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후후, 그래도 그게 어디야. 나 같은 놈이 이런 초시공 전사 테스트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지.”
기드는 호텔 테라스에 누워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일들, 추억 등등 회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후, 그때가 좋았는데.”
그는 눈을 감고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 * *
여행 중에 그 누군가를 우연히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매력이었다.
남쪽 따듯한 해양풍을 맞으며 의외로 아는 지인을 만났을 때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마차를 타고 가는 기나긴 여정에서 옆에 앉은 아가씨의 단정한 모습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것을 마다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덜컹거리는 마차 창문 소리, 동이 트며 아침 햇살이 비출 때 기회마다 곁눈질로 바라보았던 바로 그 아가씨가 은근슬쩍 시선을 마주할 때 그 쑥스러워하는 미소에 반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쁜 아가씨 옆에 있던 뚱뚱하고 못생긴 아줌마가 내 눈길이 거북했던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아니, 그냥 창밖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쪽에도 창문이 있잖아요.”
“여기는 바위 벽밖에 보이지 않아서요. 그나저나 매우 예민하시네요.”
“뭐라고요!”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기드는 원래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고 검술을 통해 다져진 검신의 심안(心眼)이 이렇게 흔들린 적은 없었다.
그것도 한낮 시골 아가씨에게 말이다.
승객들 역시 내 이상한 행색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가문의 내력대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은발과 연한 보랏빛 눈동자.
차림새마저 은빛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인 망토를 둘렀고 등에 찬, 상아 손잡이에 은으로 제작된 칼집은 제국의 도시에서 나름 이름 있는 검사의 위용을 대변해 주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이런 시골 지방에서는 아마도 서커스 단원쯤으로 봤을까.
그 누구도 두려움이나 경계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승객들이 없었다.
“근처에 공연 있나?”
“지난달에 서커스 봤는데 이번엔 어디서 왔지.”
“훗, 저 사람 옷 입은 것 좀 봐 봐. 도시에서 잘나가는 검사로 꾸민 것 같은데 마치 여자가 억지로 남장해서 그저 겉멋만 화려하게 치장한 것 같아.”
“맞아, 조금은 천박하다. 그렇지?”
아무리 나지막이 속삭여도 청각이 발달된 기드에게는 모든 게 다 들린다. 요즘은 아낙네들보다도 사내놈들이 수다를 더 떤다.
사실 기드는 센 제국을 대표하는 검신(劍神)이다.
검신이란 검술에 완전 통달한, 말 그대로 검의 신이란 얘기다.
검신이란 아무에게나 붙는 호칭이 아닌, 정말이지 세상에 적수가 없을 정도의 최고의 1인에게 부여되는 너무도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명칭이다.
하지만 요즘 그런 그는 참 우울하다.
고독하다는 표현이 맞을까.
뛰어나도 적당히 뛰어나야지. 적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뛰어나면 말 그대로 이 세계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야 할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제길… 아무도 나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검신이라 예우받으며 존망의 눈빛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자체마저 이제는 딱딱하고 형식적인 인사치레일 뿐.
나와 함께 검을 논하고 통 크게 세상을 논하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한때 적이 되어 나에게 무릎을 꿇었거나 목숨을 잃었기에 남은 자들이 거의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를 오로지 추앙하는 자들만이 곁에 있을 뿐.
그저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나에 대한 무용담을 실컷 떠들다가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서 그 어떤 뒷얘기를 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는 크나큰 산맥과도 같이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외롭다.
한때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나름 어울림을 위해 노력도 꽤 해 보았다.
처음에는 그런 달라진 그에게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검신도 인간다운 면이 있네! 없네! 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무튼 잠시 즐거웠다.
드디어 나는 고독의 벽이 허물어지겠구나, 하고 좋아했지만 전혀 아니올시다.
이번엔 내가 그들로부터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애초부터 마음의 벽은 그들이 닫은 게 아니라 내가 닫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고, 나만이 검신이란 타이틀에 메여 내 안에 스스로 가두고는 거만과 자만심으로 위장한 고독을 즐겨 왔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과연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가 뭔지 몰랐다.
강자의 권리는 꽤 달콤하고 매혹적일 줄 알았건만 양날의 검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내게 삶을 포기하라고 꼬드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쨌든 그랬다.
기분 전환할 겸 이렇게 여행에 왔지만…….
마차 승객 중 젊은 청년들은 그녀보다도 오히려 내게 관심이 많았다.
긴 은발에 가려진, 보랏빛의 그윽한 눈동자를 지닌.
여자보다 더 예쁜 나의 외모에 눈짓을 주는가 하면, 뭐라 숙덕거리다가 괜히 안 보는 척 흘끔거리며 내 발밑부터 머리끝까지 아마도 수십 번은 살피는 거, 다 알고 있다.
그런 시선들이 이제는 면역이 되었다지만…….
‘징그러운 것들.’
찬란한 태양이 비추는 뜨거운 낮에 어느 이름 모를 별장 앞에 그녀가 마차로부터 내려서 짐을 들고 낑낑대며 올라갈 때의 섭섭한 심정에는 형언할 수 없는 흥취가 있다.
‘정말이지…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나는 마부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다가가서 이름 모를 시골 아가씨의 짐을 들어 주었다.
