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바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들고 학센에 돌진해 들어왔다.
“이얏!”
타다다닥!
순간.
빡!
“악!”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단 한 방이었다. 정확히 한 방.
그 큰 해머에 바젤은 거대한 쇳덩이에 압사당한 듯 그대로, 즉사하고 만 것이다.
플린시아가 외마디 탄성을 뱉었다.
“세상에!”
그러자 아레스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했고, 이번에는 그 자신이 검을 들어 앞으로 나섰다.
“과연 그 위명이 그저 소문은 아니었구려.”
학센은 그에게 말했다.
“그대가 그 작전을 총지휘한 원흉. 드디어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 군신 아레스라, 나 역시 그대에 대한 위명을 들어 봤지. 군신답게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천둥의 신께서 그렇게 칭찬해 주니 몸 둘 바를 모를 뿐이요.”
아레스는 검을 들어 학센에게 다가갔다.
“그대와 이렇게 대적하게 된 것 자체가 영광이오. 그럼.”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진해 들어갔다.
“자! 공격하겠소.”
타다다닥!
순간.
빡!
“아악!”
조금 전 바젤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단 한 방이었다.
해머에 짓눌린 아레스. 그대로 피를 토하고 즉사했다.
나와 플린시아는 이를 두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 채 그저 입만 해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느껴지는 학센의 처음 드러나는 그 공력의 수위.
나는 그만 내심 경악해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공력이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전사 중에 초시공 전사 카이 외에 학센이 두 번째였다. 그렇다면 그의 전투력은 이미 나와 플린시아 보다 수십에서 수백 배는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인데.
내가 늘 말하던…….
하늘 위의 하늘, 그 하늘 위의 우주.
학센은 자신의 일을 끝내자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제 내 일은 다 했소.”
나와 플린시아는 아직도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
“…….”
“…….”
【 헬존 】
조홀 시공 아카데미 학장은 조금 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나와 플린시아를 반기는 것보다 천둥의 신 학센이 이곳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해 도저히 믿지 않는 그런 반응이었다.
“아! 정녕 그대가 천둥의 신이 맞소? 아! 어떻게 이런 일.”
학센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후후. 이제 나는 내 임무를 마쳤으니 그저 세상 돌아다니며 방랑의 생활을 할까 하는데요.”
그러자 학장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요! 절대 안 됩니다. 제발 부탁이니 우리 아카데미를 위해 힘을 써 주기를 바랍니다.”
이에 학센은 담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학장이 다시 말했다.
“조홀 은하계에는 총 7,478개의 시공 아카데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그 수많은 아카데미 후보자 중 0순위에 스카웃 대상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이곳까지 방문해 주신 그대를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까? 제발 여기에서 남아 주면 영광에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학센은 여전히 고민스러운 듯.
“글쎄요, 이것 참.”
“제발 부탁이오. 만일 그대가 여기 남아 준다면 정식으로 조홀 아카데미 시공 전사를 이끄는 총수장의 자격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학센은 잠시 더 생각하더니 이내 대답을 했다.
“네, 그러도록 하죠.”
순간 학장은 너무 기뻐 날뛰기까지 했다.
“오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이에 학센은 갑자기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내가 남아 있기로 결정한 것은 그 수장의 자리가 탐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저기 이형도와 플린시아 전사들 때문이오.”
“네?”
“후후, 왠지 모르지만 나는 저들이 마음에 드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학장이 외쳤다.
“어서 말해 보오.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말을 놓는 것이 아닌가.
“이보게, 동생. 앞으로 말을 트겠네. 그래도 내가 열 살은 위인데.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더 친해질 수 있겠고.”
나는 당황했지만 그냥, 뭐.
“아, 네. 그렇게 하시죠.”
“고맙네, 아우.”
그리고 학센은 학장에게 다시 말했다.
“내 조건이라는 게 바로 이거 요. 물론 저기 플린시아 님은 계속 존댓말을 쓰겠소. 나 역시 여자분들께는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오.”
“아, 예. 얼마든지.”
그야말로 학장은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내 숙소 테라스에 나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요즘 호형호제로 가깝게 지내고 있는 학센에 대해 계속 놀라고 있었다.
‘아, 학센 형……. 알면 알수록 내 자신이 초라해질 정도로…….’
은하 연합에서 학센에게 초시공 전사 테스트를 하라고 수도 없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어쨌든 학센은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하늘 위의 존재. 지금까지 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는 초시공 전사 카이였는데, 이제는 학센이란 존재가 그 한 자리를 더 차지하게 띠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번에도 시공 전사로의 임무가 주어졌다. 이번엔 나 혼자 단독으로 해야 할 수행이었고.
* * *
나는 차원 이동 후 심호흡을 크게 하고 신선한 공기부터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변부터 살펴보았다.
푸른 지평선이 맞닿아 있는 드넓은 초원 지대, 이곳은 바로 베른 44차원이었다.
그는 이어 풀 한 줌을 뜯어 바람에 날렸다. 풀들은 각기 자유롭게 여기저기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때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한 인물을 떠올렸다.
