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녀는 난감했다.
결국 외길에서 접전을 벌여야만 하는지……. 어쨌든 싸움은 저들이 먼저 걸어왔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공격이 들어왔다. 그녀는 같은 방법으로 상체를 틀어 피했을 뿐 아직까지 단검 공격은 하지 않았다. 상대에게 조금의 부상을 입힐지라도 그건 추락사를 시킬 만한 치명타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진해 들어온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홱! 홱!
“이년이! 정말! 사람 성질나게 만드네!”
플린시아는 뒷걸음질 칠 때마다 길이 좁아지니 더 이상의 상체 비틂 동작으로만은 피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국 단검으로 전사의 팔뚝을 그어 버렸다.
피가 뭉글뭉글 나자 전사는 당혹스러워했다.
그 역시 이성을 잃고 도끼를 막 휘둘렀지만 애석하게도 아까와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탁!
“어어!”
두둑!
그 큰 체격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번에도 가장자리 지반이 무너지며 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아악!”
결국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던가.
뒤쪽의 전사들은 자기 동료 두 명이 눈앞에서 추락하자 몹시도 분노하기 시작했다.
“저년이! 이번엔 내가 없애 버리겠어!”
플린시아는 그때 저들이 서 있는 절벽 위쪽으로 솟아 있는 붉은 산봉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쪽 벽에 돌부리들이 보였고, 만일 저기를 딛고 일단 그 위쪽으로 오른다면 뭐가 있을지 몰랐지만 일단은 저들과의 접전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앞쪽의 전사 두 명쯤은 제압하고 그 지점에서 등반을 해야만 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추락한 자들은 자신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저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마구잡이식으로 공격을 할 게 자명했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게 그 위쪽 절벽에만 오를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이에 한 전사가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죽어 버릴 테다!”
홱! 홱
순간 플린시아 눈에 그의 가랑이가 널찍하게 보였던가.
냅다 엎드려 다이빙 하듯 그곳을 통과했다.
허나 그쪽에도 전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년이 쥐새끼처럼!”
홱! 홱!
그가 도끼를 휘두르자 이번엔 가랑이가 아닌 왼쪽 절벽을 이용해 발돋움을 함과 동시에 그의 키를 훌쩍 넘었다.
탁!
이제는 앞뒤로 포위된 상황이지만 플린시아의 눈에는 오직 절벽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돌부리들만이 보였다.
그녀는 개구리처럼 몸을 움츠렸다가 폴짝 뛰듯이 있는 힘껏 그곳을 타고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위로 사라져 버렸다.
이에 부족 전사들 저마다 닭 쫓던 개처럼 그곳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에 중년인 볼드락은 부하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뭐 하나! 당장 쫓아가지 않고!”
한 전사가 돌부리를 딛고는 3미터가 넘는 그 위로 냅다 올라가더니 외쳤다.
“놈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지다니!”
“여기 위에 다른 쪽으로 통하는 길이 보입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다들 그리로 올라감세!”
전사들이 차례대로 절벽으로 오르자 데몬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숙부에게 말했다.
“숙부님… 저 위쪽은 금지 구역인 붉은 지대가 있는 곳입니다. 인간이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 할…….”
순간 그가 조카의 말을 끊었다.
“눈앞에서 우리 종족 두 명이 죽었는데 그런 말이 나오나!”
“숙부님, 아무래도…….”
하지만 볼드락 역시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마치 그 자신이 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오히려 소리를 질렀다.
“자네도 따라오게나. 부하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말일세!”
숙부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 위로 올라갔고, 데몬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돌부리를 디뎠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랄까.
그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 * *
그로부터 반나절이 흐른 뒤.
추격 살수들이 바위 절벽 아래 어느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숲 중턱 지대로부터 이곳 막다른 바위 절벽까지 샅샅이 뒤진 대원들이 자연스레 한 장소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발할라와 백여 명에 이르는 살수들은 저마다 당혹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특히 대장 발할라는 추격 대상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에 대해 몹시도 분노했다.
“대체 그년이 하늘로 솟았나, 아니면 땅으로 꺼졌나! 빌어먹을! 혹시 네놈들이 그년이 무서워 대충 수색한 거 아냐!”
늘 그렇듯 그는 애꿎은 대원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상식 안에서 만큼은 부랑자가 빠져나갈 길이 없건만 막상 여기까지 오면서 그녀의 흔적 조자 찾을 수 없기에 분통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년은 수십 명이나 살해한 아주 흉악범이다! 절대 놓치면 안 되건만! 젠장, 이게 뭔가!”
급기야 추격대원 중에서 그래도 살수 아린이 그 첫 번째 분풀이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봐!! 대체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자네가 설명 좀 해 보게!”
아린으로서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숲을 통해 이곳까지 오르면서 그는 대원들에게 반경 내의 지형지물 중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검으로 일일이 찔러 보며 아주 꼼꼼하게 수색하라는 말을 골백번은 넘게 할 정도로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발할라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스스로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분명 수색 작업은 철저하게 했습니다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역시나 발할라의 호통 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걸 변명이라고 해! 이대로 놈을 찾지 못하면 시민들이 뭐라 하겠는가. 명색이 내가 치안대장이건만 부랑자 따위에게 대원 둘이 살해당하고도 놈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그 지탄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빌어먹을!”
