피가 몽글몽글 솟았고, 사내는 뒤로 물러났다. 청년의 그를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겠다고 말했잖소.”
그러고는 그가 다시 검을 앞세워 찌르고 베기의 발검을 선보였다.
삭삭.
“자, 다시 따라 해 보시오.”
사내는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저 뺨을 타고 내리는 끈적끈적한 붉은 선혈, 그는 손으로 그곳을 더듬으며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인제 보니 보통 놈이 아니었어.”
그제야 깨달았던가. 정신이 바짝 났다.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내 뺨을……. 어쨌든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 찢어 죽일 놈,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
그는 다시 분노했고, 검을 들어 청년을 공격했다.
삭.
삭!
“억!
격돌이 이루어지기 직전 팔을 베이고 마는 사내.
“아아.”
또다시 당한 것이다.
청년은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했다.
“어서 따라 해 보시오. 만일 제가 그대의 발검이 나와 같다면 그때는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것이오.”
“…….”
흔히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했다. 하지만 사내는 스스로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고나 할까. 조금 전 공격은 나름, 최선을 다해 방심하지 않고 감행한 것인데 이번엔 팔을 베어 버렸으니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자! 정리할 시간을 주겠소. 그다음에는 아까 내가 펼친 동작을 따라 해 보시오.”
사내의 머릿속이 복잡해 갔다. 그는 인간들도 두려워하는 혈전사였다. 한때 인간 세상에 나와 수많은 검사를 도륙하고 그도 무료해 잠시 속세를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나와 보니 그 자신은 뺨과 팔을 베이고 저 거대한 태산 앞에 놓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검술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과 당당함이 있었지만 만에 하나 상대가 강대하다면 그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할 정도로 융통성은 있었다.
“그래, 도망가자.”
그리고 뒤로 돌아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뭔가 엄청난 힘에 짓눌린 것처럼 한 걸음도 움직이기 힘들었으니.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음성.
“어서 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