“도와주시게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에 그녀의 자태는 그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일까. 단 한마디의 대화에 여자 친구가 영원한 안녕을 고할 때마냥, 내 눈 속에는 이미 그 어떤 감동과 미련이 공존하고 있었다.
시인도 이렇게까지 감동을 주는 글귀를 즉흥적으로 떠올리지 못할 거다.
나는 그냥 자기 스스로 감탄할 지경이다.
그렇게 나를 시인 뺨따귀를 때릴 정도로 감성 어리게 만들어 준 저 시골 아가씨는 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 건지…….
곧이어 마부가 빨리 올라타라고 성화가 시작되었지만 이곳 울타리에 빼곡히 자라 있는 초여름 풀잎들에 그저 몸을 묻히고 싶었다.
“아가씨, 뭐 하쇼! 갈 길이 바쁩니다.”
“나 아가씨 아니거든요!”
“아님 말구! 아무튼 꾸물거리지 말고!”
“알았다고요! 타면 되잖아요! 아씨.”
“빌어먹을!”
마부도 나를 여자로 취급했다.
결국 나는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는 마차에 다시 올라탔다.
나는 다시 창가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막 울타리 대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아가씨가 마치 꿈을 꾸듯 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마차가 덜커덩거리며 심하게 흔들리자 앞에 앉은 할머니는 깜짝 놀라 자기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나는 아쉬움에 또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별장과 점점 멀어져 감으로써 애틋한 기억은 벌써 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에 손짓했다.
그때였다. 별장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오는 그녀. 손을 흔들며 뭐라 외치는 것 같았다.
‘뭐지?’
먼 거리 때문에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마부는 그저 오솔길 전방으로 마차를 몰고 있었다.
털커덕! 털커덕!
순식간에 모퉁이를 돌아섰고, 여인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이러지도 저러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무엇을 말하려던 것일까?
마차가 내리막길로 향할 때 결국 나는 마부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뭐요?”
“당장 세워 주세요.”
“뭣 때문에 그러쇼!”
“내리게요!”
“아참, 그 아가씨 정말. 사람 성가시게 하네.”
“나 여자 아니라니까요!”
“아까 진즉 내릴 것이지! 짜증 나게시리! 항상 여자들이 말썽이라니까! 내 마누라도 그렇고!”
“나 남자라고요!”
“됐고! 빨리 내려요!”
마부는 마지못해 마차를 세웠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과 함께 마차로부터 훌쩍 뛰어내렸다.
그 즉시 마차는 매정하게도 먼지를 풀풀 날리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물론 나의 관심사는 반대편 쪽 모퉁이를 다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내 선택이 잘한 건지, 못한 건지는 몰랐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데.’
한 손에는 빛바랜 갈색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양산을 펼치고 뜨거운 뙤약볕을 가렸다.
오솔길 사이로 간간이 드리워지는 빛줄기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마치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의 문턱에 다다른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그녀의 손짓과 알 수 없는 외침에 무작정 하차했지만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어찌해야 할까……. 머릿속이 바빠졌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 물어봤지만 답이 없었다.
‘이상하군. 나답지 않은 짓인데. 내가 왜?’
듬성듬성 보이는 마을 몇 개가 구릉지 아래에 보였고, 그 윗길로 별장의 전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울타리 끝, 작고 아담한 바위에 앉아 있는 여인, 그녀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멈칫거렸지만 일단 가까이 가서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경은 그녀의 표정에 온전히 집중되었다. 그저 반응을 살펴보고픈 심정이 왜 이리도 떨릴까.
‘나를 괜히 찝쩍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어떡하지.’
곧이어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 역시 양산을 받쳐 들고 있어 얼굴이 그림자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 절로 기뻤다.
조금 더 다가가자 그녀 역시 이리로 향했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지만 다가서는 발걸음들은 매우 경쾌해 보였다.
마치 오랜 교우를 만난 것 같은 이 신기한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지 몰랐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조금은 걱정스러워 보였다.
“저는 남자분이 필요한데…….”
역시나, 젠장.
“저 남자입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요.”
순간 그녀는 의외라는 듯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설마…….”
“잘 보세요. 남자 맞지요.”
‘나참, 성별도 매번 이렇게 확인시켜야 하는 내 인생 참 가련하도다.’
“남자분이시라고요?”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깔고 최대한 점잖게 대답했다.
“그렇소.”
그래도 미성이 섞인 소년의 음성과 가까웠다.
푸르른 하늘, 청색의 기와로 치장된 별장 위로는 뭉게구름이 절묘하게 걸려 있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 몇 줄기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젖어 스며든 땀을 시원히 식혀 주었다.
‘와, 여기 풍경 진짜 여기 죽인다. 당장 코 박도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
도시에서 태어나도 자란 그에게 있어서 오지의 시골 풍경은 항상 새롭기만 했다.
그녀의 부탁이라는 것은 안채 현관에 잠겨진 자물쇠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시내 여관에서 그만 열쇠를 빠트리고 왔기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하루에 단 한 번 운행되는 마차를 타고 되돌아가려면 이곳 야외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기에 급히 소리쳐 도움을 요청했다.
“열쇠 없이는 곤란하겠군요.”
“어차피 그런 기대는 하지도 않았어요. 수년 만에 왔더니 잠가 놓은 자물쇠가 녹이 많이 슬었어요. 쇠뭉치 같은 걸로 치면 떼어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시다면…….”
잡초들이 무성히 자란 앞마당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