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똑같잖아!’
울타리 문을 열고 현관 앞으로 올라갔다. 체리 색으로 덧붙인 문양, 어김없이 현관에는 녹슨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만 계단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비현실에 익숙하지 못한 내 이성과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뭐지, 이건?’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상상이 꿈으로 표현되었고, 그 꿈이 현실로 이어지는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다만 꿈속의 그녀만 존재하지 않을 뿐 여타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나, 미친 것 같은데.’
그렇게도 환한 햇살이 비추던 세상이었건만 내 혼란한 정신세계와 어울리려 했는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바람이 거세지면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당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가죽 가방이 빗물에 서서히 젖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름 분석적인 사고로 어떡하든 이 기이한 상황을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르릉 쾅.
쏴.
한두 방울 떨어졌던 빗물은 곧이어 손가락 마디에 버금가는 장대비로 변했다.
두둑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바로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좀 나아지셨나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고, 나는 그만 할 말을 잊었다.
“헉!”
“차를 마시자마자 정신을 잃을 줄은 몰랐어요. 무척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하시더니 벌써 반나절이나 여기서 앉아계셨어요.
“…….”
“이제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에요. 물론 길이 질퍽해질 테고, 한동안 마차가 다니지 않을 거예요. 괜찮으시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 저희 별장에 머무르시는 게 어떨지요. 여기까지 비가 들이치는데 안으로 들어오시죠. 이번엔 정성을 들여 식사 준비했는데…….”
미친 게 확실했다.
아무튼 꿈이 다시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장마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 덕분에 나는 별장에서 보름간을 머물렀고, 그녀와 많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나이도 똑같고 서로 반말하니까 더 좋다.”
“기드, 그래도 숙녀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해.”
“후후, 자기가 숙녀래. 처음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완전 말괄량이인 주제에. 진짜 내숭 덩어리네.”
“너도 괜히 남자인 척 목소리 깔지 마. 그게 더 어색해 보여. 남자로 인정할 테니까 말이야.
“인정하다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라고!”
“그거야 모르지. 남장 여자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까지는 그 속을 모르니까, 후후.”
“너 정말!”
함께 식사하고 얘기하고 장난도 치며 이제는 친한 친구처럼, 아니 그보다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연인 비슷한 관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가 검사래. 후후.”
“나 검사 맞는데!”
“남자가 연약하게 생겨서 검이나 제대로 들긴 들 줄 아는 거니? 그리고 옷이 그게 뭐야! 호호호, 정말 그만 좀 웃겨. 하아, 너무 웃었더니 배가 아파.”
그녀의 해맑은 웃음을 계속 보려면 더 망가질 수도 있었다.
“어이쿠!”
꽈당.
“호호, 세상에 검사라는 사람이 검을 휘둘러 보기도 전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다니. 호호, 그만해. 진짜 거기까지만 하라고, 호호호.”
나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군.”
그러자 그녀는 더욱 까르르거리며 뒤로 자빠지게 변했다.
“아하, 제발 그만 좀 해. 눈물이 다 나오려 하잖아. 아무리 하류 검사라도 검은 제대로 뽑는 법은 배워 뒀어야지.”
그녀는 나를 하류 검사로 알고 있다.
나 역시 내 신분을 속이고 연극을 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점심 식사 준비 다 했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오늘 메뉴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숭어찜.”
“하하, 굿!”
원래 숫기가 없는 나로서, 그 어떤 여인에게조차 가벼운 입맞춤의 경험조차 없었건만 이제는 그게 자연스러운 애정임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기분이 좋은데, 내가 볼에다 키스해 줄게.”
“됐고! 열심히 식사해서 영양 보충부터 하라고!”
순간마다 꿈이려니 하는 내 생각은 소심했던 행동을 과감하게 만들었다.
검신으로서 강자들과 숱한 혈전을 치르면서도 단 한 번도 심장이 떨리거나 그런 적은 없었는데.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내 이성은 점차 희미해져만 갔다.
“키스!”
“흠, 발정 난 개처럼 왜 그러니?”
“하필 개에 비유하다니.”
“후후, 너 진짜 개처럼 놀잖아.”
“…할 말이 없다, 정말…….”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함께 소파에 누워 부드러운 속삭임을 나누는, 마치 부끄러운 듯 때로는 대담한 사춘기의 10대들처럼 행동했다.
“기드! 이것 좀 도와줘. 젖은 장작 때문에 또 연기가 많이 나요. 켁! 켁! 창문 좀!”
“내가 한다고 했는데 드디어 일을 만들었군.”
“늦잠 자는 사람한테 뭘 부탁해.”
“일단 창문부터 활짝 열어 놔야 하는데 아직도 비가 내리치니 바닥이 또 흥건히 적셔지겠네.”
“나중에 제가 걸레질할 테니 빨리 창문 좀 열어 줘요. 켁! 켁! 아, 숨 막혀라.”
