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 후후.”
“형도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형! 그건 나중에 따지시고 지금 당장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세요.”
“아. 그, 그래.”
“지금 당장 플린시아를 찾는 게 급선무니까 빨리! 빨리! 해결해요.”
* * *
그로부터 이틀 후.
플린시아는 정신없이 숲 안 깊숙이 달리고 또 달렸다. 가시에 찔리고 바위에 찢겼지만 그런 고통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신을 추격해 오는 에스타란토 종족 전사들. 그들을 피해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나마 플린시아는 한 가지는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이곳 헬존의 무서움을 잘 알지만 에스타란토 전사들은 외부 세계에서 그 자신이 상대한 자들처럼 첨단 과학 문명도 없고 마법이나 화려한 검술을 사용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자들이라는 사실.
그건 헬존의 중력장이 수백 분의 1로 줄어든 상태에서 자신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뿐이지 다른 면에서는 그저 평범한 인간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학센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그가 천둥의 신으로 그 큰 해머를 자유자재로 휘둘러 상대방을 압살해 버릴 수 있는 능력은 마법의 에너지가 아닌 오로지 힘의 능력.
즉, 헬존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스타란토 종족은 외부 세계에서는 역으로 수백 배의 괴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들을 상대할 방법은… 게릴라 전법…….’
* * *
에스타란토 종족, 한 도시를 책임지는 민병대장 발할라는 일곱 개 조의 백여 명의 대원을 부랴부랴 소집시켜 추격대를 구성했다.
발할라의 명령에 따라 백여 명의 대원이 숲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수건은 흥건히 적셔져 있었으며 연일 계속되고 있는 습한 날씨 탓에 인상은 펴질 줄 몰랐다.
“다들 정말 꾸물거릴 거야! 빌어먹을! 아직도 그년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다니! 이런 굼벵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내가 무슨 고생인지.”
마침 앞서 살펴보던 케인이 발할라에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여기서부터는 거의 외길이라고 봐야 합니다.”
발할라는 전방의 좁은 숲 통로를 주시했다.
“그래서!”
“왼쪽은 협곡이고, 오른쪽은 늪지대이니 틀림없이 저 앞쪽으로 갔을 겁니다.”
“그건 나도 아는 거고! 옆으로 샜을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확실히 하고 올라가잔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앞쪽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그 여자의 것이 확실한가?”
“대원들 군화 바닥과 다르니 일단은 그럴 가능성이…….”
“역시 자네밖에 없군.”
선두에 있던 케인은 걸음을 멈추고는 손을 들어 꼼짝하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순간 수풀이 다시 움직이며 뭔가가 스윽! 지나갔고, 화살을 메겨 그곳을 향해 재빨리 쏘았다. 그리고 이후 살펴보니 즉사한 것은 산토끼였다.
“빌어먹을!”
그때 한 대원이 뭐라 외쳤다.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관목들로 우거진 풀숲 주변이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은 게… 글쎄, 뭐랄까요.”
케인 역시 그걸 느꼈던가.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숨소리마저 내지 않고 다시 천천히 살펴보았다.
대원 말대로 수풀이나 작은 나뭇가지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잎사귀들마저 방향이 서로 엇갈린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홱!
“아악!”
조금 전 왼편 관목들 안으로 들어간 대원들이었다.
“뭐야!”
두 대원은 하체 쪽이 뭔가에 덮쳐진 채 쓰러져 있었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풀과 나무, 잎사귀로 위장하여 엮은 가지들 사이로 일부러 깎아 만든 송곳처럼 날카로운, 뾰족한 나무가 대원들의 허벅지 부분을 덮친 것 같았다.
한편 이시스프는 제국 사관학교 출신답게 덫이 고의적으로 나무 사이 길목에 장치된 것을 직감했다.
얼핏 보면 사냥꾼이 멧돼지나 여타 짐승들을 잡기 위해 설치한 것을 하필 대원들이 건드려 재수 없게 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난 그였고, 최연소로 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때 전술 전략 수업에 있어서 만큼은 최고의 기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매우 전략적이고 치밀한 방식으로 놓인 덫을 못 알아볼 이시스프가 아니다.
우유부단하고 여리다지만 그걸 뛰어넘는 두뇌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저 덫은 제국군 규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고, 이 지역 사냥꾼들의 특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덫이었다.
제국군 규범에 따른 덫을 사냥꾼들이 놓을 수 있을 리 없다. 엄연히 군부와 관련한 사람만 설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니까.
‘짐승을 잡기 위한 덫이 절대 아냐! 설마 그 여자가…….’
이시스프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케인은 다른 대원들에게 부상자를 돌보라고 명령했다. 그때 오른쪽 바위 편에서 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그쪽을 살피던 대원들 같았다. 이에 케인은 또 무슨 일인가 하고 냅다 달려갔다. 그 앞에 수풀로 위장한 구덩이 함정이 보였고, 그 안에 대원 두 명이 피를 철철 흘리며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아아, 으윽…….”
그들 역시 덫에 걸려든 것이다. 설마 여기가 멧돼지가 다니는 길목으로써 사냥꾼들이 집중적으로 덫을 설치해 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수색 지역과 그 방향을 완전 잘못 잡은 셈이다.
“이 사냥꾼 새끼들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앞서 당한 대원들이나 구덩이에 빠진 대원들의 부상이 죽지는 않을 만큼 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급소가 아닌 주로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팔과 손이 뾰족한 나무들에 찔리거나 관통을 당한 정도.
