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녀의 말에 의하면 시공 아카데미도 급수가 있다나.
특히 현재 가장 주가가 잘나가는 곳은 마젤란 성운 소속의 르페드니아 시공 아카데미로써, 그곳 출신의 시공 전사들이 은하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명성이 자자하다고 그랬다.
사실 그들이 수행하고 성공한 임무만 수백 개가 넘었으니, 이제 달랑 두 개의 임무를 수행한 나와 플린시아는 상대적으로 한없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르페드니아 시공 아카데미에서 베가 행성에 파견 나온 시공 전사들의 숫자면 총 177명 중에서 100명에 이르렀고, 그들 하나하나는 각자 상당한 명성이 자자한 자들이라 그랬다.
베가 행성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첫 번째 이유가 그것이었고, 또 하나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시공 전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르페드니아 출신의 ‘마아탱’이라는 최고의 전투력을 지닌 자가 이번 임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현재까지 총 149번째 임무에 성공했고, 은하에서도 그 위명은 상당했다.
그리고 또 한 존재, 비록 르페드니아 시공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지만 총 88번의 임무를 수행하고 성공한 가렉 시공 아카데미 출신의 ‘아카시렌’이라는 시공 전사였다. 얼핏 이름을 들어 보면 여자 같은데, 어쨌든 그녀의 명성도 베가 행성에서는 꽤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 외의 나머지 시공 전사들 역시 각 임무만 수십 번을 성공한 베테랑들이니, 은하 변방에 자리 잡은 조홀 시공 아카데미에서, 이제 임무 두 번을 성공한 나와 플린시아를 알아보고 대접을 해 주는 게 어찌 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뭐, 그렇게 받아들이니 일단 마음은 편했다.
오늘은 베가 행성에 파견 나온 총 177명의 시공 전사가 함께 모이는 날이었다. 베가 행성 정부에서 그동안 행성 전사 교육 기관에서 발생한 사건의 모든 내용을 발표하는 브리핑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와 플린시아 역시 이 회의 참석해 있었고, 이어 베가 행성의 수사 총책임자인 아론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저희 베가 행성을 찾아 주신 177명의 시공 전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은하 역사상 시공 전사가 이토록 많이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이고, 그게 바로 베가 행성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한없는 영광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이어 브리핑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베가 행성에서 일어난 사건은 저희로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의 비극으로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입니다. 이어 이 사건의 발단이 되는 그 원인을 추정하자면, 제일 먼저 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소형 블랙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베가 행성을 덮침으로써 이와 같은 엄청난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수사 팀장 아론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 앞에 놓인 기기를 작동시켜 허공에 홀로그램을 떠오르게 했다. 그것은 행성의 배열을 나타내는 우주 모형이었는데 중심에 베가 행성이 보였고, 그 주변에 플레이아데스 성운의 전체 모습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론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일단 블랙홀이 베가 행성을 덮쳤으리란 가정하에 성운 궤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보다시피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지요. 다만 베가 행성의 대기권의 그 진공 상태에 변화가 있고, 상층부가 전보다 밑으로 하강했었죠.”
“…….”
“그리고 우리 정부는 과연 이게 무슨 영향을 끼쳤을지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대기권 외의 진공 상태가 하강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틈이 생겼다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참석자 중 누군가 되물었다.
“틈이라니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시공 뒤틀림 현상입니다. 물론 우리 베가 행성 과학으로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현상이라 지금 시점으로는 분명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 입구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그러자 누군가 다시 질문을 했다.
“흠, 제가 생각하기로 블랙홀로 인하여 시공의 틈이 생겼다면 그것은 블랙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화이트홀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군요.”
그러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현재 최종적인 추정은 바로 화이트홀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블랙홀로부터 화이트홀의 출구가 생겼다면 바로 그 안에서 어떤 존재가 나타나기라도 했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은하의 어떤 존재도 블랙홀 내부를 탐사한 적이 없을 정도로 미지의 세계이지만 현재 일어나는 사건을 미루어 볼 때 블랙홀에서 정체 모를 존재가 나타나야지만 현재 이곳 베가 행성 전사 교육 기관의 살인 사건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가 누구죠?”
“바로 그걸 밝히기 위해 저의 베가 행성 정부는 여러분과 같은 시공 전사분들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랙홀에도 인간이 사나? 그 안에서 누군가 나타났다니?”
“흠, 이건 정말 획기적인 사건이로군. 우주에는 아직 블랙홀에 대해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블랙홀에서 화이트홀로 빠져나온 존재가 있다면 과연 누굴까?”
“그자가 이번 사선의 범인일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제법 흥미롭군.”
그때 아론이 다시 말문을 이어 갔다.
“아직 확실한 정보는 없지만 사건 정황을 볼 때 분명 그 어떤 존재가 그곳을 통해 이 베가 행성에 엄청난 혼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로 그자를 여러분이 찾아내어 조처하기를 바랍니다.”
그때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말문을 여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은빛 머리칼을 올백으로 넘긴, 아주 곱상한 청년이었다.
“브리핑 내용이 수준 미달이군요. 그저 이론에만 치우친 추측과 가설만 난무하고 실질적인 증거나 해법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쓸데없는 소리.”