빗줄기가 그치고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레아는 밖에 쌓아 둔 장작을 실내 안으로 들여놓을 것을 부탁했다. 젖어 있는 장작의 물기를 조금이라도 말리면 연기가 덜 날 수 있다고 했다. 장작은 울타리에 걸쳐 대략 2미터 길이로 사람 키 높이만 쌓여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는 질퍽한 마당, 아예 신발을 벗는 것이 나을 법했다.
장작을 한 아름을 안고는 다시 건물로 돌아가려 하는데, 누군가의 대화가 들려왔다.
“우리라도 와서 잡초를 뽑아야지, 나 원 참.”
“영감이나 혼자 오지 그랬어요. 왜 나는 데리고 와서. 대체 늙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요. 아가씨가 마을을 위해 희생한 일도 수십 년 전이니 이제는 우리도 좀 쉽시다.”
“이봐! 할망구. 아가씨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게요. 죽어서나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이렇게라도 보답해야지.”
“사람들도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이곳을 공동 관리를 해야지.”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 했는데. 쯧쯧, 그냥 일이나 하쇼. 싫으면 저리 비키던지.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건물 뒤뜰인 것 같았다. 누군가, 하고 그곳으로 가 봤더니 그들은 지난번 내게 잠자리를 제공했던 노부부가 아니던가.
나는 반가운 나머지 그들 앞으로 다가가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하셨어요!”
순간 노부부는 나를 가만히 살펴보더니만 다소 놀란 듯했다.
“젊은이는 지난번 우리 집에 묵었던…….”
“네, 저 맞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표정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것인가?”
“장작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장작이라니, 뭐 하게요?”
“실내에 들여놔 물기를 말리려고요. 그래야 연기가 덜 나거든요.”
노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 젊은이가 뭐라는 거요?”
아내가 물어보자 남편 역시 어깨를 들썩였다.
“난들 아오?”
노인은 다시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마치 희한한 동물을 보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했다.
“젊은이, 자물쇠로 굳게 잠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고요?”
“아니, 열려 있습니다. 현관으로 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저 혼자만 있지 않습니다.”
나는 노부부를 앞뜰로 안내했고, 현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여기…….”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녹슨 자물쇠가 잠겨 있는 것이었다. 노부부는 내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어디 아픈 게요?”
“…….”
현실 같았던 꿈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던가. 그도 모르게 외쳤다.
“레아! 안에 있으면 당장 나와 봐!”
그런 내 행동에 노부부는 매우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아가씨 먼 친척이라도 되나? 아직 제삿날은 먼 것 같은데.”
“그렇게 보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는 뭐하니 얘기는 해 줍시다그려.”
노인은 울타리 끝 쪽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보게나, 저기 무덤 보이나?”
“무덤이라니요?”
“저기가 바로 아가씨 묘요.”
“…….”
“이제 정신 좀 차리시오. 혹시 젊은이가 이러고 있는 거 부모님도 아시고 계시오. 보아하니 귀신에 들렸구먼.”
그로부터 일주일 후.
문득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담한 기와집 별장. 나는 잠시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는 영영 떠난다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천하의 검신인 내가 뭔가에 홀리다니.
귀신 들림이란 단어가 이제는 저속하게 들릴 만큼 나는 그곳에서의 한 유령과 지냈던 일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마차가 오고 있었다.
마차는 내 앞에 섰고, 마부가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 후 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언덕 아래 오솔길로 향하자 흙먼지를 마구마구 뱉어 내었다.
나는 저 멀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시골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곳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것은 순간적인 충동은 아니었다.
‘이대로 떠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 그 어떤 뭔가가 발목을 꽉 잡은 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별장의 모습.
‘뭔가 사연이 있을 법도 한데, 쳇.’
결국 울타리를 따라 그곳으로 올라갔다.
삐걱.
울타리 문을 열고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처음 살펴본 것은 현관문이었다.
문을 열고 안을 살펴보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아.”
이름을 불렀지만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유령이라는 사실보다도 함께 지냈던 추억이 내 영혼을 뒤흔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그녀의 방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레아.”
찰칵.
손잡이를 돌리고 방 안을 들여다보니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나 왔어.”
대답이 없었다.
왠지 덜컥 겁도 났지만 그 전에 그녀의 상태가 궁금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신음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돌리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레아!”
“기드.”
“어디 아파?”
“응, 조금…….”
이마를 만져 보니 불덩이 같았다.
“이런!”
“돌아왔구나.”
눈물을 쏟는 그녀.
기진맥진했지만 그녀는 나를 보자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떠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말랐지?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네가 사라진 이후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이런 현상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장작을 가지러 나간 뒤에도 돌아올 생각을 않자 그녀는 마당으로 뛰쳐나와 찾았다고 했다.
영영 가 버린 줄 알고 그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지금까지 끙끙 앓아 왔던 것이다.
그는 그녀를 안아 일으키고는 깊은 포옹을 했다.
“오, 이런! 내가 잘못했어.”
“왔으니까 괜찮아.”
“다시는 곁을 떠나지 않을게.”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랜 세월 방랑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스런 아내를 대면하는 기분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