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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얻은 레어템, 현실에는 역대급-104화 (104/143)

104화

어떻게 이럴 수가, 아무리 상상력이지만 무려 5단계까지 끌어 올렸지만 금속으로 이루어진 손아귀로부터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소녀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가지고 이리저리 흔들며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어디 한번 빠져나올 수 있다면 빠져나오라는 식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이지 창피한 순간이었다.

내 군장은 용암에서 막 나온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의도는 화염으로 이 금속 손아귀를 녹인다는 발상이었다. 그나마 그 방법은 통했던가. 소녀가 형상한 거대한 손이 녹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힘을 쏟았고, 이내 화산이 분출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으며 나를 움켜쥔 금속 손아귀는 빠르게 녹아 흘렀다. 그리고 당황해하는 소녀의 모습.

“아, 이제 됐다.”

겨우 빠져나와 지면에 안착했다. 하지만 천계 군장 5단계의 힘까지 뱉어 내어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때 들려오는 심판의 목소리.

“이형도. 방어 수치 100, 레벨 10으로 향상!”

“…….”

참으로 기가 막혔다. 마왕의 권능 5단계까지 사용하고도 겨우 이 모양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지면으로부터 빙벽이 솟구쳐 오르더니 나를 덮치자마자 얼려 버린 것이다.

쩍!

또다시 갇히고만 신세. 이제는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아니, 또다시 단계를 끌어 올린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의 전투를 진행하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애초 상대의 상상력에 내 기술로 대항하는 것은 무리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심판의 외침.

“아레나 승!”

순간 관중의 함성이 들려왔다.

와와.

소녀를 응원하는 열띤 환호,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얼음 속에 갇히고만 초라한 신세.

[레벨 10]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그때 야록이 다가와서 말했다.

“형도야, 너무 실망하지 마. 상상 결투장은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결투일 뿐.”

“…….”

나는 별로 말하기 싫었고,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야록에 내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재미있는 사실 알려 줄까? 조금 전 너와 맞붙은 여자아이, 아레나 말이지. 진짜 현실에서도 그 모습이고 전투력도 상상이 아니라 실제 전투 능력, 기술 등 다 똑같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실제랑 똑같다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도박 예상 순위가 9위라는 사실. 나보다 한 단계 위이지, 크크.”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고, 야록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시무룩하지 마라. 어차피 한 달 후에 다가올 살상 게임은 상상력이 아닌 공력과 병기의 싸움이 될 테니까.”

“병기?”

“그렇지. 싸울 때는 누구나 병기가 있어야 하지. 하지만 서열 상위부터는 그런 무기 방식이 아닌 진정한 공력이지.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신들의 전쟁이 될 테니까.”

“신들의 전쟁?”

“어때, 거창하게 들리지. 하지만 그조차 너무 걱정하지 마라. 지금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나 역시 신이라면 신이니까.”

“신…….”

그러고 보니 야록은 조홀 은하계 창조신의 아들. 그럼 신이 분명한데, 나는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대하고 있었던가. 이제야 그걸 느끼다니…….

* * *

늙은 잡신(雜神) 데라트는 환생 주관자의 잔소리가 지루한지 주변을 들러 보며 딴청을 피웠다.

“신들도 인간처럼 게임을 즐기고, 인간이 가상현실 안에서 게임을 한다면 그들은 실제 세상을 창조하고 즐기죠. 인간이 게임에서 캐릭을 만들 듯 그들은 대신 지상에 피조물들을 탄생시키며 인간이 캐릭을 성장시키고 대리만족을 얻는다면 신은 피조물들이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에 기쁨을 느낍니다.”

“…….”

“여기까지는 뭐, 다들 아시는 얘기일 테지만 만약 그들 역시 피조물이 아닌 본인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게임 리그가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무척 놀라시겠죠.”

게임 리그라는 말에 잡신 데라트의 귀가 솔깃했다.

“게임 리그라니요. 설마 그런 게 있으려고. 신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유치한 짓을.”

주관자는 오히려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이 무작정 심오하고 완벽하다는 편견은 버리시지요. 바로 그 게임은 일종의 불완전한, 혹은 그 반대로 권능을 남용한 호전적 신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회생(回生)의 장이니까요.”

데라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회생이라니요! 내 아무리 보잘것없는 하계의 잡신이라고 농 함부로 하는 거 아니외다.”

“허어라, 이보시오. 아무리 잡신이라도 신은 신일 텐데 정보가 그리 어두워서야. 내 그럼 지난번 도움받은 것도 있고 하니 조금 알려 드리리다. 내 쪽으로 귀를 가까이 대 보시오.”

데라트는 일단 백발로 치렁거리는 머리를 내밀었다. 이어 들려오는 속삭임.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신이 권능을 과시하는 것과 같고, 인간이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신이 인간의 육신으로 살아간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바로 내가 하는 일이 그런 신들의 환생을 담당하는 것이지요. 아주 은밀한 기밀에 속하기도 하고……. 어쨌든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 외로움이라면 신은 잊히는 것인데 그런 신들이 의외로 꽤 많소이다. 바로 그런 신들이 마지못해 각 환생 장소로 나누어진 지상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거죠.”

데라트의 호기심은 점점 증폭되었고, 다시 귀를 갔다 대었다.

“계속해 보시오.”

“그들 중에서 제일 가련하고 동정이 가는 신이 누군지 아오?

“나야 당연히 모르는 일이지요.”

