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메카론은 상대가 서열 800위라는 말을 듣고 더욱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번에도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얏! 죽어!”
순간.
붕!
메카론의 검이 허공을 휘두르고 마는데, 그곳에 있어야 할 대결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 갔어?”
- 메카론의 상대인 기드가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하하,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지는군요. 기드는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일까요? 메카론의 기세에 겁이 나서 꽁무니를 빼는 것이 분명합니다.
메카론은 기드가 도망친 곳으로 빠르게 쫓아가기 시작했다.
“거기 안 서!”
기드는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어차피 이 게임에서 제일 약자인 자신은 맞붙을 상대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젠장! 처음부터 서열 8위와 만나다니!”
그는 뭐라 푸념하며 숲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뒤에서 욕지거리하고 따라오는 메카론.
“너 이 새끼! 비겁하게! 거기 안 서!”
“너 같으면서겠냐! 이 등신아!”
“뭐라고! 등신!”
메카론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계속 추격했지만 기드의 달리는 속도가 더 빨랐던가.
“약 오르면 계속 쫓아와 보시지.”
“이런 개새끼가!”
기드는 한참을 달렸을까. 이제는 숲길을 벗어나 어느 붉은 바위 지대에 도착했다.
“헉! 헉!”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며 잠시 멈추었고, 이번에는 어디로 도망갈까, 하고 주변 지형을 살펴보았다.
- 기드는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산맥이 있는 파울로 신전, 그리고 다른 한쪽은 바닥에 보이는 앙테아 해안 지대. 자! 아쉽게도 그 어느 쪽으로 가든지 막다른 길입니다. 기드는 어느 쪽으로 가던 곧 메카론에게 잡힐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자! 기드의 선택은 뭘까요?
그때 기드는 산맥이 보이는 파울로 신전 쪽으로 향했다.
그는 그쪽으로 가면서 내심 불안함이 들었다.
‘제길, 막다른 길이라고? 이제 죽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이 살상 게임의 목적은 생존을 위한 잔인한 게임이라는 사실, 이 안의 공간은 거대하지만 결국에는 사방에 벽으로 둘러친 인공의 사냥터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기드는 그저 한참을 앞만 보고 달렸는데, 갑자기 발밑이 이상했다.
“뭐야? 땅이 뭔가 물렁거리는데.”
그때였다.
순간 뭔가 그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그대로 땅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닌가.
슈욱!
“헉!”
이어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잠시 후 메카론이 그곳으로 왔다.
“뭐야, 이놈이 어디 갔지?”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자신에게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치던 상대방을 찾을 수 없자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 여러분!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메카론에게 도망을 치던 기드가 갑자기 사라진 것입니다. 저희 중계진으로서도 모든 관계자들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요. 이 살상 게임의 사냥터는 제한된 공간이 분명하건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혹시 무슨 트릭이 있는지 현재 당국에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메카론은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별로 개의치 않고 다른 사냥감을 찾으러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때 저 앞에서 오는 그 누군가의 모습. 그는 한눈에 봐도 녹이 잔뜩 슨 낡은 철검을 쥐고 오는 청년이었다. 메카론의 눈빛이 번뜩였다.
“뭐야! 저놈은?”
- 자! 메카론이 드디어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대는 서열 777위 이형도라는 자입니다. 그는 조홀 은하계 시공 전사 출신으로서 나름대로 이력이 있어 보이는데 여기 자세히 살펴보니 그다지 별다른 이력은 없어 보입니다. 어쨌든 지금 방금 메카론이 검을 들어 그에게 공격하기 위해 돌진해 들어갑니다.
* * *
한편.
나는 숲으로 지나 이곳으로 나오자마자 저 앞에서 나에게 무섭게 달려오는 자를 눈여겨보았다.
“서열 8위 메카론? 젠장.”
살상 게임에 참가하고 처음으로 맞는 상대였다. 그런데 저자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정말 야록의 말대로 신들의 전쟁이던가?
