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차원계에서 50차원 이상은 중급 차원으로 분류다. 바로 고도로 전투가 발달된 그곳으로부터 아래 하위 차원을 방문하는 일은 드물다.
헤르스가 비록 개념을 달리하는 초인계 출신이지만 위 단계의 차원 존재들은 극도로 경계해야만 했다. 이어 론이란 자가 헤르스 앞으로 다가설 때 공청회장 전체에 긴장감이 흘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메르메스 51차원에서 온 론이라 하오.”
헤르스 역시 그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그 와중에 지드는 그를 관찰, 측정하느라 바빴다. 그의 눈에 장착된 카이저 공력 수치 기기에는 에너지가 무려 120을 넘고 있었다.
지금까지 왔던 하객 중 공력 수치가 가장 높았다. 등에 차고 있는 푸른 광채가 나는 해머. 지드는 즉각적으로 헤르스에게 전음을 흘려보냈다.
- 아버님, 저자의 무기가 측정이 안 됩니다. 아마도 새로 제련된 초합금인 것 같은데요.
- 나도 알고 있다. 신개념의 금속이라……. 빛의 물질을 금속 안에 가두는 무기를 쓰는 자라면… 아마도 광전사가 아닌가 싶은데.
순간 지드는 깜짝 놀랐다.
- 과, 광전사라니요!
- 흥분하지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광전사는 중급 차원 계열에 속하는 1급 전사로서 훗날 모든 전사들의 꿈인 그 위 단계 에테르 전사로 향하는 길을 걷는 자들이다.
보통 광전사나 초인들은 하위 차원이나 평행 우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영역 다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저들끼리의 경쟁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런 그가 바로 이곳 헤르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론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초인이 이런 하찮은 차원에 출현해 왕 노릇을 하는 것이오?”
다소 시비조에 가까운 말투. 헤르스는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허허, 그런 그대는 왜 이곳에 왔소?”
“나 역시 갑자기 왕 노릇을 하고 살면 어떨까 해서, 뭐……. 그나저나 대장 노릇은 할 만하오? 재미가 퍽이나 짭짤할 것 같은데.”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해머를 꺼내 들었다.
“한번 나와 자리 좀 바꿔 봅시다.”
그때 헤르스가 그의 무기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다.
탁!
순간 그 거대한 무기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때 헤르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하군.”
론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그대는 나와 같은 초인들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소이다. 더군다나 광전사들도 계열이 있는 법. 그러나 그 계열조차 안 되는 어설픈 메르메스 차원의 나부랭이가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소.”
이에 론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는 광전사가 아닌 그 아래 단계에 머문 예비 후보자에 지나지 않았다.
헤르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그대가 광전사가 아니란 거요. 만일 내가 진정한 광전사를 만났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겠죠.”
그쯤 되면 보통 응징이 들어가겠지만 헤르스는 관대한 편이었던가.
“자, 분위기가 좀 무거워졌소. 뭐, 오늘은 즐거운 자리이니 그대 역시 자리를 안내받아 연회나 즐기시오.”
론은 자신이 가짜 광전사임이 드러나자 창피한 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한편 지드는 흐르는 땀을 닦아 내렸다. 그 역시 그자가 진짜 광전사였다면 이곳 왕궁은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들려오는 안내인의 음성.
“다음 손님이 알현을 드린다고 합니다.”
순간 모든 이목이 한 낯선 자에게 집중이 되었다.
천 조각의 하얀색 의복에 검을 들고 있는 자. 앞서 등장했던 귀빈들에 비해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지드는 카이저 기기로 공력 수치를 확인했고, 무기 성분도 알아봤다. 그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력 10에 무기는 초합금이 아닌 철이라…….’
수치는 일반 행성 전사에도 미치지도 못할 만큼 미미했으니 그저 일개 군인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검을 들고 있었으니, 도대체 뭐 하는 놈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이어 그가 헤르스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건넸다.
“이형도라 합니다.”
헤르스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플레이아데스 성운이오.”
“직급이 어떻게 됩니까?”
“시공 전사 자격으로 왔습니다.”
순간 공청회장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말들이 들려왔다.
“저 꼴에 시공 전사라니, 후후.”
“뭐 하는 자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앞서 사기꾼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하기야 요즘은 개나 소나 다들 시공 전사라고 행세하고 다니는 세상이니.”
하지만 헤르스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점차 여유로움을 뒤로하고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시공 전사라…….’
이어 그의 보잘것없는 철 조각처럼 생긴 검에 시선이 갔다.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눈빛과 함께 안색조차 묘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흠…….’
“잘 오셨소. 가서 자리에 앉아 연회를 즐기기 바라오.”
나는 그의 말대로 시종에게 안내받아 그리하였다.
곧이어 배정된 자리에 음식이 나왔고, 우선은 술부터 따라서 한잔을 쭉 들이켰다.
생일 축하장은 참석자들로 왁자지껄했고, 여기저기 음주와 가무로 그 열기가 한껏 올랐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헤르스는 처음과 달리 그 안색이 조금 굳어 있었다. 이에 지드가 걱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편찮은 데라도?”
헤르스는 애써 담담한 듯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뭔가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드야…….”
“네, 아버님.”
“백성들이 날 어떻게 부르더냐?”
