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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얻은 레어템, 현실에는 역대급-106화 (106/143)

106화

등 뒤로부터 검을 꺼내어 가볍게 탁! 치니 금세 두 동강 났다.

검신이 된 이후 수많은 대결에서 생사를 오갔지만 이렇듯 열쇠 하나 부수려고 검을 사용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됐군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씻을 만한 곳이 없을까요.”

“뒷마당에 우물이 있긴 있는데 오래 버려두어서 아마 수질이 탁할 거예요. 이왕이면 저기 보이는 둔덕 아래로 내려가셔서 강가에서 씻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버드나무가 군집을 이룬 듯 초록의 짙은 가지 잎사귀들이 수면 아래로 푹 담가져 있었다. 여름의 무더운 습기 때문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있는 옷마저 훌러덩 벗어 던지고 연두색 녹음 빛의 물가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일단 얼굴과 팔에 물을 묻혀 열기를 식히기로 하였다.

“내가 웬만해서 땀을 흘리지 않는 데 날씨가 워낙 후덥지근해서.”

건물 뒤로 이렇듯 아름다운 강이 흘렀고, 언덕 위에 하얀 회벽색의 아담한 별장이 들어섰으니 위치 하나는 기가 막힌 곳이라 생각되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런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그녀의 신분이 뭔지. 또한 수년 만에 홀로 이곳에 왜 내려왔을까, 하는 사적인 호기심 등.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참, 나도…….”

사실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남이야 뭘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아, 정말 나란 놈은…….’

기드는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자살까지 시도하려 했다. 사실 우울하다는 명분으로 죽으려 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사람이 여러 가지 고민이 복합적으로 단결해서 공격할 때 대처 방법이 없을 때를 말하는 것.

* * *

내 이름은 기드이다.

여자보다 훨씬 예쁘게 생긴 남자.

빌어먹을!

머리를 짧게 깎고 일부러 남자다운 모습으로 검신이란 자리에 올랐지만 3년 전 최대의 라이벌인 검술의 제왕 아스테틱과의 대결에서 나의 왼쪽 이마와 목덜미 옆쪽이 베어 큰 흉터가 남았기에 할 수 없이 은발을 어깨까지 길러 그것을 가려야만 했다.

그 대결은 승리로 끝났지만 나는 다시 여자 아닌 여자의 용모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문들.

“동성애자였군.”

“에잇, 추잡하네. 아무리 검신이면 뭐래. 뒷구멍에서 남자들과 온갖 추잡한 짓은 할 거 다 하는 작자가.”

나쁜 소문이 더 빨리 넓게 번지는 법이다.

게다가 동성연애할 때 여자 노릇을 한다나.

그 외에도 죽을 이유는 두세 가지는 더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주변에 혈육 하나 없는 외로움.

한 3년 동안 더 이상의 적수가 없어 무료하다 못해 검술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고 앞서 말한 것처럼 살아가는 의미가 이제는 완벽히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언제나 용기를 주시고 따뜻한 말벗이 되어 주신 어머니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나는 지독한 우울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절벽에 올라 벼랑 끝에 서게 되었다.

근 한나절을 생각했다.

‘죽을까, 말까. 죽을까, 말까. 죽을까, 말까……. 아냐, 그냥 뛰어내리자. 근데 저 아래로 떨어지면 모가지부터 꺾어져 아픈 거 아냐? 괜히 팔다리만 부러져서 산 채로 짐승의 먹이가 되는 건 아닌지.’

어차피 죽을 놈이라지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이 목숨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 또한 이리도 어려운 것임을 처음 알았다.

그냥 한 발 내디뎌 절벽 밑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해방되는데 왜 이리 몸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인지.

사실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는지 그걸 생각하다 시간이 지체된 것 같았다.

결국 찾지 못했고 나는 용기를 내어 발을 뛰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 참 재미없다. 그냥 확!”

바로 그때였다.

“젊은이, 거기서 뭐 하시오!”

“…….”

노인 목소리 같은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건데.

“설마하니 그곳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참이오.”

“…어떻게 알았지…….”

중대한 결심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려는 찰나 갑자기 훼방꾼이라니.

“허어라, 아직 새파랗게 젊은 처자 같은데 어찌 그럼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되었소.”

처자라고… 젠장…….

‘바로 사람들이 나를 여자! 처자로 보기에 죽으려는 것이오!’ 하고 속으로만 외쳤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다른 대답을 육성으로 내뱉고 말았다.

“더 이상의 적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후후, 고독함 때문에 말이죠.”

그래도 죽을 때 죽더라도 내게는 검신의 자존심은 있어나 보다.

“적수가 없다고요? 고독함이라고요! 허허,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구먼.”

개가 웃다니… 뭐야, 저 노인.

순간 내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그대의 선택이 뭐든 일단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마음대로 하시구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고개가 절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름다운 세상.

“와.”

광활한 하늘로부터 한 줄기 바람이 내 고운 은발을 일렁였다.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이…….

도대체 이 느낌은 뭐지, 하고 그제야 뒤를 돌아다 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엥?”

하지만 어디선가 조금 전 노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이제부터는 보일 것이요.

나는 다소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살펴보다 냅다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 앞으로는 삶이 지루하지 않을 테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구려. 그대에게는 초시공 전사가 될 자질이 있소.

“초시공 전사요? 그게 뭔데요?”

