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 *
켈크 종족 대장 데몬은 공터에 피로 낭자한 시체 두 구를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전사들이 다소 불안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숙부 볼드락이 데몬의 곁으로 다가와서 말문을 열었다.
“야수 인간들의 시신 같은데…….”
데몬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숙부에게 말했다.
“숙부님, 아무래도 다시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숙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야. 날이 어두워지니 일단은 더 이상 깊숙이 들어가지 말고 일단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에 그때 가서 결정함세나.”
데몬은 시신을 다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이들을 죽였지…….”
“내가 뭐라 했나. 그 여자는 생긴 것 답지 않게 그저 보통 년이 아니라는 것을.”
데몬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차피 왔던 길이 매우 험한 산악 지형인지라 날이 어두워진 상태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숙부 말대로 여기서 날을 새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이 야수 인간들의 죽음이 자칫 자신들의 일로 여겨져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오늘 밤 그 누구도 잠이 들어서는 안 된다. 모두 불침번을 서되, 정 피곤을 참지 못하는 자는 교대로 한 사람씩 눈을 붙이도록 한다.”
데몬의 머릿속은 꽤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애초 이곳 절대 금지 구역에 들어선 자체가 꺼림칙했고, 게다가 하필 이곳 경계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야수 인간들의 시신을 발견하다니…….
‘설마, 그 금발 머리 여자가…….’
* * *
달빛마저 안개에 가려 꺼져 가는 불씨를 보는 듯했다. 소나무들이 솔방울을 터트리듯 진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칠흑같이 까만 밤이었지만 아마도 울창한 산속의 소나무 송진이 발산하는 냄새와 그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일대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저만치 어디론가 서둘러 가는 늑대 인간 무리, 그들은 본능적으로 냄새에 매우 민감할 텐데 플린시아가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음을 전혀 눈치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바람이 역방향으로 거세게 불어왔고, 인근 숲의 유난히도 짙은 솔 향기 때문이 아닌가 보였다.
기괴한 수풀들, 큰 나무의 머리 부분 잎사귀의 가벼운 그림자에 덮인 밑동 부근에 보기에도 흉한 잡목들이 촘촘히 자라고 있었다.
엷은 녹색의 얼룩점이 가지 끝에 피어나 있었다. 나머지는 해괴한 모양의 가지를 드러냈고, 바위마저 대부분 흑색의 이끼들로 덮여 있었으니 이곳 야수들의 영역은 마치 태곳적 그 어느 원시림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플린시아는 머릿속 안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궤적을 그리며 수도 없이 교차점을 지나고 있었다. 저들의 영역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한 두려운 존재 때문이었다.
[야록]
야록에 대해 그녀가 아는 것은 공주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한때 에스타란토 종족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초자연적인 힘의 실체. 그가 정령의 구역에 침입하여 그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냈을 때 그들조차 감히 어쩔 수 있는 신력을 뿜어냈다고 말했다.
그 형상은 고대 마귀의 모습과 비슷하고 희귀하니 근래에 오면서 인간들은 그를 악마의 잉태로 태어난 괴물이라 정의를 내렸다.
그 모습은 붉은색 피부에 날개가 있고 입을 크게 벌리고, 두발은 위로 서고 산발한 모습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공주는 그 실제 정체가 짐승의 몸이고 산양의 뿔과 갈라진 발톱과 박쥐의 날개를 가진 것으로 묘사를 하였다.
헬존에서 그 누구도 그와는 직접 전투를 치른 적은 없지만 일반 개념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상상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한다.
플린시아는 지금도 실제로 야록이 그런 무시무시한 실체라는 것을 미리 앞서 실감할 정도로 이 기이한 숲 자체로부터 뭔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얼마 후.
늑대 인간들이 숲을 지나 그 아래 구릉지로 향했다. 플린시아는 캄캄한 밤이 어슴푸레한 새벽녘처럼 환해지며 눈앞에 사물들이 모두 보인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마치 결계가 풀리고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선 듯한, 이 신비한 광경에 말이다.
절대 금지 구역이란 이 영토는 오히려 에스타란토 종족들의 오감을 자극해서 마치 들어오라는 강한 유혹이 깃들여 있는 세상이 아닌가 할 정도로 아름답고, 장엄했다.
뾰족하고 기이한 모습의 봉우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솟아 있는 거대한 산은 북반구다운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커다란 산들의 비탈에는 하얀 벽을 가진 수많은 동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파묻혀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는 그 밝은 동굴 입구들은 산봉우리에서 아래까지 점점이 흩어져 있어 마치 짙은 초록색에 여기저기 눈밭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풍경 전체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몽롱함이 더해져 마치 동화 속의 세상을 접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늑대 인간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는 그 아래 냇가에서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빠른 물살.
계곡 저 멀리 지는 석양, 나뭇잎과 수면에 피는 따스한 햇볕.
저들이 그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니 플린시아 역시 뒤쪽 바위 뒤에 숨어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그 누굴 습격하는 마당에서조차 냇가에 들어가 그 흉측한 털북숭이 손으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첨벙!
홱!
“잡았다.”
