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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얻은 레어템, 현실에는 역대급-107화 (107/143)

107화

“그나저나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려.”

“이번엔 또 뭐요?”

“내가 노망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도 아가씨가 별장에 돌아와 있는 것 같으오.”

“노망이 맞는구먼. 그 모포나 이리 던져 주오. 손님을 세워 두고 밤새 잡담이나 나눌 참인가.”

레아…….

내 머릿속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원래 별장 주인은 옛날 이 지방 총독이라 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레아라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노부부의 회상은 25년 전 일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까 낮에 본 그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혹시 별장을 매입한 새로운 주인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까 낮에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오랜만에 만에 왔더니 잠가 놓은 자물쇠가 녹이 많이 슬었어요. 쇠뭉치 같은 걸로 치면 떼어 낼 수 있을 거예요.’

아침이 밝아 오자마자 나는 옷부터 주섬주섬 챙겨 입고 노부부의 집을 나섰다.

밤새 생각하느라 자는 둥 마는 둥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

제법 많은 여행을 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이번 일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자식이거나 친척이 잠깐 들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넘어가면 좋으련만 매사 확실한 것에 집착하는 성격이 문제였다.

‘이런 내가 싫다, 정말.’

아니, 어제 느꼈던 그 잔잔한 매력과 감동에 이끌려 또 하나의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건지도 몰랐다.

인연이란 우연히 만나서 필연적으로 가는 절차라 누가 말했던가.

솔직히 나 자신을 속이기보다 가슴이 와닿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 * *

별장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지만 이제는…….

용기가 필요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는 아주 사소한 질문에조차 말이다.

현관을 두드리자 여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어머! 당신이군요.”

언제든 은근한 미소가 베여 있는 그녀.

나는 길을 따라오면서 수십, 수백 번 속으로 연습했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마을에서 하룻밤 묶고 요 아래 마차를 기다리는 와중에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을지 몰라 한번 들러 봤습니다.”

그녀의 방긋 웃는 모습에 뽁 들어간 보조개가 그렇게도 예쁠 수가 없었다.

“아, 그러셨어요. 정말 친절하신 분이시군요.”

“하아, 후후. 제가 그런 소리 좀 듣습니다.”

어쩐 일인지 즉흥적인 거짓말도 잘 나왔다.

“마침 잘됐군요! 제 방 구석에 있는 침대를 창가 쪽으로 옮기고 싶은데, 그것만 잠깐 도와주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물론이죠, 아가씨. 아니, 혹여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이름을 물어봐도 괜찮을는지요.”

방긋 들어간 두 개의 보조개, 하늘색의 연한 푸른 눈방울이 내 눈을 예쁘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 이름은 레아라 합니다.”

노부부가 말했던 총독의 딸과 이름도 같았다.

“그대는?”

“저는 기드라 합니다.”

“검을 등 뒤에 차고 계신데, 혹시 직업이 검사이신가요?”

“네…….”

“검이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유명하신 검사이신가요?”

“아니요, 그냥 보통 검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겸손을 다 떨 줄 알고……. 확실히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날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한 이후에 말이다.

침대는 보기보다 무거운 편이었다. 원목으로 예쁜 문양을 만든 머리 쪽은 그가 들었고, 비교적 가벼운 밑 부분은 그녀가 들었다.

커튼이 활짝 젖혀져 있는 창가로부터 아침 햇빛이 환하게 비추었고, 침대를 그곳으로 옮겼다.

‘아, 그런데 침대가 더럽게 무거웠다.’

놀랍게도 그녀는 전혀 힘들어 하지 않고 침대를 번쩍 드는 것이 아닌가.

내가 요즘 정신적 문제 때문에 기력도 많이 쇠했나 보다.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네요.”

그녀는 푹신푹신한 침대에 몇 번을 앉아 보고 일어서며 매우 기뻐했다.

창가에 턱을 기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까지 보였다.

“예전에 옮겼어야 했는데요, 아버지는 햇살이 너무 강해서 침대를 이곳으로 놓는 것을 처음부터 반대하셨죠. 그 때문에 토라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혹시 식사하셨나요?”

“아, 예. 했습니다.”

“음……. 아침 말고 점심이요?”

“아직 때가 이른 것 같은데요.”

“하긴, 어중간하기는 한데 일도 도와주셨으니 그 보답으로 식사를 대접하려고요.”

사실 노부부 집으로부터 이른 아침에 일어나 허겁지겁 나오느라 아침 식사를 놓쳤고, 지금은 몹시 허기가 진 상태였다.

“그러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무 문양이 그대로 드러난 갈색 원목, 의자 역시 자연목 그대로였다. 그녀는 일단 연한 초록빛 식탁보를 꺼내어 탁자 위에 드리웠고, 접시와 포크부터 가지런히 놓아 주었다.

“이곳이 별장인지라 식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일단 제가 가져온 식재료들과 뜰 앞에 자란 푸성귀로 비빔밥을 만들려 하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이왕이면 고기도 구울까요?”

어느새 불을 지펴 놓은 난로 위, 지짐판에는 식용유와 뒤범벅이 된 돼지고기가 튀겨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연기가 제법 심하게 났고, 그녀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손을 마구 저었다.

“장작이 젖어서 연기가 많이 나네요. 죄송하지만 창문 좀 열어 주실래요.”