하얀 석벽 담장으로 둘러싼 아담한 돔 형태의 집들, 마을은 시골의 전원풍으로써 집 마당마다 형형색색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심어 있었다. 마침 이곳에 봄기운이 흐르는지 무수한 꽃잎들이 미풍에 날아와 그의 손등에 얹어지기도 했다.
초원을 지나 첫 번째로 도착한 인가 마을이었다. 그때 한 어린 소녀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
그녀를 살펴보니 대략 일곱 살쯤이었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뾰족 튀어나온 독특한 귀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뒤에서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아낙네가 나타나더니만 나에게 환한 미소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오셨군요.”
순간 나는 경계했지만 이내 심안을 열고 그녀를 보니 악의가 없음에 일단 답례는 해 주었다.
“예.”
“복장이 특이한데 근처에 사시는 분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멀리서 온 나그네이신 것 같은데 집에서 물 한잔 대접해 드릴 테니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그녀와 소녀를 따라 마당 정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웬 사내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여보, 손님이 오셨어요.”
사내는 잠시 고개를 들어 나를 살펴보더니만 역시나 은근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나그네로 보이시는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의 아내가 재빨리 물 한 잔을 내주었다. 그러자 남편이 핀잔해 주었다.
“광활한 초원을 넘어오신 분인데 물 한 잔 가지고 되겠소. 자, 마침 점심때이니 음식 대접합시다.”
그로부터 잠시 후.
부부는 둘 다 쾌활했고 말이 많았다. 그들은 나를 배려하는 견해에서 이곳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했다. 나 역시 자신이 원한 것이 베른 44차원에 대한 정보였기에 가능한 한 귀를 열고 경청했다.
남편은 여러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 같았고, 현재 차원계에서 벌어지는 일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현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그야말로 혼돈의 서막이라 할까요. 물질문명인 과학과 정신문명의 산물인 염력이 서로 간에 대충돌을 일으키는 시점이기도 하니까요. 그대는 양쪽 중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수백 년 전 초인이 금속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강대해졌을 때부터 그 판도가 달라졌었지요.”
그는 말하다 말고 은하검을 보더니만 잠깐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그 철검을 건네주었다.
사내는 녹이 군데군데 슬어 있는 철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철 같은데.”
“철입니다.”
한데 사내는 녹을 이해 못하는 듯 그것을 손으로 문질러 봤다.
“여기 손에 묻은 건 뭐요?”
“그건 녹이오.”
“혹시 골동품 수집가요?”
“아니오.”
“아차, 제가 어디까지 애기를 어디까지 했더라. 그렇지. 초인들에게 초합금을 휘어지게 하는 능력이 생기자 과학 문명에는 초비상이 걸린 거죠. 어쨌든 현재 우세는 초인들에게 있다고 봐야죠.”
“그렇군요.”
“그래서 시공 전사들이 그들의 능력을 배우고 하수인 역할을 하며 전 차원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이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이오. 그나마 있다면 이곳 베른 44차원일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짐작은 가지만.”
“바로 헤르스 님이 계시기 때문이죠. 그분께서 시공 전사를 다 몰아내고 이곳에 평화를 가져다주었지요. 아마 아스타라노 초인계로부터 외부 차원에 최초로 출현하신 것이 맞을 겁니다. 이곳 베른 차원에 신의 축복이 내렸는지 그분께 강림하시어 모든 것을 정리하셨고.”
나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다시 식사하기 시작했다.
* * *
헤르스는 시종의 도움으로 옷을 차려입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 아래에 보이는 광장에는 시민들로 가득했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 환호성이 들려왔다. 오늘은 그의 277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사람들이 왕궁 앞 광장에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헤르스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또다시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때 왕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30대의 건장한 사내.
“아버님, 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는 헤르스의 수양아들 지드였다.
“지드야.”
“네, 아버님.”
“올해 내 생일을 조촐하게 치르자고 했건만.”
“제 의도가 아닙니다. 이 차원의 모든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생신 축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흠, 그렇다면 오늘 일정이 바쁘겠군.”
“일단 오전 일찍부터 각 차원과 행성으로부터 생신 축하객들의 방문이 있을 것이고, 그 수가 많아 접견실은 넓은 공청회장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참관이 있을 것이니 다소 번잡할 수 있는 점, 양해를 드리옵니다.”
각 생일 축하객들은 온갖 화려한 색상에 볼륨 가득한 위용의 슈트 차림을 하고 있다. 그들은 헤르스 앞에 다가가 공손히 예의를 표했고, 각자 배정받은 자리에 참석해 연회를 즐겼다.
차원계로부터 온 귀빈들은 그 행색이 독특했다. 차원마다 전투 체계가 달랐기에 저마다 고유 전투복을 착용했는데, 참관한 시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위상에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우주 패션쇼가 열리는 현장이랄까.
특히나 기상천외한 무기를 장착한 방문객은 더욱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헤르스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을 일일이 맞아 주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던 수양아들 지드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저들 중에 자객이 숨어 있을까. 실제로 작년에 아버지의 목숨을 노렸던 자가 있었다. 물론 헤르스에 의해 단번에 제압되었다.
한데 축하객 중 지드가 가장 신경 쓰이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메르메스 51차원으로부터 이곳에 내려온 론이란 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