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나마 초고도 문명의 과학적 안전장치의 힘을 빌려 누르는 데 성공했지만 완전치는 않았고, 오히려 그게 지금처럼 이상하게 변질되었던 것이다.
원래 거쳐야 할 주화입마를 내면에 간직시킨 채 간간이 그의 이성을 광분자로 만들어 버리는 원리라면 이해가 갈까. 그런데 그조차 공력 시스템 안에서 누르려 했으니 반발에 이은 역반발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 내가 시공 전사로서 이전에 수행했던 수많은 임무 중 적들을 잔인하게 살육했던 일들도 그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의 이성이 아닌 주화입마의 마성으로 행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검의 원래 주인 유성은 수십만 개의 초합금과 신검대법에 성공함으로써 얻어진 무한한 내공에 비례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격적인 광기의 전조가 시작되었던가.
그리고 이 은하검을 얻은 내가 지금 그 광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고.
“빌어먹을!”
시공 전사로서 첫 임무, 하이닉스 26차원에서 타이탄 시공 전사 데칸과 그의 수하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도 그 영향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살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내면의 광기가 요동을 치는데, 내가 가장 괴로운 것은 그게 적이든 그 누구이든 살육하고 싶은 욕망이 뇌리에 깃들게 된 것이다.
그나마 여타 심법들을 운용해 겨우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처럼 상대와의 전투를 앞둔 상태에서는 그 화가 또다시 활화산처럼 분출할까 봐 내심 걱정을 하는 중이다.
그걸 참으려니까 자꾸 피를 토하게 되는 것이고.
“컥! 컥! 컥!
어쨌든 나는 심법으로 신형을 겨우 추스르고 다시 검을 잡았다.
그때 헤르스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괜찮소?”
“…….”
헤르스는 간담이 서늘한 상태였다. 아니, 그 이상의 두려움이 느껴져 왔던가. 그건 그가 생전 느껴 보지 못한 전율 자체였다.
조금 전 내가 피를 토해 낼 때 상대가 알 수 없는 부상을 입은 줄 알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살의가 덮쳐 와 그 자리에서 두 발로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사실 헤르스는 연회장에서 그를 처음 대할 때부터 이미 염력을 총가동시켜 놓고 시험을 여러 차례 했다.
그리고 경악해 마지않았다. 플레이아데스 성운 출신의 시공 전사, 그곳은 그의 기준으로 볼 때 하위 차원의 별 볼 일 없는 일개 행성이건만 그런 하찮은 자가 거대한 산맥과도 같이 꿈쩍을 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 기괴한 것은 저자의 공력 원류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흔히 공력이란 자신과 같은 초인들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전유물이거나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들인 광전사, 혹은 그 이상의 상위 전사들에게 부여되는 원천 에너지이건만 도대체 저자의 힘은 어디서부터 기인된 것인지 그저 혼란스러웠다.
“그대의 공력 원류가 뭔지 물어봐도 되겠소?”
“말해 줘도 모를 거요.”
그때였다.
쾅!
정원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저기 계시다.”
“그놈도 있는데.”
“놈이 검을 들고 헤르스 님을 해치려고 해.”
그들은 바로 헤르스 생일 축하객이었다.
지드는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 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대로 그 둘은 서로 대결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아버님!”
그때 헤르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드야!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피신하여라.”
“무슨 말씀인지요!”
“피해야 하느니라, 당장!”
그때 나서는 자가 있었다.
“나는 파나트 47차원에서 온 시공 전사 에른이라 합니다.”
두툼한 슈트, 하늘로 치켜 올라간 천공의 금속 날개. 그의 위명은 제법 알려져 있었다. 요즘 타이탄 행성 출신의 시공 전사들이 판을 친다지만 그들조차 쉽게 대적할 수 없는, 상당한 전투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오지랖이 넓었던가. 상대가 어마어마한 살의를 드러내는 것조차 모른 채 그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이게 무슨 짓인가?”
그때 헤르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장 뒤로 물러나시오. 그대가 나설 일이 아니요!”
한편 지드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퍽이나 이상해 보였다. 평소 대해(大海)와도 같은 위용, 우뚝 솟은 산맥과도 같이 의연했던 그 엄청난 위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꾸 사람들더러 피하라 하니, 오늘만큼은 전혀 납득이 가지 않게 변한 것이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그 모두가 경외해 마지않는 아스타라노 초인이었다. 하물며 현 하위 수십 개 차원에서는 그야말로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베른 차원을 평정하고 평화를 가져다준 분이었다.
그런데 어찌 허름한 천 조각 옷차림에 달랑 철검을 든 저자 앞에서 맥을 못 추는 건지…….
“아버님, 저자는 제가 처리 하겠습니다. 그러니…….”
순간 호통 소리.
“미친놈, 당장 도망가도 모자라거늘!”
이번엔 아까 나섰던 47차원 시공 전사 에른이 한 발 앞으로 나왔고, 보다 못해 형도에게 다가가서 꾸짖었다.
“천하에 이런 건방진 놈을 보겠나! 감히 뉘 앞에서 경거망동을 하는 거냐!”
바로 그 순간 들려오는 파공음.
파!
삭!
피가 튀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에른의 몸통이 반으로 쪼갠 진 채 바닥에 나뒹굴기까지. 이를 지켜본 천 명에 가까운 하객들이 경악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공 전사 에른이 그 자리에서 단말마의 비병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기 때문이다.