순간 여기저기서 또다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아탱이다.”
“르페드니아 최고의 시공 전사 마아탱 말이지.”
“와우! 이런 데서 그를 보다니. 이거 운이 좋은데.”
“여하튼 그의 말도 맞는 것 같군. 여기 설명이 너무 이론적으로만 이미 하나의 결정을 지은 것 같은데 아직은 무리수가 있는 것 같고.”
그때 마아탱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론 님, 애초 블랙홀이라는 개념은 우리 시공 전사에게조차 낯선 공간으로 그 안에서 화이트홀을 통해 어떤 존재가 나타나 이와 같은 살인 사건을 벌였다는 그 자체가 난센스 같습니다. 어쨌든 이미 언급한 것은 참고로 하되 그냥 내 힘으로 그 범인을 잡는 데 최선을 다하리라 약속드립니다.”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고, 회의에 참석했던 시공 전사들은 모두 건물 밖으로 나와 자기 숙소로 향했다. 나와 플린시아 역시 다소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연병장을 걷고 있었다.
“형도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블랙홀 말이야.”
“블랙홀? 글쎄다. 나 역시 그 안에서 어떤 존재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 안 해 봤어.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거든.”
“절대?”
“응, 절대. 블랙홀은 빛까지 빨아들이는 절대 특이점이 있는 마의 공간이거든. 그런데 그 안에 사람이 산다는 것도 황당한 얘기이고, 더군다나 그 존재가 이곳에 나와서 사람들을 살해하면서 다닌다고? 후후, 만일 내가 작가가 되어 판타지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런 내용을 썼다가는 독자들에게 욕만 바가지로 먹을 거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
그러자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
“저는 말이 된다고 보는데요.”
순간 나와 플린시아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금발의 한 여자가 서 있었고, 우릴 보자 방긋 웃었다.
“아! 미안해요. 두 분의 대화에 껴들어서요.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가렉 시공 아카데미 출신의 아카시렌이라 합니다.”
우린 깜짝 놀랐다. 이미 그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에 말이다. 그녀는 현재 이곳에 온 177명의 시공 전사 중에서 르페드니아 시공 아카데미의 마아탱 그다음으로 유명한 시공 전사였다. 무려 여든여덟 번의 임무를 성공한, 살아 있는 전설.
“아. 그대에 대해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임무만 여든여덟 번…….”
“그 얘기 그만해요. 뭐, 횟수가 중요하건 가요. 아마도 여기 계신 시공 전사분들 역시 다들 임무에 성공할 텐데요. 아무튼 아까 말씀 중 블랙홀에 관한 것이 있는데 그 얘기나 마저 하죠. 저는 개인적으로 블랙홀 안에도 그 어떤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근거에 의해 그렇게 믿는 거죠?”
“근거는 없어요.”
“근거가 없다니요?”
“그저 느낌으로 그렇다는 거죠.”
“느낌이요?”
“네, 느낌. 다른 말로는 직관. 그리고 저는 원래 세상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가능성부터 살펴봅니다. 아까 절대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곳에 신기하게도 일이 터지곤 했으니까요. 사실 저는 그런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지금까지 총 여든여덟 번의 임무에 성공할 수 있었고요. 물론 이번에도 뭔가 감이 오는 것 같네요.”
그 말에 나와 플린시아는 꿀 먹은 언어 장애인이 된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카시렌은 다소 쑥스러운 듯 말했다.
“이거, 초면에 제가 말이 너무 많았나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저희 역시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어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례지만 어느 아카데미에서 오셨나요.”
“네, 저희는 조홀 시공 아카데미에서 왔습니다.”
순간 그녀가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오호! 정말요! 조홀 시공 아카데미라면! 초시공 전사 카이 님을 배출한 바로 그곳이 맞지요!”
이번에는 플린시아가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어머! 세상에! 정말 영광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이 여자는 왜 이러나? 플린시아 말고 그 녀석을 추앙하는 여자가 더 있음에 왠지 씁쓸함이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더 야단법석을 친다고 할까.
“제 평생소원이 제발 죽기 전에 초시공 전사 입단 시험을 한 번만 쳐 보는 것이에요! 아! 정말! 제발!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군요.”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뭐, 초시공 전사 입단 시험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럼요! 입단 시험을 치를 자격만 주어져도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라고요!”
“도대체 시험 자격이 뭡니까?”
“그건 시공 전사로서 임무를 150회 이상 성공해야 하고, 은하 연합에서 아주 걸출한 공훈을 세운 자에게 특별 추천까지 들어가야 가능합니다. 거기에다 본인 스스로가 정말이지 너무 강대하여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할 때 은하 연합에서 주관하는 에너지 융합 시스템의 모의 전투 시험에 사전 합격이 되어야 가능한 거죠.”
나는 말을 듣다 머리가 아파져 왔다. 뭐가 그리도 복잡한지 말이다. 하지만 아카시렌은 말을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 목소리 톤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후~ 정말 부러워요. 현재 여기 모인 177명 중에 한 분이 이번 임무만 성공하면 초시공 전사 입단 시험 자격을 얻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