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네가 레벨이 8인데 내가 30이나 된다고?”
야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반인 야수라서 그런지 인간만큼 상상력은 덜하지. 처음에 내가 이 상상 전투장에서 들어섰고, 대결할 때 정말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그래도 헬존에서 전투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과 수도 없는 기술을 지녔단 말이야. 그런데 상상력은 별로라 그런지 상대에게 그만 쉽게 패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아무나 지원할 수 있다 그랬지?”
“그래.”
“그럼 레벨 50과 붙여 줘 봐.”
“…50. 그건 조금 높은데…….”
야록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 무리일 텐데. 그냥 30레벨을 상대하지.”
갑자기 객기가 났다.
“어차피 상상 전투, 뭐 걱정할 거 있어?”
“흠, 정 원한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전혀 쉽지 않을걸. 50 정도라도 상상 전투력 수치와 경험치가 어마어마한 거라고.”
“말이 많군.”
야록은 내 결투를 위한 등록 신청하러 중앙 관리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쳇, 상상이고 뭐고 필요 없어. 그저 내가 경험한 현재 그대로의 본모습을 보여 주면 되니까.’
내가 먼저 경기장에 들어섰다. 관중들은 반응은 잠잠했다. 심판 진행자의 레벨 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 레벨에 1에 불과한 내가 50레벨과 대적한다는 사전 알림에 어이가 없다는 그런 분위기인 것 같았다.
이곳 결투 규칙은 레벨 등급에 상관없이 그 누구나 원하면 고레벨과도 대결이 가능한 것이다. 곧이어 나와 맞붙게 될 50레벨이 경기장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들려오는 함성.
와와.
나는 상대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작해야 열두 살 정도에 지나지 않은 여리고 여린 소녀. 마치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가녀린 여자아이가 아무런 장비나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관중의 응원 소리!
“또 나왔어, 아레나! 귀여운 마법사.”
“하하, 오랜만에 보는군.”
“아레나! 아레나!”
그 열기를 보니 그녀는 이곳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약한 인간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애랑 싸우라는 얘기인가? 이것 참.’
나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관중석에 앉아 있는 야록에게 시선이 갔다. 그의 눈길을 보니 매우 긴장한 것 같았다. 그 의미는 아마도 상대가 여자아이니까 봐 달라는 그런 의미가 아닌가 했다. 그러나 곧 전음으로 들려오는 야록의 생각.
- 형도야,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냐. 상대는 레벨 50이라고요. 그것도 마법 계열로써 상상 수치가 거의 300에 이른다고요.
결국 방심하지 말라는 얘기인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상상 결투, 과연 이 대결에서 내 상상 능력을 얼마만큼을 보여 줘야 할지 고민이 들었다. 일단 야록의 말대로 조금은 긴장의 끈을 가지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렇다면.”
착! 착!
상상이 아닌 내 진정한 모습을 알릴 수 있는 천계 군장부터 불러오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이내 두툼한 볼륨의 천계 군장이 내 몸을 감쌌다. 각종 보호대 역시 옵션으로 자동적으로 여기저기 돌출이 되었으며 이내 멋들어진 마왕의 무장이 갖추어졌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흠, 다음 상상력은 무엇으로 해야 하나…….’
결국 내가 아는 상상력의 안에서 일단 신체 강화 결계에 이른 방어막, 그리고 모형 방패, 총, 3중 방어 체계에 검과 방패에 마법을 걸어 두는 것이 바로 메르메르 2단계 천계 군장이었다.
착! 착! 착! 착!
이어 들려오는 심판의 말.
“알다시피 이 시합은 상상 결투로써 자신의 원하는 생각대로 그 모든 공격과 방어가 실현될 것이오. 그대들은 가상의 로그인을 했으니 시합 결과에 따라 부상이나 소멸은 없을 것이오. 다만 승리할 때 경험치가 오를 것이고, 패할 경우 그 수치는 내려갈 것이오. 새로운 상상 전투의 기술을 선보인다면 상상 수치가 자동으로 올라갈 것이오. 경험치는 두 배로 상승하니 다음 시합 때 그런 합산 점수가 반영이 됨을 미리 알려 드리면서 시합을 시작하겠소.”
다시 뜨거운 함성이 들려왔다.
와와.
“아레나, 이번엔 무슨 기발한 상상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줄 건데.”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멋진 기술을 보여 달라고.”
관중들의 관심은 저 소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드디어 시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이내 전투 자세로 돌입했다. 그런데 소녀는 그저 원피스 차림의 치맛자락을 날리며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검과 방패를 꽉 움켜쥐고는 한발 한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정말이지 귀엽고 깜찍한 소녀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이것 참…….’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 이런 경우는 처음 접해 보는 것이기에 내심 당황스럽고 어찌할 줄 몰랐다. 상상 결투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나로서 내 레벨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가늠이 가지 않는 상태에서 공격의 강도를 어느 정도 두어야 할지 그것부터 혼란스럽기 시작했으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들려오는 야록의 전음.
- 형도야, 최선을 다해야 해. 무조건.
최선을 다하라……. 결국 공격을 감행하라 그런 얘기인가. 하기야 이곳은 가상의 세상이니 내가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저 소녀를 해한다 해도 상관없는 일, 나는 다시 결심을 굳히고 그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이얏!”
타다닥.
그때 소녀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만 손가락으로 경기장 지면을 꼭 집어 누르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내 뒤쪽으로부터 굉음이 들려왔다.
우두둑.
팍! 팍!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집채만 한 돌기둥이 형성되면서 이내 거대한 손 모양으로 변했고, 나를 덮쳐 오는 것이 아닌가. 워낙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라서 그 살아 움직이는 손아귀에 내 몸을 잡히고 말았다.