하지만 나는 기죽지 않았다.
내 현재 레벨은 무려 55만이 넘기 때문에.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나 역시 정면으로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파파파팟.
삭!
“악!”
털썩!
내 검에 의해 메카론의 목이 댕강 잘려 나갔고, 몸통이 땅바닥에 엎어지는 순간이었다.
- 아! 보, 보셨습니까! 조금 전 전투 상황을……. 아,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건 이변입니다. 세상에! 서열 8인 메카론이 서열 777위에게 단 일 검에 피를 토하고 즉사했습니다. 아아! 여러분! 살상 게임이 시작되고 최대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서열 777 이형도가 메카론을 쓰러뜨렸습니다.
나는 내 귀에 시끄럽게 들리는 방송 해설에 뭐라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서 사람 죽이는 것도 생방송에 중계하다니. 도대체 이 베가드 행성 놈들은 어떤 족속들이지.”
* * *
- 그대 기드는 안드로메다 성운 각각 행성을 창조한, 바로 그 창조주들의 서식지에 왔다.
기드는 살상 게임 도중에 갑자기 자기가 떨어진 이 미지의 세계에 아직도 어리둥절했다.
“서식지?”
- 이곳은 말 그대로 창조주들의 서식지로서 그들이 유희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게임 공간에 자동 로그인되었다.
“로그인?”
- 자! 곧바로 창조주들의 게임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
기드는 그게 뭔가, 하고 한참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내용이 생각났다. 자신이 자살하려고 절벽에 오른 일, 그리고 어떤 노인의 음성이 이러했다.
‘그대는 베가드 행성에서 엄청난 기연을 얻는 운명이라 미래 예측기에서 그 수치가 나왔소. 그러기에 나 은하 연합 소속 스카웃 담당자인 나는 그대를 초시공 전사 테스트에 지원할 기회를 주겠소.’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드는 결국 자신의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게임에 열중하기로 했다.
- 이곳에는 언제나 광명만이 존재할 뿐이지. 하지만 오늘은 신성한 어둠이 그대를 비추어 주리라.
빛이 비치는 것은 들어 봤어도 어둠이 비추어 준다는 말은 웃기지도 않았다.
“여기 NPC 농담도 할 줄 아는군, 쳇.”
- 어둠이 내려 준 빛을 살펴라. 그것은 네게 안겨질 천운이리라.
“어둠이 어떻게 빛을 내려요. 나 참.”
- 수만 년 만에 내리는 찰나의 어둠이니 선택받은 자는 그것을 지나치지 않으리라.
“됐고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탁! 탁!
도끼로 기둥 치기만 무려 수천 번.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제기랄.”
탁! 탁!
그때 기드는 도끼를 멈추고는 홀로그램 경험 수치를 허공에 띄웠다.
띠링!
[현재 경험치는 0.0001입니다.]
[공격력- 0
방어- 0
민첩성- 0
지능- 0
생명력- 0]
“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며칠 동안 수천 번 이상의 도끼질을 했건만 0.001이라니. 레벨 1에서 고작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홧김에 도끼를 패대기쳐 버리고는 대자로 누워 버렸다.
‘레벨 1이 되기 위해서는 수천 번에다 1,000번의 도끼질을 곱하면 되겠지……. 그렇다면 백만 번이라…….’
기드는 몸을 돌려 앞으로 엎어져 손으로 땅을 쳤다.
“무슨 게임이 이 모양이야! 이건 평생을 해도 레벨 몇 올리다가 늙어 죽겠군. 아! 젠장 접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노가다성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다시 한참을 골몰했다. NPC 말대로 이곳은 언제나 태양이 비추는 광명만이 흐르는 세계인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늘이 뭔가 이상했다. 토성 고리와 초승달 모양의 별을 서서히 가리는 것이 아닌가. 기드는 서서히 어두워지는 상공을 감상하기로 했다.