저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타타르라는 늑대 인간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거사를 앞두고 있지만 배부터 채워야 하는 것이 순서겠지.”
플린시아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왠지 저 냇가가 그 자신이 어렸을 때 오빠들하고, 고기를 잡던 그곳과 너무나 닮았다.
그러고는 자기 모르게 옛 향취에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타타르는 다른 늑대 인간들에 비해 유난히 몸집이 컸다. 보통 갈색의 우중충한 털과는 달리 짙은 회색 털을 지녔고, 옆으로 쫙 짙어진 눈매로부터 붉은 안광이 강하게 빛이 났다.
얼핏 봐도 매우 사나워 보이는 그가 나머지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수하들에게 말했다.
“각자 준비한 단도를 꺼내도록.”
그 음성은 지극히 차분했고, 냉정함이 서린 것이 비장하기까지 해 보였다.
“이번 일이 여우 종족 몇 마리를 해치는 것으로, 뭐 굳이 거사랄 것까지는 없지만 차후 우리 늑대 인간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이니 각자 사명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내 말은 절대 실수가 없이 깨끗하게 제거하자는 것이다.”
그의 말에 다른 늑대 인간들이 각자 준비해 온 단도를 꺼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단검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인간 놈들이 저지른 일처럼 꾸며야 하니까. 지난 10년 동안 외부에서는 이곳을 절대 금지 구역이라 정해 놓고 에스타란토 종족이 스스로 발길조차 들여놓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본능을 억제하며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삶을 이어 왔다.”
“…….”
“우리는 전투를 위해 태어난 종족이건만 야록께서는 그 모든 습성을 버리라 했고, 앞으로도 허수아비처럼 후대들 역시 이 작은 영토에서 갇혀 지내야만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자! 우리의 거사로 수백에 달하는 동료들이 일시에 자유를 갈망하며 행동을 개시할 테니 그대들은 각자 위대한 사명감을 가지기를 바란다.”
타타르는 마치 전장으로 향하기 직전, 장군이 부하들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비장하고도 나름대로 명분 있는 말로 그들을 독려했다.
타타르의 눈짓으로 무리가 동굴 안쪽으로 이동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홱!
퍽!
“컥!”
맨 앞의 늑대 인간이 뭔가에 강하게 타격당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허벅지 쪽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으으으.”
이에 타타르와 동료들이 뭔 일인가, 하고 그에게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뭐야!”
타타르가 묻자 부상당한 수하가 외쳤다.
“뭔가가 날아와서 허벅지를…….”
타타르는 냅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인기척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의 눈에 띄는 것이 수하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지?”
바로 그 순간 허공을 가로지르는 강한 파공음과 둔탁한 음과 함께 옆에 있던 수하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쉑!
퍽!
“아악!”
그는 왼쪽 팔을 부여잡고 몹시도 아파했다.
워낙 털로 덮인 두툼한 외피 덕분에 골절상은 입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충격이 결코 만만치가 않은 듯싶었다.
타타르가 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자넨 또 뭔가!”
“뭔가가 날아와서 제 팔을! 우욱.”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돌멩이 하나.
타타르는 그것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누군가가 필시 자신들을 노린다는 생각에 인상이 확 굳어지고 말았다.
“어, 어떤 놈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그 어떤 존재도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이내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무리 늑대 인간의 수장이고 그에 걸맞은 배짱이 두둑하다지만 중요한 거사를 앞둔 시점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을 당하니 이만저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돌팔매질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앞쪽 동굴 외에는 주변이 확 트인 공간인데 만일 돌을 던졌다면 그 실체가 보여야지 정상인 것이다.
하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흔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이한 공격.
파팟.
팍!
“아악!”
이번엔 타타르 그 자신이 등 쪽에 뭔가를 맞고 비틀거렸다.
그 충격이 적지 않은지라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억지로 참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다시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욱, 빌어먹을! 돌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온 거지!”
그때 수하 한 명이 뒤쪽을 가리키며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방향에서…….”
타타르는 순간 그쪽으로 시선을 둘렸다.
하지만 거긴 모래사장으로 이어진 숲 건너편이건만.
그 거리가 워낙 먼지라 누군가 돌을 던져 여기까지 날아온다는 개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거야말로 아주 환장할 일이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상상조차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타타르는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또다시 울려 퍼지는 파공음.
쉐에엑!
퍽!
“아악!”
이번엔 오른편에 있던 수하 한 명이 가슴에 돌을 맞고 그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다른 부상자들처럼 신음을 흘렸다.
“어어억.”
이미 돌 공격을 받는 자들만 절반에 가까웠다.
비록 그 충격이 강하다 하지만 늑대 인간으로서 두툼한 털 외피와 근육, 그리고 엄청난 근골 덕분에 골절당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 무리를 이끄는 타타르는 당장 상황을 파악하고 하고 거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하 중 한 명이 그에게 물었다.
“일단은 철수부터 하시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타타르는 몹시도 분개했다.
“젠장, 인간이 10년 만에 이 영토를 침범했는데 하늘이 준 기회를 여기서 날려 먹자고!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이번에도 돌멩이 하나가 방금 전 말했던 자의 어깨 부분을 강하게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