케인은 열불이 터졌다. 한 도시를 지키는 치안대라는 놈들이 덫에 걸려들어 발버둥 치는 꼴이라니.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는 다른 대원에게 그들을 꺼내어 지혈과 치료부터 하도록 했다.
한편 케인을 제외한 7조 대원들은 앞서간 1조 대원들의 끔찍한 광경에 그저 지켜볼 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중 이시스프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의 무력과 능력을 지닌 치안대가 여기저기서 희생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엔 뒤쪽에서 뭔가 홱 소리가 나더니만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누군가 발목에 뭔가가 걸려 공중으로 거꾸로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살려 줘!”
7조 대원 중 누군가 두려운 나머지 뒷걸음을 치다가 올무에 걸린 모양이었다. 케인과 이시스프는 서로 놀란 나머지 그쪽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이건 완전 사냥철 시즌에 덫 밭 한복판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지금은 여름철이고 숲이 우거져 있어 각종 열매와 먹잇감들이 많아서 짐승들이 한창 활동하기 바쁜 사냥철 계절은 맞았다.
이시스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사냥철의 대상이 뭔가 뒤바뀐 것 같았다. 그 대상이 짐승들이 아닌 마치 자신들 같았다.
‘우리가 쫓는 그 여자가 한 것이라면 이건 정말 엄청난 작자를 건드린 셈이겠군. 하지만 개인이 했다고 보기엔 덫의 규모와 수가 너무 많기도 하고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저 앞쪽에서 또다시 비명이 들려왔다.
“아아악!”
이시스프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아니, 그건 그 어떤 존재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진 것이다.
자신들에게 일부러 공포를 조성하는 것 같은 두려움의 시작이랄까. 현장에 도착해 보니 대원 한 명이 또다시 쓰러진 채 신음을 냈다.
“아아, 우욱.”
처음의 덫과 마찬가지로 깎아 만든 수풀로 위장한 송곳 판때기가 옆에서 덮치며 허벅지에 찔려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뒤쪽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크게 들려왔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대장 발할라였다.
누군가 이곳의 사태를 그에게 알렸고, 나머지 모든 대원 역시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발할라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케인과 이시스프를 보며 다시 소리쳤다.
“지금 뭔 일이냐고 묻잖는가!”
두 번째 질문에서조차 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당장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빌어먹을! 요즘이 사냥철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군. 한데 오죽 칠칠하지 못했으면 사람이 덫에 걸리더냐! 에라, 이런 못난 놈들 같으니라고!”
그때 숲 어딘가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발할라의 고개가 슬며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케인은 놈이 파 놓은 함정에 대원들이 걸려든 게 아닌가, 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발할라는 가면서도 짜증을 냈다.
“이 사냥꾼 놈들이 산을 덫 밭 천지로 만들어 놨나! 여기서 내려가자마자 단단히 따져 물어야겠군!”
“아악!”
가는 와중에 또 한 차례 비명이 들렸다. 조금 전 대원이 아닌 누가 또 당한 것 같았다.
잠시 후 첫 번째 비명의 근원지에 도착한 발할라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대원의 허벅지가 뭔가에 베여 그곳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놀란 것은 덫에 의한 상처가 아닌 검상이라는 데 있었다.
상처를 입은 대원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뒤쪽을 돌아다 봤다.
“그년이 기습을 해 왔습니다…….”
* * *
숲 한가운데 높이 솟은 나무 둥치에 올라 몸을 추스르고 있던 플린시아의 시선은 자신이 벗어난 곳을 향했다.
그녀는 설마 회색 마법사인 자신이 이런 곳에서 이런 기습적인 작전을 실행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마법사가 되기 전에 한 살수 단체의 자객 출신이었다. 그곳에 환멸을 느껴 본격적으로 마법 수업을 배워 회색 마법사가 되긴 했지만 지금 그때 배운 암살 수법이 얼마나 요긴한지 그저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그때 그녀의 눈앞으로 한 마리의 다람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근처에 놈의 둥지가 있나 보다.
다람쥐는 움직이다가 입에 물고 있던 도토리 하나를 떨어뜨렸고, 그건 저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아! 이런!’
그들이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뭐야?”
저들이 눈치 차린 이상 반드시 이곳에 올라와 확인할 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전사가 이미 나무 위로 오르고 있었다.
플린시아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빛을 번뜩였다.
‘음…….’
전사 한 명이 잎사귀를 젖히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플린시아는 그의 목덜미에 대롱을 불어 독침 하나를 발사했다.
훅!
“악!”
전사 한 명이 나무 밑으로 떨어졌다.
털썩!
다른 전사들이 깜짝 놀라 그 둘레를 에워쌌다.
“위에 누군가 있다!”
플린시아의 오른손에는 긴 대롱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살펴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충 어른 팔 길이만 한 가는 나무통, 그리고 그녀의 다른 손에는 가늘고 날카롭게 잘라 화살처럼 만든 나뭇가지들이 한 줌 쥐어져 있었다.
지금 나무 위에 매복하면서 플린시아는 마법이 아닌 암살 전통 무기인 독침 통을 만든 것이다.
대롱을 강하게 불어 독을 바른 화살을 날려 적을 제거하는 치명적 무기이다.
발할라가 외쳤다.
“놈을 제거해!”
사실 플린시아는 아직도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았다. 물론 그 또한 대비책으로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갈 수 있는 넝쿨 줄기를 묶어 놨다. 적어도 그것을 움켜쥐고 이동할 수 있는 기력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