토성의 고리가 초승달 모양의 별을 완전히 가리자 캄캄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기둥으로부터 수십, 수백 개의 빛이었다. 그저 도끼로 내려치기만 했던 낡은 쇠기둥들, 총 스물여덟 개였고, 그것들은 마치 반딧불을 왕창 머금은 듯 촘촘한 빛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뭐지?”
토성 고리로부터 별이 벗어났고, 순간 세상은 다시 환해졌다. 기드는 어리둥절했다. 쇠기둥에서 난 빛들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지. 그 자신이 모르는 그 어떤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단 말인가.
이내 기둥에 고개를 내밀어 살폈지만 세상이 너무 환해서 그 빛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도끼로 내려치는 훈련용 쇠기둥들, 기드의 호기심에 서서히 발동이 걸렸다. 그리고 아까 NPC가 했던 말.
- 기드여! 자넨 정말 운이 좋군. 이곳에는 언제나 광명만이 존재할 뿐이지. 하지만 오늘은 신성한 어둠이 그대를 비추어 주리라. 어둠이 내려 준 빛을 살펴라. 그것은 그대에게 안겨질 천운이리라. 홀론에서 그야말로 수천 년 만에 내리는 찰나의 어둠이니 선택받은 자는 그것을 지나치지 않으리라.
‘그건 일종의 힌트였을 수도.’
이 순간 그에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니, 이제부터는 자신의 본능을 믿어야 할 것이다.
기드는 갑자기 기다란 외투를 벗더니만 기둥 하나를 골라 거기에다 씌웠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태양이 가려진 덕분에 어두웠고, 놀랍게도 기둥으로 새어 나오는 빛들을 볼 수가 있었다.
빛점들은 기둥의 상단과 하단에 일정 간격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기드는 상상했다.
‘혹시 이것들이 타격을 하라는 표시인가? 그런데 빛이라. 이건 보통 기둥이 아니라 일종의 전자 체계로 운영되는 타격 시스템이 분명해. 그렇다면…….’
허리춤으로부터 단도를 꺼내어 빛점들을 기준으로 십자 표시를 새기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외기둥으로부터 외투를 벗겨 보니 다행히 십자 표시는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제는 그곳들이 정말 타격점인지 아닌지 하는 시험이었다. 기드는 도끼를 들어 십자 표시 중 하나를 골라 가볍게 타격했다.
푹!
전에 들렸던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는 달랐다. 기드는 가슴이 설렜다.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다.
탁!
이번엔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갔는지 십자 표시를 빗나갔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둔탁한 음이 들렸다. 이어 다시 정확히 조준하고 십자 표시를 찍었다.
푹!
원하던 소리였다. 그리고 찍는 느낌이 이렇게도 부드러울 수가.
“하하.”
기드는 절로 신이 났다.
푹! 푹!
최대한 힘을 빼고 조준점을 맞추니 그다지 힘이 들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고 기드의 도끼질은 제법 능숙해졌다.
푹! 푹! 푹! 푹!
“뭔가 되는데. 정확히 200번.”
혹시나 하고 홀로그램 수치를 허공에다 띄웠다.
띠링!
[현재 경험치는 0.002입니다.]
[공격력- 0.1
방어- 0
민첩성- 0
지능- 0
생명력- 0.1]
경험치가 0.002이고 전혀 없던 공격력과 생명력에 각각 0.1이란 수치가 최초로 붙었다. 계산을 해 보니 수천 번 가격한 것과 200번 가격한 횟수의 경험치가 같았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것은 왠지 모르게 체력이 강해진 느낌이었다.
‘혹시 생명력의 0.1퍼센트의 수치 때문인가?’
자고로 게임이란 이런 맛에 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올리며 향상되는 수치에 중독되는 법. 게다가 이건 마우스로 움직이는 게임이 아니라 실제 같은 가상현실에서의 체험.
“놀면 뭐 해!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자.”
기드의 도끼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푹! 푹! 푹! 푹!
“아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