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고요! 우리처럼 방어막에 숨은 사람들만 살고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 난리라니. 나는 형에게 면목이 없었다. 명색이 시공 전사라는 자가 이렇게 겁먹은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잠시 후 학센은 함께 가장 가까운 곳의 투명막을 설치해 살아남은 자 중 사내에게 물었다.
“이런 짓을 한 자가 누구요?”
“누군 누구이겠소. 케녹스이지요.”
“케녹스라고? 혹시 그 늙은 주술사를 말하는 거요.”
“그자밖에 더 있겠소. 헬존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순간 그의 눈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이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주민들 목숨을 두고 장난을 쳐! 개새끼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그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사내는 화들짝 놀랐다.
“이자가 실성했나! 함부로 욕을 하다니. 여기는 그자의 졸개들이 설치는 곳이오! 만에 하나 그 말이 귀에 들어간다면 당신은 산 채로 불태워져 죽을 것이오.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다른 데로 당장 가 보쇼.”
사내는 눈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분노보다는 두려움에 더 떠는 듯 보였다. 학센은 그자에게 다시 물었다.
“페르바는 아직 건재한가요?”
“페르바라니요. 혹시 마룡의 왕인 그 페르바를 말하는 거요?”
“그렇소.”
“당신, 도대체 누구요? 누구기에 다짜고짜 케녹스 님께 욕지거리하고 페르바를 운운하는 거요. 혹여나 하늘을 나는 운송 수단이 필요하다면 내 임시 천공 날개는 팔 수 있소이다. 요즘은 마룡들조차 케녹스 님의 허락 없이는 이용할 수가 없는 마당에 마룡의 왕인 페르바라니…….”
“천공 날개는 필요 없으니 케녹스 그 새끼가 지금 어디 있는지만 알려 주시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그는 헤르파투스 신전에 거주하고 있지 않소이까.”
“거긴 내 생가(生家)인데…….”
사내는 기가 막혔다.
“생가라니? 당신이 학센이라도 되는 모양이요! 나참. 상대하지 말아야지.”
그 즉시 학센은 손가락 두 개를 입 사이로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페르바! 당장 내게 날아오거라!”
결국 사내는 내가 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쯧쯧.”
그로부터 잠시 후 저 멀리 보이는 뭉게구름 사이로 거대한 흑마룡이 뚫고 나오더니만 이쪽으로 하강하는 것이 아니던가.
학센은 반가운 나머지 소리쳤다.
“오호, 이 귀염둥이! 그동안 잘 있었나.”
흑마룡 페르바 역시 학센을 보자마자 무척 좋았는지 상공에서 세 번의 선회를 하며 울부짖었다.
“크아아앙.”
흑마룡의 등에서 나는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매우 신기해하였다. 푸른빛 하늘 아래 융단처럼 깔린 구름들은 그 자체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이곳의 중력장 때문에 거의 힘을 쓰지 못한 채 학센의 허리를 꽉 잡고는 겁을 냈다.
“형! 잘못하다가 떨어지겠어요!”
“형도야! 나를 잡지 말고 거기 돌출된 비늘각을 두 손으로 꼭 잡으라고.”
잠시 후.
“형님!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저기 붉은 협곡 중간쯤에 건물 하나 보이지. 바로 저기야.”
흑마룡은 목적에 이르자 그대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겁을 내는 나는 그 속도에 저마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형도야! 괜찮아?”
“…….”
나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그의 허리를 꽉 잡고 있었다.
학센은 신전으로 앞장섰다. 나는 절벽 중간에 거대한 동굴을 이용해 지은, 그야말로 놀랄 만큼 정교한 건축 양식에 혀를 내둘렀다.
이곳은 마룡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절대 올라올 수 없는 천외의 요새와 같은 역할도 했다. 곧이어 현관을 지나 로비 안쪽으로 들어가자 학센은 자신의 생가 향취가 잔뜩 묻은 곳곳으로부터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가 쉬어야 할 이 공간에 다른 이방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낯빛이 절로 굳어졌다. 제단석 앞에 평소 학센의 아버지가 즐겨 앉으셨던 상석에는 대머리 노인이 등을 턱 하니 기대고 있는 것이었다.
학센은 그가 케녹스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학센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흑마룡 페르바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았는데, 혹시 내 귀가 잘못되었나.”
“케녹스, 내가 없는 동안 잘 지냈는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누구이기에 나를 아는 척을 하는 건가?”
“내가 누구인지 잠시 후면 알게 될 것이다.”
학센은 케녹스를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가 누군지, 또한 그와 함께 온 일행이 누군지 매우 궁금했다. 하지만 그다지 경계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신은 헬존에서 알아주는, 상당한 능력의 주술사가 아니던가.
한 차원 아래로 내려와서 이곳에 아예 터를 잡고 자신의 마법 수련함으로써 일과를 보내는 것 같은데, 예전에 학센이 주인으로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감히 자신의 생가에 터를 잡다니.
“좋은 말 할 때 내려오시지, 늙은이.”
그는 그만 웃고 말았다.
“흑마룡을 타고 이곳에 불쑥 들어와서는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큰소리를 치는 것 보니 아마도 아카스의 전사 나부랭이 같은데……. 그나저나 웬일인가. 나 때문에 여기저기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며 기회나 엿보는 겁쟁이들만 모여 있는 줄 알았더니만 그래도 용기가 있는 녀석이 있었군그래. 학센이야 뭐, 워낙 특출 난 건 알겠지만 그 후손들 주제에 시조를 흉내 내면 되겠는가. 그걸 한마디로 객기라 그러지. 그러다 객사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학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내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다니.”
