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카시아스는 고집이 강한 신(神)이기에…….
“그렇다면 이렇게 고하라. 나 천계의 수장은 붉은 달을 싫어한다고! 또한 내 지하 백성의 영혼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 후환을 감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말이다.”
- 분명 그렇게 고하겠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행적에 있어서 제 힘으로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뿐입니다.
“상관없다.”
- 저는 군주님의 일행이 걱정되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 결계를 벗어나면 이후로 그들이 보게 될 광경에 그 어떤 반응을 보일지 더 이상 제 책임이 아님을 헤아려 주소서.
그렇게도 깊고 두꺼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나는 음산했던 검은 운무가 걷히자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불안했다. 이후 그들이 보게 될 광경, 아니 현재 이곳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에 대해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이내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눈앞에 비탄의 세상에 펼쳐지고야 말았다. 그 실체를 보고는 일행의 눈빛의 변하기 시작했다.
통곡의 교단이 저지른 악행의 흔적들, 곳곳에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하늘은 먹구름으로 어두웠다. 그 아래 대지를 흐르는 강물은 핏빛이었고, 들판에는 꼬챙이에 끼워진 시체들이 즐비했다. 썩은 냄새마저 진동했다.
* * *
그다음 날
나는 헬존에서의 내 무기력함에 이만저만 실망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레벨 업을 하면서 내 공력이나 무공 갑자가 가히 상상을 불허할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런 꼴을 맞이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학센의 정체였다. 그는 인제 보니 인간이 아닌 이곳 헬존의 에스타란토 종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곳은 두 개의 세력이 대립하며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헬존의 지상파와 지하파. 그리고 학센은 지하파의 군주였다는 사실.
그가 왜 헬존을 벗어나 외부 세계에서 천둥의 신으로 활약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가 왜 그렇게 강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렸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형, 여기 헬존 말입니다. 블랙홀 맞지요?”
“그래, 블랙홀 맞다.”
“흠, 전혀 꿈에도 몰랐습니다. 블랙홀에 사람이 거주할 줄은요.”
학센은 빙그레 웃는다.
“후후,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수천수만 배 경이로운 일로 가득하지.”
“그나저나 플린시아는 무사할까요?”
그러자 학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글쎄다, 그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여기에서 쉬고 내일부터 그녀를 찾으러 다닐 계획이다. 다만 플린시아가 헬존의 지상파가 아닌 지하파 수하들을 만나면 안심은 하겠는데…….”
그때 나는 학센에게 정말 궁금했던 질문을 하기로 했다.
“형, 저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래, 형도야. 말해 봐.”
“형 같은 그 전투 능력이면 얼마든지 초시공 전사가 될 수 있는데 왜 은하 연합의 그런 요구를 번번이 거절하는 거죠?”
그러자 학센은 그만 웃고 만다.
“후후. 그래, 그게 궁금했나?”
“네.”
“흠, 네가 아직 우주를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이구나. 물론 내 현재 능력으로 초시공 전사 테스트를 받으면 합격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설령 된다 하더라도 그 이후가 두렵단다.”
“두렵다니요?”
“초시공 전사들의 활동 범위가 너무 광활해서.”
“광활하다니요?
“그 범위는 주로 안드로메다 성운이 될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이요?”
“그곳은 태양만 1조 개가 넘는, 그야말로 상상조차 되지 않는 영역이지.”
1조 개라는 말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형도야, 태양이 1조 개면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태양계가 1조 개는 된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안에서 활약하는 전사들은 얼마나 강할까? 그런 의문 가져 본 적 없니?”
“…….”
내가 대답 못하자 학센은 다시 말문을 이어 갔다.
“그리고 초시공 전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기나 하나? 그들은 그야말로 신의 능력을 지닌 불세출의 영웅이지. 바로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주로 노는 전사들이니까.”
나는 그때 내가 알고 있는 초시공 전사 카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그렇게 엄청난 존재였던가.
“형도야, 아무튼 나는 그런 큰물에서 놀기에는 솔직히 자신 없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능력으로 지금까지 자신만만해 왔는지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곳 헬존에서조차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한 나를 내 모습을 보니 한숨만 더 나왔다.
“후~”
* * *
아침이 밝아 왔다. 그런데 뭔가 내 몸을 꽁꽁 옭아맨 느낌. 그래서 눈을 뜨고 확인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두 손으로 굵은 밧줄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들. 게다가 내 옆에는 학센 역시 밧줄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낯선 자들을 확인했다.
다들 붉은 군장 차림으로 무장한 전사들처럼 보였는데, 맨 앞에 서 있는 중년의 사내만 흰 의복을 입은 채 부채를 살랑이며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오! 학센, 이게 얼마 만인가! 네가 헬존을 떠난 후 나는 더 이상의 적수가 없어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지냈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주다니. 하하, 정말 반갑네.”
