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원칙만 그럴 뿐 그런 법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학장이 교관을 노려보았다.
“어라! 요즘 내 말에 일일이 토 달 만큼 간덩이가 부었나! 보아하니 다른 놈과 눈이 맞아서 어디 갔다 살다가 인제 와서 아쉬우니까 여기로 온 모양인데, 그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관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 그건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이 아닌가요. 이전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고, 제가 알기로는 그들을 받아들인 것이 관례입니다.”
“아무튼 여기는 내 아카데미고 내가 결정할 문제일세.”
“그래도 최소한 면담은 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제야 학장은 자신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소년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에잇. 뭐, 면담 정도야 할 수 있지.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지만. 그래, 이름이 뭔가?”
소년이 대답했다.
“레비…….”
“어른한테 존댓말 쓰는 법도 몰라! 고얀.”
소년은 재빨리 다시 말했다.
“레비이옵니다.”
“이옵니다는 또 뭐야. 입니다면 입니다지.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입학은 안 되니까 그런 줄 알아!”
그때였다. 소년의 엄마가 밭은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우웩!”
헛구역질까지 했고, 이에 레비는 엄마에게 다가가 꼭 끌어 앉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 흑, 괜찮을 거예요? 조금 더 버텨 보세요. 어딘가에는 우리를 받아 줄 것이 있을 테니까요. 그 전까지만 참으세요.”
다시 기침을 하는 엄마, 손수건에 피까지 묻어나왔다.
“엄마!”
레비는 엄마를 부축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가셔야 해요. 여기서 더 이상 폐 끼치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몇 발자국도 가기 전에 다시 풀썩 쓰러지는 엄마.
그래도 그 둘은 겨우 일어나 현관을 나서려 했다. 이에 교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학장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학장님.”
학장 역시 마음이 동했던가.
“잠깐만…….”
순간 레비는 귀가 번쩍 뜨였고,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학장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소년 레비를 살펴보았다.
“흠. 어째 아테온 그 녀석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이거, 혹시 또 말썽꾸러기가 들어오는 거 아냐?”
그때 레비가 물었다.
“아테온이 누군데요?”
“너 같은 놈 있어!”
“저처럼 순수하고 착하겠군요.”
순간 학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했다.
“허~ 정말이군. 그렇다면…….”
학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그럼 너, 기숙사에서 아테온 하고 한 방을 써라. 어차피 비슷한 놈들끼리 서로는 통할 테니까.”
그 날 저녁.
기숙사 302호실 방 안에서 두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전학생이니?”
아테온의 질문에 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전학생 맞고, 이름은 레비야. 그런데 너는 학장님이 말하던 그 아테온이라는 애니.”
“맞아, 나 아테온.”
그러자 레비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럼 우리 친하게 지내자.”
아테온 역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래, 친하게 지내자.”
그 날 늦은 밤.
아테온과 레비는 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큭, 너 정말 그 얘기가 맞는 거 같아? 우주에서 에스타란토 종족이 최강이라는 것 말이야.”
레비가 묻자 아테온은 확신에 찬 듯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고말고.”
“그 비결이 뭐지?”
“그야 이곳 특이점의 중력장 때문이지.”
“중력장?”
“그래, 중력장. 아무리 외부 세계에서 강한 전사라도 일단 이곳에 오면 원래 지닌 힘의 수백 분의 1로 축소가 되지.”
“아! 그래서 그렇구나.”
“그런데 너 혼혈이라 들었는데.”
“응, 그래. 하지만 나도 에스타란토 종족이나 마찬가지야. 나 역시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있거든.”
“큭, 그거 다행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뭐가?”
“외부 세계에서 이곳 헬존에 떨어진 전사들은 하나같이 다 힘을 쓰지 못하는 거야?”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그러자 레비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무슨 말이야?”
그러자 레비는 다시 생각을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은 그런 사람을 봤거든.”
“그런 사람이라니? 외부 사람 말하는 거니?”
“응.”
“어디 있어?”
“우리 집에.”
“너희 집에?”
“응, 아마 이곳에 올 때 상처를 입었나 봐. 지금은 우리 엄마가 돌보는 중이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테온의 호기심이 점점 커졌다.
“한번 보고 싶다.”
“엄청 예뻐. 우리보다 나이는 서너 살 위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누나 뻘이지.”
“한번 보고 싶다.”
“지금 여기 기숙사인데 어떻게 가?”
“보름 후면 방학이니까 상관없어.”
“아, 그렇구나. 그나저나 이거 엄마와 비밀로 하기로 한 건데…….”
“그건 걱정하지 마! 아무한테 이야기하지 않을게. 그런데 이름이 뭐래?”
“플린시아.”
“플린시아…….”
* * *
플린시아는 이제야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 창가 밖을 살펴볼 여유가 생길 정도로 병세가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곳 헬존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엄청난 중력장 때문에 아직도 숨을 제대로, 마음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그 뭔가의 압박감에 고생하고 있었다.