“자네가 마치 학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허허.”
학센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지만 이쯤 되면 내가 누군지 정신 감응으로라도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여전히 여유를 보였다.
“귀찮지만 한번 해 보지……. 과연 누구이기에 그렇게 큰소리를 치는지 말이야.”
드디어 그는 학센에게 정신 감응의 마법을 걸었고, 그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였다. 학센은 냉소를 흘렸다. 이어 벌어질 상황에 벌써 재미있어지려 했으니.
“후후.”
“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케녹스.
“설마! 아, 아냐. 절대로!”
“뭐가 아니지, 늙은이?”
“학센 님이 설마…….”
그는 심지어 다리마저 휘청했고,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단지 그의 위명만 듣고도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케녹스는 어느새 바닥에 바짝 엎드려 사시나무 떨듯 바들거리고 있었다. 민망한 얘기지만 그의 하체 부분으로부터 물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오줌까지 지린 것 같았다.
“오호, 학센 님. 오호,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
학센은 잠시 고민 중이었다.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때.
빡!
학센의 해머가 그를 강타했다.
“악!”
그대로 즉사하고 마는 케녹스.
학센은 해머를 거두고 나를 보며 말했다.
“형도야. 이제 안심해도 된다.”
나는 그저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
“그나저나 이곳을 지키기로 한 내 수하는 어디 있는 거지?”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를 불렀다.
“제인피어! 그대는 이곳에 아직 있는가?”
그때 어디선가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 군주시여! 저 여기 대령해 있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동안 별일 없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헬존의 달빛 전사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이곳을 떠나지 전에 그놈들 대부분을 처치한 것으로 아는데.
-달빛 전사만큼은 제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원혼이 달의 경계에서 방황하며 만들어 낸 현상이기에…….
학센의 목소리는 잔뜩 굳어져 있었다.
“제인피어! 헬존의 달이 저 정도가 될 동안 너는 뭐를 했느냐? 헬존 지상파의 무리가 달빛 전사들을 이용해 이곳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 오호, 군주시여. 저로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강대한 존재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기에…….
“헬존 지하의 반란자, 제인피어. 네가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 제 위명은 헬존 지하에서나 통할 뿐, 헬존 지상에서 강림한 존재들에게는 미미한 나약자에 불과합니다. 현재 제가 충성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능력은 이처럼 황폐해진 대지 위에 본 그로잉 마법으로 약간의 자연환경을 조성 하는 일뿐입니다.
“…….”
그때 학센이 갑자기 내게 말했다.
“형도야, 여기 헬존은 원래 초록빛 녹음과 풀들이 자라는 대지로 보이지만 그 결계를 살짝 벗어나면 눈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광경들로 가득하지. 산과 강, 들판과 구릉지, 그 어느 곳이나 썩은 시체가 피와 강물을 이루었고, 고문으로 꼬챙이에 끼워진 수백, 수천의 희생양들은 여전히 숨이 붙은 채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을 흘리고 있어.”
그때 거목(巨木), 그 위의 나뭇가지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길게 뻗어 나오더니 나에게 가까이 그 촉수들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 학센이시여! 이 남자는 누굽니까?
“내 아우이니라.”
- 아우라니요? 그리고 왜 이들을 위해 제게 본 그로잉 마법을 시전토록 하시는지요.
“인간계에 태어나고 자란 그로서는 실제 이곳에서 벌어지는 광경과 중력장을 견디어 낼 수 없을 테니까.”
- 인간이라니요? 어찌 그와 함께 계시는 것이옵니까?
순간 학센의 눈초리가 번뜩했다.
“나 없는 동안 말이 많아졌군.”
-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군주님께…….
“현 상황을 보고해라.”
- 아실지 모르겠지만 헬존은 그야말로 악마의 유희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헬존 지상으로부터 적지 않은 처벌자들이 강림하여 이곳에 남아 있는 학센 님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 위한 것인지 그 모든 것들 말살하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그 끔찍한 형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이다.
“…….”
- 소위 ‘통곡의 교단’이라는 처벌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제는 전역에 수십 개의 지부를 두어 각각의 영역에서 체계적인 말살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주민들의 씨를 말리며 세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가장 참기 어려운 고문과 악행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내 흔적을 지우기 위해 내 고향을 아예 말살해 버린다고.”
- 그렇습니다. 통곡의 교단에 죽어 간 헬존 지하 주민들만 하더라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케녹스 역시 그 교단 소속이었는가?”
- 그 역시 통곡의 교단의 여러 지부 중 이 지역 관할자입니다.
학센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원혼으로 가득한 저 붉은 달을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들리는 음성.
- 오호, 학센이시여! 이 순간을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부디 이제라도 더 이상 백성의 통곡이 아닌! 그 오만한 통곡의 교단 놈들에게 진정한 통곡의 서막을 시작해 주소서.
“잊었는가? 나는 예전의 너희 군주인 학센이 아니라 지금은 시공 아카데미의 시공 전사인 학센이라는 것을 말이다. 너는 곧장 달의 지배자 카시아스에게 고하라. 죽어 간 주민들의 원혼을 받아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