학센은 몹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카시아스, 네놈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후후, 헬존의 지하 세계 군주의 생가라. 하기야 그동안 이곳을 찾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을 투자했고 그 결실을 보았지. 그나저나 자네의 그 아둔한 머리는 여전하군. 케녹스가 이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면 당연히 경계해야 하건만 그저 남 일처럼 태평하게 잠이나 쳐 자다니. 어쨌든 외부 세계에서 잘 지냈나. 내가 듣기로는 천둥의 신이라고, 자네의 그 분신 같은 해머로 나름 활약했다며. 쯧쯧, 그런데 왜 돌아왔나? 자네가 통치하던 지하 세계가 그리웠나, 아니면 그 군주로서의 명예와 부가 생각이 났던가. 하하, 하여간 그놈의 권력욕이란.”
학센이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권력 따위는 너 같은 놈에게나 어울릴 아주 하찮은 용어. 나와는 상관없다. 그래, 네놈은 아직도 지상 세계에서 군주로 군림하며 폭정을 일삼고 있겠지.”
그러자 카시아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흠, 폭정이라. 대체 그 기준이 뭔가? 하기야 반대 세력의 군주인 자네 눈에는 내가 아무리 성군이 되어도 트집을 잡고 비판하겠지. 하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닐세. 이제는 에스타란토 종족을 이끄는 집정관이 되어 나름 이 헬존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무진히 애를 쓴다네. 네놈이 그걸 알기나 할까?”
“그래서 통곡의 재단을 만들어 죄 없는 자들을 살육하고 고문을 하며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가? 네가 그러고도 달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가!”
그러자 카시아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내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살육하고 고문했다니? 그런 망발은 어디서 들었는가. 혹시 자네의 심복 제인피어, 그년에게 들었는가? 하하, 그렇다면 그건 큰 오해일세.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죄 없는 사람이 아닌 내게 반역하고 역모를 주동하는 지하 인간들만 잡아다 처벌하지. 바로 자네를 추앙하는 그 벌레 같은 무리를 말이야.”
“닥쳐! 애초 지상이나 지하는 함께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룰을 깨트린 것 바로 카시아스 네놈이다. 갑작스레 지상의 정치가 등장해 그 양쪽 세계를 이간질하고 결국 네 목적인 지상의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지하 세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 헬존은 네놈이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카시아스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후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하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명분이라는 좋은 단어를 쓰지 왜 그런 아주 저질 용어를 쓰는가. 어쨌든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다 쓰레기이지. 나는 현재 헬존의 집정관으로서 정말 열심히 정치를 한다네. 물론 네놈의 세력과 그 잔당을 처리해야 할, 아주 귀찮은 일이 있지만 일단 이렇게 네놈이 자발로 이곳에 들어왔으니 너만 처형하면 모든 것은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아무튼 고맙군.”
카시아스는 옆에 서 있던 수하들에게 말했다.
“학센의 처형식은 내일 오전에 치를 것이니 일단 감옥에 가두어라. 그리고 여기 학센하고 같이 온 이 인간 역시 함께 처형하도록.”
* * *
플린시아는 자신을 찾아 준 소년 레비를 보며 반가워했다. 그는 바로 아드린느의 아들이었다.
“레비! 왔어.”
“누나, 이제 괜찮아요?”
“그래, 괜찮고말고.”
그런데 레비의 행동의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저기, 저랑 함께 온 친구가 있는데 누나한테 소개해 줘도 될까요?”
그러자 플린시아는 깜짝 놀랐다.
“친구와 함께 왔다고?”
“네, 이름은 아테온이라 하는데 학교에서 함께 기숙사를 쓰고 있어요.”
레비는 문을 열고 그 친구를 들어오라 했다. 그러자 금발의 아테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큭, 안녕하세요.”
“…아, 안녕…….”
플린시아는 불안했다.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아드린느와 레비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기에.
아테온은 다소 이상한 눈빛으로 플린시아에게 물었다.
“정말 외부 세계에서 온 거 맞아요?”
“…….”
플린시아는 이렇게 난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드린느.
그녀 역시 아테온을 보자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와 부탁했다.
“이름이 아테온이라 했지.”
“네.”
“저, 저기 말이야. 여기 외부 세계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비밀로 해 줄래.”
그러자 아테온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대신 아줌마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네, 감사합니다.”
“일단 나가자.”
잠시 후 그들이 나가고 플린시아는 여전히 불안했다.
“아, 이걸 어쩌지.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그러고는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까 보았던 그 금발의 소년 아테온이 현관을 나서자마자 마구 사람들에게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 안에 외부 세계에서 온 사람이 숨어 있어요!”
그러자 지나가는 에스타론 종족인들이 소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뭐라고, 외부 세계에서 온 사람이 저 집에 있다고.”
“네, 맞아요!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봤어요!”
주민들은 곧장 이쪽 현관으로 달려왔다. 그런 광경에 플린시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마침 그쪽에는 비좁은 골목길이 있었고, 무작정 멀리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 * *
나는 눈앞에 캄캄했다. 감옥에 갇혀 내일 처형을 당한다 생각하니 이제는 정말 희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그런 나에게 학센이 위로했다.
“아우, 미안하네. 나 때문에.”
“아닙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곁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플린시아 역시 이미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게 더 안타까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