그의 전투력이나 공력이 엄청나게 삭감이 된 듯 이제는 예전의 그 강한 마법사가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그녀가 시공 아카데미의 학장으로부터 헬존으로의 임무를 부여받은 이유는 바로 이곳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외부 전사들의 무덤이라 일컫는 이곳 헬존. 과연 그 무엇이 그런 이유를 만들어 냈던가. 그리고 현재 용어로 블랙홀이라 명칭되었지만 과학 문명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플린시아로서는 이곳의 중력장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현재 그녀는 회색 마법사로서 자기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매우 실망스러워했다.
그때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중년 여성.
그녀는 자신을 구해 준 아드린느였다.
“이제 좀 괜찮아요?”
상냥한 얼굴, 부드러운 말투, 그나마 천운이 따랐는지 그녀 덕분에 플린시아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이곳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돌봐 주셔 가지고요.”
“감사하긴요. 외부인은 외부인들끼리 돕고 살아야죠.”
플린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외부인이요?”
“네, 저 역시 당신처럼 이곳 헬존의 에스타란토 종족이 아닌 다른 행성 출신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이곳 종족이기에 그와 결혼해서 여기에 온 것이죠.”
“그런 남편분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남편은 일 때문에 대략 몇 달 후에나 돌아옵니다.”
“아, 네…….”
“그나저나 여기는 왜 오셨죠?”
그 질문에 플린시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은 아드린느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후후,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뭐, 여기 오는 대부분 전사는 헬존에서 자기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오곤 하지요. 하지만 그건 매우 위험한 짓이지요. 일단 이곳으로 들어오는 결계를 뚫으려면 그야말로 외부 세계에서 가히 엄청난 공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고, 설령 당신처럼 무사히 이곳에 안착할지라도 여기 에스타란토 종족에게 걸리면 무조건 죽음이거든요. 그들은 매우 호전적이고 거친 종족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직접 플린시아에게 떠먹여 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부상이 다 나을 때까지 여기서 안정을 취해도 되지만 그 후에는 가능한 한 서둘러서 이곳을 떠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는 주택가라서 주변에 보는 눈들도 많고 언제인가 그들이 눈치를 챈다면 그때는 저도 당신을 보호할 수 없어요.”
* * *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숨이,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갑자기 무기력증에 빠진 환자처럼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학센은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흠, 역시 헬존은 만만한 곳이 아니군.”
그런데 학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기지개를 켜고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함, 이게 얼마 만인가? 형도야, 나는 이곳! 헬존 시간 개념으로 정확히 400년 만에 오는 것이다. 역(逆)으로 내가 이곳에서 성장하고 고향을 떠난 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얘기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학센은 이곳 출신이란 말인가?
“현재 나는 3차원계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또한 시공 전사인 동료와 함께 귀환한 셈.”
순간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전의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풍경들, 화려한 색채 하며 그 모든 것들의 규모가 훨씬 커 보였다. 거목과 큰 바위, 거대한 산맥으로부터 운하를 타고 흐르는 강물까지 마치 천상의 것을 보는 듯했다.
“여기가 형 고향이란 말이죠? 정말 아름답군요.”
“형도야, 네가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다. 하하.”
그때 학센이 외쳤다.
“저기 들판에 사람들이 보이지! 바로 우주 최강의 에스타란토 종족이지.”
헬존 주민들은 인간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그 외모가 흡사했다. 다만 피부색이 조금 붉었고 몸집이 클 뿐.
이번엔 내가 다른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뭔가 이상한데요? 저기 지평선이 점점 까맣게 변하는 것 같아요!”
점점 검은색이 이쪽으로 확산하는 것이 아닌가.
“형! 연기까지 나는 것으로 보아 불길에 타는 것 같은데요.”
순간 학센이 중얼거렸다.
“저건 파이어 네트(Fire Net)……. 하하, 실로 오랜만에 보는 구마법이랄까. 광범위한 지역에 그물 모양의 불길을 일으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타게 하는 마법, 법력이 최소 대마법사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기술이지.”
불길은 엄청난 속도로 들판을 비롯해 숲까지 덮쳐 버렸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재가 되어 즉사하는 자들만 수십, 수백 명이 넘어 보였다.
나는 외쳤다.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불길이 번지지 않는 바위 밑에라도 숨자고요!”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도 빨라 이미 불길이 우리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때 학센은 손을 들어 하나의 원을 그렸다. 순간 투명한 막이 우리의 위아래로 형성되었고, 뜨거운 화염은 그것을 피해 갔다.
군데군데 같은 모양의 원형 막이 보였고, 그 안에는 우리처럼 불길을 피해 안전하게 대피한 자들이 보였다.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불길에 남은 것은 잿더미뿐. 그러나 곧이어 새싹이 돋아났고, 그 줄기가 나고 자라더니만 금세 초록의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그만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파이어 네트에 본 그로잉(Born Growing) 마법이라…….”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저렇게 광범위한 지역을 일순간에 불로 지져 놓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다니.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학센은 여전히 호탕하게 웃었다.
“후후, 고향에 오니 참 그리운 장면이 바로 나타나네.”
나는 몹시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