지드는 갑작스런 질문에 다소 당황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요?”
헤르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만 다시 말했다.
“너의 대답을 듣고 싶군.”
“물론 아버님은 성군 중의 성군이 옵니다. 그건 백성들의 뜻이고, 더 나아가 외부 전사들에겐 하늘이라 불리옵니다.”
그 말에 헤르스는 씁쓸한 미소로 되물었다.
“하늘 위의 하늘을 본 적이 있더냐?”
“무슨 말씀인지요?”
“곧 보게 될 것이리라.”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으로 향했다.
나는 술 대여섯 잔을 비우고 나니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봤다.
“앉아도 되겠소.”
그는 바로 헤르스였다.
“물론입니다.”
“목이 마르셨던 모양이오. 독한 술 한 병을 다 마셨으니.”
“원래 술을 좋아하는 체질입니다.”
그때 헤르스는 술병을 집었다.
“이번엔 내가 한 잔 따라 올리리다.”
순간 그렇게도 시끄러웠던 연회장이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른 44차원 절대 군주인 헤르스가 이 만찬 회장에서 제일 초라해 보이는 자에게 직접 두 손으로 술을 공손히 따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역시 상체를 꼿꼿이 편 채 당당하게 술잔을 받으니 그 꼴이 건방지게 보였고, 주변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저놈이 감히.”
“죽일 놈이 아닌가!”
지드 역시 화가 일었고, 그쪽으로 가려 하자 헤르스가 손짓으로 제지했다.
이번엔 형도가 답례주로 그에게 예의를 차리고 술잔을 정성스레 채워 주었다. 헤르스는 흔쾌히 그 잔을 비웠고, 매우 흡족한 얼굴을 했다.
“허허, 조금 전에 플레이아데스 성운의 시공 전사라 했지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저 축하객으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말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시 잔을 따라 주었다. 한데 이번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살의 가득한 눈매.
“그 잔은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오.”
순간 헤르스는 안색이 굳어졌다.
‘역시 이자는…….’
그는 잔을 쭉 들이켰지만 술맛은 매우 썼다.
“의도는 없었소.”
헤르스가 이번엔 잔을 따라 주었다. 형도는 역시 잔을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늦었소.”
헤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너무 원대한 꿈을 꾸었소.”
내 말투가 점점 냉혹한 기운이 깃들어지는 듯 차가워져 갔다.
“나와 상관없는 일. 현재 그분이 없다는 것이 내겐 중요한 일.”
헤르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때문에 온 것이오?”
“또한 이곳이 필요하오.”
“이곳이라면?”
“영토…….”
그때 헤르스는 술잔을 들이켜더니만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베른 차원은 드넓소. 원한다면…….”
하지만 나는 그의 협상 유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사람 목 하나가 필요 하오.”
이에 헤르스는 무거운 침묵을 일관했다.
‘결국…….’
그 둘은 술잔을 몇 번 주거니 받거니 했고, 잠시 후 헤르스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보시오, 젊은이.”
“말씀하시죠.”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것이 낫겠지요?”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 자리를 옮깁시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이에 지드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헤르스는 아들에게 와서 안심을 시켰다.
“걱정할 것 없다.”
“아버님, 대체 저자는?”
“내 손님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라.”
이곳은 왕궁의 비밀 정원 같았다. 헤르스는 그 누구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나만이 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그의 의도가 결국 이런 거였구려, 허허. 나는 결코 해하지 않으려 했건만 끝끝내 고집을 피우더니만…….
페이튼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대를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하면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내가 감쪽같이 속았소이다. 허허, 그대를 대하고 보니 그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소.”
그때 나는 등 뒤로부터 은하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이에 초인 헤르스 역시 모든 염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한데 검을 잡은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고, 호흡마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또다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가.
하지만 그건 헤르스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문제점이다.
사실 그의 이번 임무라는 것이 의장이 그렇게도 당부했던 베른 차원의 영토 확보를 위해 피난처를 제공받기 위함이고, 또한 아카데미 학장의 아들 페이튼의 복수를 갚는 일이었지만 그 전에 그를 움직이게 만든 이유가 있었으니…….
갑자기 내 안색이 붉게 변했고, 뭔가 불안한 듯 그 살의로 가득한 눈빛과 검을 잡은 손이 아주 노골적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피를 한 줌 토해 냈다.
“컥!”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은하검에 따른 주화입마?
“안 돼!”
“컥!”
또다시 선혈이 흘러나왔고,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우.
“하필 이럴 때.”
그렇다.
애초부터 불안했었다. 은하검… 바로 이 검이 순순히 내 분신이 되기까지 반드시 그 굴곡이 있을 거라고.
나는 자신의 광기를 분출하기 위해 그 대상이 필요 했던 것이다. 공적인 임무도 아니오. 복수도 아닌 그 누군가, 그저 살육하고픈 내면의 외침, 그것을 견딜 수 없기에 초인을 찾아온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는 마성에 휘둘렸는데, 처음에는 마교 비급서들을 익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주화입마였던 것이다.
플레이아데스 성운의 과학과 접목시킨 공력 시스템 레벨업 덕분에 내공 수위를 빨리, 엄청나게 올릴 수 있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주화입마가 빨리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