- 물론 현재 그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잠재력은 엄청나니 내 일부러 그대에게 귀띔을 해 주는 것이오.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누구냐고요!”

- 허허, 나중에 인연이 있다면 만납시다. 베가드 행성에서. 나는 사실 은하 연합 소속의 스카웃 담당을 맡고 이 차원 저 차원을 돌아다니면 그대 같은 잠재력이 무한한 전사를 섭외하는 중이요. 바로 초시공 전사의 가능성을 지닌 그 새싹을 발굴하기 위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 그리고 그대의 운명은 앞으로 엄청난 기연을 만나게 되어 있소. 바로 베가드 행성에서 말이죠.

“기연이라니요? 베가드 행성은 또 뭐죠?”

- 그때 봅시다, 허허. 그럼.

“이봐요! 노인. 도대체 무슨!”

아무래도 정신 나간 노인이 지나가다가 뭐라 그냥 몇 마디 던지고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그날 나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일단 자살을 미루기로 하였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인데. 그냥 나중에 기분 좋을 때 죽자… 얼마든지 기회는 있으니까.’

대신에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여행을 해 보기로 했고, 그날 짐을 싸고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어디론가 향했다.

당시 노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을 테고, 물론 이 오지 별장에서 저처럼 귀엽고 순박한 시골 아가씨를 만나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웃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들고 떠날 채비를 했다. 조금 전에 봐 두었던 마을이 이곳에서도 아득하게 보였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데, 서둘러 간다면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에 그곳에서 숙소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 가시게요?”

“아, 네. 제 할 일은 끝이 났으니 이만…….”

속에도 없는 말이었다.

실내에서 짐 가방을 푸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던 그녀에게 혹여 방해되지 않을까 미리 자리를 뜨려 했지만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 놓은 것처럼 내 발길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하세요.”

‘도움이라… 다른 뭐 도움 거리가 될 만한 게 없나?’

내 발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청소하느라고 손님 대접도 못했군요.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마시고 가시는 것이.”

거의 반사적인 대답.

“아, 마침 목이 말랐는데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일부러 창문을 크게 만들었던가.

서향으로부터 강렬히 비추는 햇살의 조도가 너무 강했는지 짙은 커튼조차 하늘거리는 엷은 천처럼 빛의 절반 정도는 투과시키는 듯했다.

푹신한 가죽 의자에 대리석 탁자, 그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 역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자기로써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것보다는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순간 왠지 스승님이 생각이 났다.

‘생각나네요! 스승님은 첫 수련 날부터 일곱 살에 지나지 않은 저더러 묵직한 쇳덩이를 손에 쥐여 주고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무기라고 속였잖습니까. 나는 그 말을 믿고… 무려 11년간 고생한 걸 생각하면……. 바로 그때의 기분처럼 지금의 내 마음도 비슷하군요.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이 묘한 느낌이랄까요?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호기심 반… 두려움 반……. 삶이 너무 무료하다 보니 제가 정신이 좀 이상하게 변한 건 아닌지요.’

주황빛 황혼으로 빨갛게 물든 양떼구름이 서녘 하늘로 대이동을 하고 있었다.

이때만큼은 화가가 되어 저토록 아름다운 장관을 화폭에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여전히 섭섭하고 아쉬웠다.

비록 짧았던 대화지만 마치 그녀와 소꿉놀이 때부터 알아 왔던 것처럼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갓난아기의 심장처럼 잔잔한 고동을 즐기고 있었다.

‘이름은 뭘까?’

후회스러운 것은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자 친구는 있나?’

그녀의 말하는 모습, 해맑은 매력에 빠진 탓도 있었지만 아마도 한 여인에 대해 신비로움을 한 커플씩 벗겨 내는 것조차 성급하다고 여겼던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돌아가신 스승님과 대화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달콤했던 유혹에서 벗어난 느낌, 생각보다 기분이 조금 더럽군요. 차라리 푹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것을. 그런데 왜 제가 그 여인에게 관심이 가는지 그 이유를 아시나요? 도시에서조차 그 수많은 여성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전혀 흥이 오르지 않은 저였는데요.’

서녘 노을은 그다지 따갑지 않아서 양산을 접고 가방 귀퉁이에 꽂아 넣었다. 길 아래 주황빛 지붕에 회벽 색 벽을 한 집들이 보였다.

‘완전 그림이 따로 없군. 정말 아름다운 고장이야.’

굴뚝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며 한창 저녁 준비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첫 번째로 두드린 농가 주택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수가 있었다.

“들어오쇼.”

워낙 외딴 지역이라서 좀처럼 여행자들이 드물었다. 그 때문에 나는 손님으로서 더욱 친근하고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대략 80으로 보이는 노부부는 마치 나를 친손자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내가 묵을 방의 침대를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두 분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소곤소곤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을 즐기고 있었다.

“저 위 별장 말이오. 올해로 수십 년째 방치만 해 두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가서 집 안뜰에 잡초도 뽑고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내의 말에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참 안된 일이오. 레아가 그런 신분으로 우리 같은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그걸 이제야 아셨소, 허허. 그때는 그리도 구박을 못해 안달하더니만.”

“그거야 신분이 다르니 무턱대고 가까이 대할 수도 없었던 거죠.”

“아무리 세상을 오래 산 당신 같은 할망구가 아량을 베풀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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