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너 지금 사람이라고 말했지. 그럼 사람답게 도리를 하며 살아!”
그 말에 플린시아는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후 깊은 한숨을 내쉰다.
“후~내가 졌어, 졌다고. 나도 너와 함께 여기 남을래.”
“이제야 사람답게 느껴지는군.”
* * *
고풍스런 분위기의 서재에 책들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한 톨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뒤로 넘긴 중년인은 책장 제일 위쪽으로부터 아주 두툼한 책을 꺼내 들었다.
“오늘은 이걸 파헤쳐 봐야겠군.”
그는 푹신한 의자에 누워 파이프 담배를 물고는 1시간째 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자세마저 흐트러지지 않고 책에 몰두하고 있었으니, 지적과 지성이 가득 베여 있는 깔끔한 이미지의 중년 신사와 같았다.
“흠, 이건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저자의 주관적 사고로 끌어낸 합리적 잣대로 쓴 거로군.”
그는 책을 덮고는 다시 책장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읽을 만한 책은 없는 건가.”
이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흠.”
그때 서재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바젤 님, 집사 에페이옵니다.”
“뭔 일인가?”
“식사 시간이옵니다.”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바젤 님, 오늘은 부인과 아드님 두 분이 이곳에 처음으로 방문한 날입니다. 그러니 함께 식사하시는 것이…….”
“아, 그랬었군. 내가 서재에 한 번 들어오면 바깥일은 까맣게 잊어버린다니까. 후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인데… 이런 무심할 때가.”
바젤은 장남이 선물로 가져온 천궁을 살펴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청강석으로 만든 틀인데 그걸 구부려 시위를 당길 수 있으신 분은 오로지 아버님밖에 없다고 군신(軍神) 아레스 님이 직접 하사하신 것입니다.”
“아레스 님이 말이더냐! 오호라, 내가 49차원으로 온 지 수년 만에 받아 보는 가장 귀한 선물이로구나!”
아내가 물었다.
“얼굴이 무척 수척해지셨어요?”
“요즘 업무가 늘어나서 말이오. 이건 전쟁이나 전투도 아니고 그저 인간들을 수용소에 데려 놓고 인종 청소한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만만치 않다오. 요즘은 가끔 책에 열중하며 일하지만 그조차 무료해서 죽을 지경이오. 그나저나 1년에 한 번씩 말고 두세 번은 와 줘야 그나마 내가 심심치 않을 것 같은데.”
“그건 당신이 업무를 비효율적으로 해서 문제인 거예요. 어차피 인간 청소라면 수하들을 시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인데 굳이 활로 일일이 처리하려니 힘든 거 아닌가요.”
그러자 바젤은 천궁을 집어 들더니만 그걸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이젠 일이 수월해질 것 같구려. 군신 아레스 님이 직접 보내 주신 천궁이 있기에 말이오. 전에 사용하던 폭사체는 한 번에 다섯 명 이상을 소화하기 힘들었는데 이걸로는 아마도…….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시험이나 해 볼까.”
장남이 말했다.
“아레스 님 말씀에 의하면 천궁에 흑룡의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깜짝 놀라는 바젤.
“흑룡이라고! 하하.”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검은 커튼이 가려져 있는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에페! 커튼을 걷게나.”
곧이어 커튼이 걷히자 햇빛이 비추어졌다. 테라스 앞쪽에는 담 하나를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으니, 두 아들은 놀란 기색을 했다.
철망으로 가득 두른 수용소 외벽에는 예사롭지 않은 군장 차림의 전사들이 철통같은 경비를 서고 있었고, 그 안에는 피골이 상접한 인간들이 보였다. 대충 지어진 건물들만 수십 개, 그 주변 흙바닥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자들만 해도 족히 수만 명은 되어 보였다.
“어제보다 많아진 것 같군. 도대체 이놈의 49차원에는 인구가 어느 정도이기에 매일같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고 늘어만 가는 것인지. 하기야 켄타우리 은하계의 인구가 수 조 명인데 그중 숙청당한 인간들만 어마어마하겠지.”
그는 큰아들에 자신이 사용했던 폭사체 활을 주며 한번 시위를 당겨 보라 했다. 하지만 아들은 주저했다.
한 번도 살인 경험이 없는 10대인 그로서는 아무리 아버지가 통치하는 이곳이라지만 그 명령을 단번에 이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제나이더. 살인이라는 개념보다는 제거해야 할 악의 뿌리라 생각하고 활을 당겨 보아라.”
아들이 물었다.
“악의 뿌리라니요?”
“저들은 켄타우리 은하계의 죄인들이란 말이다. 인간은 악의 근원이니 저들을 해하는 행위는 살육이 아닌 성스러운 청소 작업이지. 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 아비는 상계 차원으로부터 자원해 왔고, 현재까지 마왕으로서 그 임무에 충실할 뿐이란다.”
아들이 다시 물었다.
“저들 중에는 여자와 아이들, 노인들도 보입니다. 그들이 어찌 악의 뿌리라 단언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 묻지 말거라, 아들아! 너는 마왕 바젤의 아들로서 나의 성스러운 임무를 도와주는 것뿐 그 이상의 의미는 달지 말거라. 자! 주저하지 말고 시위를 당겨 보아라.”
쾅!
폭사체가 터지자 수용소 안은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팔다리를 잃은 자들, 피로 범벅이 된 자식을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 젊은이들은 부상자들을 둘러메고 건물 안으로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왕 바젤은 아들의 첫 시위에 매우 흡족한 반응이었다.