“그는 이제 아예 인간으로서조차 잊혀 가는 밑바닥 신세가 되었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가 한때 광기(狂氣)의 차원 통치 신이었다는 사실이오.”

순간 데라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엣! 이자가 나를 어떻게 보고!”

“믿기지 않겠지만 바로 내가 환생을 담당했으니……. 아직도 그 일만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손이 다 떨립니다. 어찌나 긴장됐는지…….”

“그런 분이 어떻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오. 그건 말도 안 되오. 아니, 상상조차 가지 않구려.”

담당자는 금세 표정을 싹 바꾸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만 가 보시오! 업무가 많이 쌓여서 더는 시간을 내어 드릴 수 없소이다!”

그런데 데라트는 전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품 안으로부터 두둑한 금빛 주머니를 건넸다.

담당자는 겉으로는 난처한 표정이었지만 손은 어느새 주머니 잽싸게 받아 챙겼다.

“에이고~ 이게 마지막이요. 그나저나 하계 영혼들을 중간계로 끌어 올린들 더 깊은 하계로 전락하건만 뭣 하러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아무튼 성의는 고맙소이다. 그럼.”

그러자 데라트가 그의 손목을 꽉 움켜잡고는 매우 진지한, 아니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그 일은 나도 이미 접은 상태이고… 그걸 드린 건 환생 장소를 알려 달라는 거요.”

“환생 장소라니요. 누구 말이오?”

데라트는 입술에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잠시 심호흡하고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과, 광기의 차원 통치자이신 메, 메카론……. 그, 그분의 환생 장소…….”

담당자 역시 할 말을 잊은 듯 중얼거렸다.

“메카론 님……?”

잠시 후

담당자는 겨우 안정을 취하고 데라트에게 말문을 열었다.

“그분의 환생 장소는 베가드 행성이라는 곳입니다.”

“베가드 행성?”

“안드로메다 성운에 속해 있고 은하 연합 본부가 있는 곳이죠.”

“현재 메카론 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 중이오?”

“흠, 여기 수정 구슬을 보니……. 호텔의 어느 룸에 있습니다. 거기서 메카론 님은 혼자 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 중인 것 같은데요.”

“무슨 생각이오?”

“자신의 힘을 깨닫는 각성의 완성 단계를 막 끝마치는 중입니다.”

“오! 메카론 님. 어쩌다 인간계에 환생하셔서.”

【 기드 】

플린시아…….

아! 플린시아…….

보고 싶다. 너무도…….

나는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곳 베가드 행성에도 지구와 같은 선술집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술 집안에는 손님들로 가득했고, 대부분 살상 게임이 참가하는 지원자들로 보였는데 그들 또한 긴장된 마음을 술로 푸는 것 같았다.

야록은 피곤하다며 먼저 호텔로 가 버렸고, 나는 혼자서 늦은 밤까지 이렇게 술 여섯 병을 비워 놓고 시름 중에 있었다. 그리움 병이랄까. 플린시아에 대한 애틋함, 그건 외로움일 수도 있었다.

하기야 내가 지구를 떠난 뒤 늘 이랬다. 나를 스쳐 간 많은 사람, 그들은 한때 매우 친한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방인으로서 지금 내 옆에 없는 존재. 그리고 나는 여전히 홀로 고독을 씹고 있었다.

나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따라 내 주량의 몇 배는 넘을 만큼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신 상태이다.

“아, 취한다.”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결국 술에 지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플린시아, 미안해. 결국 또 너를 떠나게 되었어. 젠장,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애초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건만. 그따위 초시공 전사가 뭐라고! 빌어먹을! 지금이라 다시 너에게 돌아가면 안 될까?”

그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건네왔다.

“돌아갈 여자분이라도 있는 것에 그저 한없이 부러울 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살폈다.

“누구시죠?”

그러자 청년은 환한 웃음으로 말했다.

“하하, 이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하고 싶은데요.”

“네?”

“혼자서 말씀하시는 내용, 옆에서 다 들었습니다. 저 역시 술로 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에게 호감이 가서요.”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요. 나는 이형도입니다.”

“아! 네. 저는 기드입니다.”

“기드…….”

“초시공 전사 테스트 지원자이죠. 물론 당신도.”

“네.”

기드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소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부럽습니다.”

“부럽다니요.”

“그리워서 돌아갈 여자분이 계신다는 거요. 저는 돌아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거든요.”

“못하다니요?”

“그녀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다소 미안한 듯 말했다.

“아, 그래요.”

“그녀는 내게 사랑을 주고 이곳 베가드 행성으로 데려오자마자 며칠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디 출신입니까?”

“저는 과거 사람입니다.”

“과거?”

“네, 그녀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 중에 나를 만났고 결국 이 미래로 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나를 이 삭막한 곳에 데려와 놓고 먼저 죽다니. 참으로 무책임한 여자죠.”

“그거 듣고 보니 참 안 됐군요.”

“그러게요. 정작 외롭고 이 순간을 견디기 힘든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이형도 님은 그래도 언제든지 원한다면 만날 수 있는 애인이라도 있잖습니까. 아무튼 제가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이민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너무 과음하지 마시고요.”

나는 그에게 물었다.

“기드라 했죠.”

“네, 기드. 이번 살상 게임에 참가하면 당신을 보게 될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반가웠습니다.”

“나도 반가웠습니다.”

“그럼 이만.”

초시공 전사 테스트 지원자 800명 중에 도박 예상 순위 800위…….

기드는 자신이 이번 테스트에 800위의 꼴찌라는 사실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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