잠시 후 하얀 접시 위에 대조적으로 까맣게 탄 튀김 고기와 섞어 놓은 푸성귀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미안한 듯 내 눈치부터 살폈다.

“음식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요.”

“아니, 괜찮습니다.”

성의를 생각해서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속으로 넣으려 했다.

“잠깐만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녀는 내 접시를 집어 들고는 주방으로 가져가 통에다 과감하게 쏟아부었다.

‘아, 다행이다! 나는 까맣게 탄 고기 제일 싫어하는데.’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찾잔 옆에 수프, 아니 걸쭉한 죽이라고 해야 맞나.

아무튼 그녀의 재도전은 나름으로 성공을 거둔 듯했다. 아직도 미안한 듯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귀여운 보조개를 드러냈다.

“그거라도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요.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아마 혼났을 거예요. 이렇게 말이죠. ‘아! 레아야! 숙녀가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요리는 기본이요 바느질은 필수! 손님 앞에서 덜렁대는 것은 금물! 예비 숙녀가 되어 가지고서 전혀 나아진 게 없구나.’ 후후, 잔소리가 좀 많으신 편이지요.”

아까 요리하는 거 보니까 내가 그녀의 엄마였어도 그랬을 거다.

이쯤에서 나는 매우 망설였던 질문 하나를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그녀가 자신을 레아라고 행세하는 의문보다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 노부부의 대화 중에서 그녀는 오래전 고인(故人)이 된 인물이라는 말이 거짓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80대 고령에 그분들은 망령이란 가여운 병을 앓을 수도 있는 법. 다만 서로가 자신들의 병을 모를 뿐 아마도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가엾은 노인들일 수 있었다.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드리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내 시선에 집중되었다.

“무슨 질문인데요?”

“이름이 정말로 레아 맞나요?”

“네.”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로 되물었다.

“후후,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예전에 이곳에 살았던 여인의 이름과 같아서요. 그분은 이미 고인이라는데…….”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설마요, 저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전혀 없는데요. 게다가 제가 죽다니요?”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도 당혹스럽지만 마을에 사시는 노부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기에…….”

환한 미소.

“후후.”

그녀는 찻잔을 입에 대었고, 후루룩 마셨다.

“차 식겠어요. 어서 드세요.”

역시나 하지 말았어야 하는 질문이었던가. 나는 이내 후회스러웠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멋쩍은 내 모습, 손을 들어 앞머리를 올려 제치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순간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이 흐릿했다. 곧이어 모든 것들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힘없이 탁자에 머리를 박은 채 정신을 잃어 갔다.

* * *

눈을 떠보니 마차 안이었다.

바로 앞의 노파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젊은이, 많이 피곤했나 보군. 꼬박 하루 동안 이 비좁은 안에서 깊은 잠에 들다니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노파를 비롯한 승객들, 그가 찾고자 하는 여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꿈이었던가.

‘꿈이 맞군.’

곧바로 허무함이 밀려들어 왔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보니 강렬한 햇살에 드리워진 보리밭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이곳은 오지이다.

마차로 비포장도로를 달린 지 이제 반나절이 되는 날이 분명했다.

보리밭 지평선과 맞닿아 있는 푸른 하늘로 눈을 돌렸다. 아직 생생한 그녀의 모습에 꿈이었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허탈감이 밀려왔다. 마차 여행을 시작하기 하루 전날 과음을 했던 일이 기억이 났다.

이른 새벽부터 여행길에 오른 나는 정신없이 잠을 잤던 것이 분명했다.

‘꿈을 꿔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완전히 현실 같은 게…….’

상상의 나래 속에 나만의 여인상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며 하나의 그럴듯한 작품을 꿈속에 수놓았다.

마차는 보리밭을 지나치고 다소 경사가 진 구릉지 언덕을 향해 심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아가씨가 존재하지 않을 뿐 신기할 정도로 그 모든 풍경이 꿈과 맞아떨어졌다.

즐비한 미루나무들과 그 아래로 흐르는 강줄기, 짙은 녹음의 빛깔로 잔잔히 파문을 일으키는 물결마저도 비슷했다.

초여름의 한 줄기 미풍이 일렁이며 코끝에 상큼함을 얹어 놓는 이 느낌. 분명 여기까지뿐일 것이다. 꿈속에서 그가 만든 이미지와 현실의 우연은 말이다.

곧이어 돌다리를 건너면 낡은 신전이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지방은 처음이었다.

물론 꿈에 보았던 돌다리와 낡은 신전이 존재할 리가 없을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돌다리가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연에 한 번 더 우연히 겹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전이 그 숙연한 모습을 드러낼 때 나는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저럴 리가 없어! 저건 꿈속의 광경인데!”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다시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혹시나 예전에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이곳은 초행인데…….’

낯선 이방인으로서 처음 이 지방을 처음 여행하는 것이 확실했다.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침 마차는 언덕 위쪽으로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고, 나는 한 번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꿈속에 봤던 아가씨, 그녀가 내렸던 별장이 저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때는 인정하기로 말이다.

‘세상에…….’

정말로 별장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차를 세웠다.

“여기서 세워 주세요!”

“여기서요?”

“네.”

결국 짐과 검을 들고 내렸고, 주변을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모든 풍경이 똑같잖아. 저 위의 별장도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울타리를 따라 올라가 문 앞에 이르렀다.

앞마당에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 그 한가운데 회벽색의 아담한 별장 건물. 이제야 꿈이 현실과 똑같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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