쿡!
“욱!”
엄청난 압력이 전해 줘 왔다. 점점 쥐어 오는 거인의 돌 손. 천계 군장의 3중 방어 체계에도 불구하고 금속의 보호대들이 거의 찌그러질 것 같은 강한 힘이었다. 나는 장력을 이용해 내 신체를 부풀리기로 했다.
“이얏!”
쾅!
순간 폭발음이 들리면서 돌 손이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허공으로부터 겨우 지면에 안착할 수가 있었다. 그때 들려오는 심판의 외침.
“이형도 선수. 방어 수치 50, 레벨 2로 향상!”
“…….”
시합 중에 점수제가 적용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들려오는 함성.
이번엔 나를 위한 응원 같았다.
“와! 레벨 1짜리가 50레벨의 공격을 무산시켰잖아. 이건 말도 안 돼!”
“아레나의 돌 손 공격이 저렇게 쉽게 박살 날 줄이야!”
그러나 그들의 말소리는 그저 벌이 웅! 웅! 하는 것처럼 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여린 소녀로만 보았던 저 인간 아이의 상상 공격에 대한 놀라움이 내 심장을 떨리게 만들 뿐.
‘이런 것이 상상 결투였단 말인가.’
이제야 실감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인가, 이번엔 내가 먼저 선제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기술보다는 검 끝에 마법의 기를 모아 원거리 공격을 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파팟!
섬광이 뻗어 나갔고 곧이어 소녀의 몸을 덮쳤다.
쾅!
소녀는 바로 앞에 두툼한 방어막으로 내 공격을 무산시켰지만 그 충격이 강도가 제법 셌고, 그 충격으로 뒤로 자빠졌다. 또다시 들려오는 심판의 음성.
“이형도 선수. 공격 수치 100, 레벨 5로 향상!”
소녀 역시 당황스런 기색이었다. 명색이 50레벨인 그 자신이 설마하니 레벨 1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상상이 아닌 실재 전투력으로 싸우는 중이었다. 어쨌든 야록의 말이 백번 옳았다.
절대 방심은 금물이라고.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나는 다시 상상력으로 천계 군장 제2 단계에서 제3 단계인 토스가를 끌어 올렸다. 토스가의 뜻은 천계 고어로서 ‘정령의 힘’을 의미한다. 설마하니 내가 전에 물리쳤던 적의 그 권능의 기술을 상상으로 사용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착! 착!
내 군장은 새로운 변형으로 탈바꿈했다. 소녀 역시 그런 모습에 조금은 의아해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상대로 1레벨에서 단 한 번에 5레벨로 끌어 올린 나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관중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으리라.
“도대체 저 선수, 정체가 뭐야.”
“어떻게 1레벨에서 갑자기 5레벨로 오를 수가 있는 거지.”
“그것도 단 한 번의 방어와 한 번의 공격으로 방어 수치와 공격 수치를 각각 50 이상씩 끌어올렸잖아. 그건 초보자로서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닌데.”
그것보다도 50레벨을 상대로 아직도 버티고 있다는 것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지.”
“그나저나 저 선수의 군장 차림이 갑자기 다른 형태로 변해 버렸어.”
“와, 인제 보니 숨은 고수인 것 같은데. 상상력이 장난이 아닌 것 같아.”
그때 소녀는 허공에 원을 그려 하나의 스태프를 형성했다. 그때 들려오는 야록의 전음.
- 지금부터 진짜 조심해야 해. 본격적인 상상 전투가 시작될 테니까.
나 역시 바짝 긴장했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현재 내 천계 군장은 토스가 3단계 정령 체제로 돌입했으니 말이다.
총 9단계로 나누어진 상상력의 기술 3분의 1에 해당하는 힘을 내세우게 되었으니 솔직히 나로서 체면이 구겨져도 한참 구겨지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적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그 힘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때 소녀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나 역시 내 군장과 검에 스며든 정령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강력한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순식간에 맹수의 형체로 바뀌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 역시 정령을 뿜어내며 맞섰다. 그 둘이 뒤엉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맹수는 사자와 같은 형상이었지만 길게 드러난 송곳니에 거대한 몸체를 봐서 소녀가 상상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존재 같았다. 하지만 내가 불러온 정령은 흑색 군장의 전사 차림, 언제나 내 분신처럼 대신 앞장서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오늘은 가상의 적을 상대로 그 역시 힘을 쏟아야 했다. 상대의 맹수 역시 실체가 아닌 허상, 그러나 그 위력은 엄청났다. 정령 전사는 방패로 무시무시한 이빨을 막으며 검을 휘둘렀지만 대부분 빈 허공을 관통할 뿐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못했다.
‘토스가 3단계마저 밀리려나.’
내심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소녀가 손을 한번 가볍게 허공으로 젓자 맹수가 변형을 일으켜 또 다른 생명체로 탈바꿈하는 것이 아닌가. 그건 흡사 용과도 같았다.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정령 전사를 집어삼켰다.
우걱우걱.
우악하게 씹는 소리와 함께 주둥아리로부터 엿가락처럼 늘어진 정령이 뱉어져 나왔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토스가도 소용없다면 나는 천계 군장 제4단계를 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미처 그러기도 전에 뒤쪽 지면으로부터 하나의 융기가 일어났고, 아까처럼 거대한 손 모양이 나를 꽉 쥐었다.
“욱!”
아까는 돌이었지만 지금은 금속 재질, 그 힘은 더욱 강력했고 도저히 빠져나올 구멍이 없었다. 즉시 4단계 변형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그것마저 박살이 날 정도로 압력은 세게 들어왔다. 그렇다면 5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