빨간 피가 정원 풀들을 적실 때 그들은 저마다 동요되었고, 각자 무기를 빼 들었다.
“저놈이 에른을 죽였어!”
“이제 보니 보통 실력자가 아닌 듯한데.”
사실 나는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주화입마로 시작된 광기의 분출이 풀풀 솟아났고, 자기도 모르게 앞에서 얼씬거리던 그자에게 검이 휘둘러졌다.
이토록 무한한 공력과 내공 수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시전의 제어가 안 됐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이미 살인을 해 놓았으니 다음이 문제였다.
생일 축하객들은 상대가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저마다 합공으로 서둘러 공격해 들어왔다.
파파파팟.
여기저기 파공음이 들려왔다.
슈트 차림의 레이건 빔 발사를 필두로 검 형태의 병기들도 합세를 하여 무려 수십 명의 날고 긴다 하는 전사들이 각자의 전투력을 최대로 끌어 올려 발사했다.
“크악!”
“억!”
하지만 여기저기 목이 날아가고 몸통이 반으로 쪼개지는 자들. 대부분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홱홱 쓰러져 갔다.
나는 이미 피를 본 상태에서 마성이 극에 달했고, 이제는 손속을 두지 않고 보이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팟.
무수한 검강 줄기들, 그저 무림의 고수가 내뿜는 그런 차원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명체처럼 살아서 꿈틀거렸고, 스스로 알아서 적의 속살을 관통하며 계속 이어져 나갔다.
“아아악!”
“으악!”
한마디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때 헤르스는 두 손을 뻗어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시켰다. 더 이상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과연 초인답게 그의 공력은 대단했다. 수십 미터 높이의 그 두께는 2미터 정도의 투명 수정 벽을 만들고, 일단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진정들 하시오! 저자는 그대들의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거늘!”
하지만 보호막에 갇힌 그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동료가 끔찍한 죽임을 당했으니 이미 이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분위기가 매우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에 헤르스가 형도에게 말했다.
“그대가 원한 것은 내 목이 아니오? 그러니 더 이상 이자들을 해치지 마시오.”
하지만 내 귀에는 그런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그 자신이 제어하지 못한 채 광분을 내뿜을 뿐이다.
내가 다시 검을 들어 공격하려고 하자 헤르스는 못내 자기 능력을 극대화해 그에게 맞서기로 하였다.
“정 그렇다면!”
스스스스.
헤르스의 양손으로부터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형성되어 이내 빨간 불덩이로 변했다.
이어 그가 그것을 발사하자 마치 용암 줄기가 뻗어 나가는 듯 그대로 형도에게 향했다.
펑!
형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덩이에 그대로 휩싸이게 되었다.
활활 타올랐다.
화염의 열기가 너무 강했는지 그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그때 헤르스가 다시 불덩이를 만들어 재차 공격했다.
파파파팟!
펑!
“욱!”
우르르 쾅!
“악!”
“아아악!”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반경 수 킬로미터가 쑥대밭이 되어 곳곳에서 화염과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올랐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했고…….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목적은 학장의 동생 페이튼을 살해한 헤르스에게 그 복수를 하는 임무였는데, 본의 아니게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을 살육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 * *
그로부터 두 달 후.
나는 의회가 주관하는 플레이아데스 성운 헌법 재판소에 출두하게 되었다. 그의 죄목은 바로 하이닉스 24차원의 민간인 살해 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전에 그가 데칸과 그의 수하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고문, 살해한 것도 문제가 되었지만 헤르스를 제거하는 임무에 민간인들 수만 명이 죽은 것은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는 은하 연합 처벌 규칙 제2 조항인 ‘적도 응당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라는 명시에 위반되는 것이고, 인질들을 구출, 생존케 하는 것은 원래 평화적인 해법과 도덕적 윤리적 질서에서 나고 자란 행성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하였다.
재판 결과 나는 시공 전사 박탈과 함께 감옥에서 3년 형이 내려졌다. 나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항소심 포기에 그대로 그들의 처벌을 따르기로 했다.
어느 날 학센과 플린시아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이것 참, 구제할 방법이 없네.”
“…….”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학센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자넨 언제나 태평하군. 하지만 지금 시국에 자네가 반드시 필요할 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아무튼 의회 재심의 결과 그들은 살인자들을 응징할 인물이 필요한 거지, 또 다른 살인자를 양성할 생각이 없다며 끝내 내 요청을 거절했다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 * *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후 한 의원이 내게 면회를 신청했다. 아니, 함께 온 자는 바로 학센이었다.
나는 다소 의아했지만 일단 그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형도야, 아주 급한 일이 생겼다.”
“무슨 일이요?”
“플린시아가…….”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플린시아요! 설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나요!”
학센은 힘없이 말했다.
“연락이 끊어졌네.”
“연락이 끊어지다니요?
“플린시아는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고, 그곳에 파견되었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지 뭔가.”
나는 너무 놀라 철장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럼 당장 그녀를 구해야죠!”
“그런데 시공 전사 아카데미에서는 그녀가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디 이상의 추가 파견을 허락하지 않네.”
순간 나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평소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충격 그 이상이 분명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쪽 벽만을 바라보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에게 학센이 차분하게 말했다.
“형도야, 너한테 특별 사면이 주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