“죽음이란 저들에게조차 사치요, 귀중한 선물이니라. 다른 곳에는 나처럼 단번에 생명을 끊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고문까지 자행하고 있으니 이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노라. 자! 이번엔 둘째가 한번 해 보거라. 저들에게 이 비탄한 세상에서의 숨을 더 이상 허락지 말고 영원한 안식처에 그 폭사체로 인도하여라. 그것만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길일 테니 말이다.”
쾅
폭사체가 터지자 수용소 안으로 또다시 절규로 가득했다.
바젤은 그런 그들의 아비규환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두 아들이 대견스럽다고나 할까. 49차원 마왕의 전설로 기록될 자신과 그 후계자인 아들들의 첫 번째 담력을 위한 시험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는 이번엔 그 자신이 천궁을 직접 들고 시위를 당겼다.
“흑룡의 정령이라! 이거 기대가 되는군! 그것도 군신 아레스 님의 권능으로 탄생한 병기라. 하하, 영광이로다! 영광!”
홱!
크앙.
화살은 순식간에 거대한 흑룡으로 변했고, 그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수용소 안을 마구 헤집었다.
크앙!
“아악!”
“컥!”
닥치는 대로 물고 집어삼키고 심지어 건물마저 파괴했으니, 그 안으로 피신해 들어간 자들의 잘린 사체 조각들이 허공에 피와 골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의 발사로 수백 명이 즉사했으니 마왕 바젤은 천궁을 보며 감탄해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철학의 묘미를 얻는 것보다도 이 단순하고 무식한 천궁의 촉감에 나는 더욱 크나큰 쾌감이 밀려오는 것 같군, 하하.”
그의 눈빛이 다시 수용소에 집중되었다. 이번엔 주로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 왼편 시설 쪽이었다.
“죄인들, 그 근본의 싹을 자르기 위해 이 정의의 활을 드는 것이니 나를 원망치 말지어다. 아니, 오히려 내게 감사할지어다.”
두 번째 발사한 활 역시 순식간에 흑룡으로 변했고, 이어 무서운 속도로 그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돌연 흑룡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바젤은 깜짝 놀라 그곳을 살폈다. 그런데 허공으로부터 한 인형이 나타나더니 점차 그 형체를 드러냈다.
금발이 치렁치렁 어깨까지 내려온 곱상한 청년, 하지만 그의 차림새는 범상치 않은 흑색 군장으로써 그 볼륨은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바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활을 빼앗고 뚝 부러트렸다.
“언제까지 이런 애들 놀음을 할 참인가?”
마왕 바젤은 마치 고귀한 신분을 대하는 것마냥 조심히 말했다.
“…군신 아레스 님. 여, 여기는 웬일이십니까?”
잠시 후.
테라스에 바젤은 따뜻한 차 한잔 조심스럽게 내어 와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레스 님, 드시죠.”
이에 아레스는 말없이 찻잔을 들고 입김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석양 쪽으로 고개를 돌려 황혼에 물든 주황빛 양떼구름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후~”
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바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그제야 아레스는 바젤을 바라보며 한마디 한다.
“누가 자네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가?”
“변하다니요? 제가요?”
아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후후, 마왕 바젤이라……. 여기 49차원에서 왕 노릇만 하니 그럴 만도 하겠군…….”
“무슨 말씀인지요?”
“인간들 청소하는 게 그렇게도 신이 나는가? 그래도 자네는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망, 망가지다니요. 제가 뭘 잘못했기에……?”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한때 자네의 그 기개가 보이지 않아 애석할 뿐일세. 기억하는가? 우리가 에이른 대륙에서 함께했던 나날들……. 그때 자네는 적어도 신념이라는 게 있었지. 함께 목표를 이루어 가며 전우애도 나누었고. 그런데 이게 뭔가? 아무리 켄타우리 은하계와 협정을 맺고 이곳 49차원을 통치한다고 해서 심심풀이로 그토록 많은 살생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 말에 바젤은 잠시 숙연해졌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그런 그에게 아레스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네를 탓하는 게 아니네……. 그저 지난 세월이 그립다 보니 내 잠시 회한에 빠졌나 보군…….”
그때 바젤은 아레스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무래도 불안합니다…….”
“죽었네.”
“죽다니요? 누, 누가요?”
“헤르페스…….”
순간 바젤은 깜짝 놀랐다. 아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헤르페스라니요! 설마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둠의 제왕 헤르페스 말입니까?”
아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 않는 일일세.”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레스는 다시 석양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찻잔을 들어 다시 마셨다.
후루룩
“차가 식었군. 따뜻한 게 좋았는데…….”
바젤은 아직도 흥분한 얼굴이었고 다시 언성을 높여 물었다.
“도대체 헤르페스가 왜 죽었습니까?”
“살해당했네.”
“살해라니요! 아니, 세상에 헤르페스를 죽일 만큼 강한 자가 어떻게 존재한다고?”
“누군가 존재하니 죽었겠지.”
“혹시 시공 전사입니까? 그런 놈들이라면 이곳에만 100명이 넘게 왔고, 다 제 손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시공 전사는 아니겠지. 헤르페스는 자네보다 적어도 두세 단계는 훨씬 강했으니까.”
“그럼 누굽니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를 제압할 정도면 지금 저와 말씀을 나누고 계신 군신 아레스 님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때 바젤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 설마. 초시공 전사…….”
그러자 아레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상상이 지나치군. 초시공 전사는 우리와 노는 물이 다르네. 그들이 활약하는 곳은 이런 변방 은하계가 아닌 대우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