지금으로서 아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변명 외에는 없었다.
“혹시 산 반대편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지도…….”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발할라의 화근을 부채질했다.
“이런 미친! 내가 여기서 30년간을 살았지만 반대편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발할라는 그 살찐 턱살로부터 땀이 뚝뚝 떨어졌고, 갑자기 뒷목이 뻐근한지 손으로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 아.”
화를 이기지 못하니 어깨와 목이 경직이 되어 마비가 될 정도였다.
원래 그에게는 일시적인 마비 증상이 있어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뭔가 억제 할 수 없는 분노가 그 증상을 확 유발시킨 것이다.
그가 비틀거리자 마침 옆에 있던 이시스프가 부축했다.
“대장님! 괜찮으세요!”
발할라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연신 크게 호흡을 몇 번 했고, 그 자신이 신형을 추스르려 하였다.
그의 임기 7년 중 마지막 1년을 앞두고 터진 살인 사건이었다.
젊었을 때 장교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럴듯한 공훈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적국의 포로로 잡혔고, 협정을 통해 무사히 고향으로 귀환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불명예스런 치욕을 안았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 이곳에서 오로지 치안대에서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임무를 해 왔다.
그런 그의 노력은 시민들에게 통하면서 나름 중년이 되어 이제는 믿음직한 수호자로서 서서히 존경과 존망을 받는 인물이 되어 갔고, 이제 그의 꿈은 치안대를 그만두고 시의원에 출마하는 것이었다.
물론 투표로 행해지는 선거에서 그는 이미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출마만 하면 시의원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겼고, 그 범인을 놓친다면 오랜 세월 쌓아 두었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물 건너가고 시의원조차 출마는 완전히 포기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그의 심경은 현재 한없이 참담할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한데 그 못지않게 몹시도 불안해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시스프였다.
‘빌어먹을… 대체 그놈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외침.
“여기 뭔가 이상한 데요!”
순간 발할라와 이시스프, 그리고 모든 대원이 그곳으로 시선을 모았다.
“이상하다니?”
“절벽 아래 흙이 메워져 있는데요.”
곧이어 대원들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을 처음 발견한 대원 말대로 그 어떤 짐승에 의해 흙이 의도적으로 덮어진 것처럼 보였다.
발할라는 이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우나 오소리 굴 같은데.”
다른 대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별거 아니라는 듯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유독 이시스프의 눈빛은 번뜩이고 있었다.
지금 심정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짐승의 굴이든, 아니든…….
그는 갑자기 검을 꺼내더니만 그곳으로 가서 흙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에 아린이 뭐라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설마 놈이 땅을 파고 거기 숨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시스프가 짧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그럴 수도 있다니?”
“지금까지 그년의 행태로 보면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평범한 여자가 아닐세. 자네나 나나 놈은 우리 범주를 벗어나며 덫을 만들고 단도로 저지할 정도로 아주 무시무시한 자라네. 그렇다면 얼마든지 흙을 파내어 그 속에서 숨을 쉬고 있겠지!”
발할라 역시 이시스프의 그런 말을 듣고는 그럴 수도 있다 싶었는지 그가 흙을 파내는 동안 일절 한마디도 안 했다.
오히려 뭔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그곳을 살펴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시스프는 뭔가를 발견했는지 땅 파는 속도를 올렸다.
“아! 뭔가 있어!”
그 말에 대원들이 그리로 가까이 몰려들었다.
“굴이… 동굴 같은데!”
그제야 발할라는 대원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그곳을 살폈다.
이시스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사람 두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큰 바위 동굴 같은데요. 어쩌면 놈이 저곳으로…….”
그 말에 발할라 역시 한 가닥 희망이 솟는 듯했고, 당장 대원들에게 외쳤다.
“다들 뭐 하고 있어! 당장 이시스프를 도와서 흙을 완전히 파내라고! 당장!”
대원들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을 서둘렀다.
* * *
간혹 늪도 보이기에 여긴 안전한 곳이 분명했다.
그래서인가, 플린시아는 아예 나뭇가지 위에 몸을 누이고 하늘을 바라보며 육포를 씹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히힝.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
그녀는 재빨리 나무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따가닥!
따가닥!
길도 없는 빽빽한 소나무 숲에 누군가 말을 타고 길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대충 보아하니 귀부인들이 쓰는 레이스 달린 하늘빛 모자에 드레스 차림의 여인이라. 그녀는 사방을 황급히 둘러보는데, 아마도 역시나 길을 잃고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플린시아는 별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면 호위병들이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만 한 무더기의 기마병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외쳤다.
“여기 계셨습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길을 잃는 여인의 말고삐를 잡고 움찔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지? 내가 모르는 호위병 같은데.”
“이번에 새로 교대한 아론이라 합니다.”
“아론이라니!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당장 세비앙을 불러와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슨 말이지?”
“그는 죽었으니까요.”
순산 여인이 깜짝 놀라 외쳤다.
“죽다니! 세비앙이?”
자신을 아론이라 말했던 자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