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플린시아도 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여자에게 당연히 대하는 것일 뿐이지.”
“무례? 호호, 정곡이 찔리니 그걸 무례라고 둘러치네. 원래 인간들이 다 너처럼 감정에 휘말리면서도 스스로 태연한 척 사는 거야. 그냥 대놓고 두려우면 두렵고,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해. 무슨 자기가 대단한 신의 위치에 놓인 마냥 으스대기는!”
“뭐라고! 지금 말 다 했어요!”
나는 당황했다. 저러다 싸움이 날 것 같아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플린시아부터 말렸다.
“그만해.”
“그만하기를 뭘 그만해! 너도 저 여자 말하는 거 다 들었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내뱉고 말았다.
“저분이 한 얘기가 틀린 것은 없잖아.”
순간 플린시아는 나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아니, 지금 네 편, 내 편 얘기하는 거 아니잖아. 그냥 객관적으로 볼 때 저분의 말 내용이 맞는 거 아냐?”
“이형도! 너 정말!”
“아이, 그냥 진정 좀 해라. 지금 우리가 이분하고 싸우러 온 것도 아니잖아. 해결해야 할 적은 따로 있다고. 시공 전사의 임무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네가 참아.”
그런데 리베카가 한마디 더 했다.
“쯧쯧, 그래도 남자가 훨씬 낫군. 그거에 비해서 너는 이 남자의 발가락 무좀만도 못한 천한 존재야!”
순간 플린시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법 스태프를 꺼내 들어 그녀를 공격하려고 했다. 리베카 역시 전자 마나 기기를 집어 들어 발사하려고 했고.
바로 그때였다. 서로 간의 충돌이 일어나기 직전, 어디선가 들려오는 굉음.
쿵!
쿵!
그리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비명.
“카엘이 지하 기지 출입문을 부숴 버리고 이곳에 들어왔대!”
“뭐라고! 그놈이!”
“지금 다들 도망치고 난리가 났어!”
“카엘이 쳐들어왔어! 당장 피해!”
“여기는 지하 기지인데 어디로 피하라는 거야!”
“정말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이에 나와 플린시아는 급하게 정원 바깥 문을 열고 나갔다. 사람들은 이곳 저것을 뛰어다니며 계속해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마침 저쪽에서 사령관 타키타카와 아테온이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사령관이 내게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이죠?”
“카엘이 지하 지기를 뚫고 여기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아니, 이곳은 방어막으로 그가 오지 못할 것이라고 지난번에.”
“그가 방어막을 조종하는 우리 경비 전사들에게 사념을 집어넣고 스스로 출입문을 열게 했소. 아무튼 지금 시간이 없으니 일단 시공 전사들께서는 나를 따라서 오기 바랍니다!”
“어디로 가려고요!”
“당신들이 카엘을 막아야겠습니다. 그래서 광장으로 가는 겁니다. 그가 거기 있소.”
이에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그래 봐야 소용없어. 내 남편의 폭풍 마나 기기에는 세상 그 누구도 무용지물일 테니.”
그러자 사령관은 그녀에게 예의를 표하며 말했다.
“리베카 님… 그래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럼 나도 함께 가 주지. 오랜만의 그 남편이라는 작자의 면상도 좀 보게.”
하지만 사령관은 무슨 연유가 있는지 다소 그녀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리베카 님, 그래도 카엘 앞에 나서는 것은……. 그가 분명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그 말에 리베카는 씁쓸하게 웃는다.
“어차피 그는 세상 끝까지라도 나를 찾아내어 죽일 거야.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를 피해서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고.”
“카엘은 지금도 당신이 자신의 발명품을 훔쳐 달아난 것에 큰 앙심을 품고 있을 텐데요.”
그러자 리베카는 품속에서 전자 마나 기기를 꺼내 들어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흠, 이것도 남편의 발명품이지만 그래도 꽤 잘 만들었어. 적어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잖아. 그런데 나중에 그가 미쳐서 다시 발명한 폭풍 마나 기기는 그야말로 악마의 선물이야. 너무 안타까워. 남편은 처음에 나처럼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자는 의미에서 함께 연구하고 밤을 지새웠던 시간만 20년이 넘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
사령관은 다시 그녀를 만류했다.
“그래도 리베카 님은 어디론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자 마나의 위력은 폭풍 마나의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아냐, 나는 꼭 남편을 만나 볼 거야. 그리고 가능성이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그를 설득해 볼 거야. 적어도 그가 인간이라면 최소한 선이라는 게 있겠지……. 나는 그걸 믿어 보려고 해…….”
그녀는 말이 끝나자 광장 쪽으로 향했다. 사령관 역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따라나섰고.
그때 아테온이 뭐라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왜 그래! 마치 이 전투가 당연히 패배할 것처럼. 그럴 필요 없어. 나를 믿어 봐! 아직 이형도, 플린시아 너희들에게 내 무기를 보여 준 적이 없는데, 아마 보면 깜짝 놀랄걸! 더군다나 여기 사령관 타키타카 님이 이곳의 과학 문명으로 탄생한 새로운 에너지를 내 무기에 결합했으니 그 위력은 감히 상상조차 못할 거야!”
인제 보니 지난번 아테온이 사령관하고 은밀하게 대화를 나눈 내용이 바로 저것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태연자약하게 여기저기 놀러 다녔고.
하지만 그가 어찌 알랴.
지금 이 싸움은 물질적인, 그 어떤 파괴적인 무기와도 다른 개념 때문에 승패가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든 우리 시공 전사도 앞선 리베카와 사령관을 따라 광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광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분수대 앞쪽에 대략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중년인이 뭔가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 앞으로 우리 일행이 나서자 그가 말문을 열었다.
“사령관, 그리고 리베카……. 그런데 다른 세 명은 누구지?”
그러자 리베카가 그에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보, 이제 그만해.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는 일은 당신만 더욱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게 할 뿐이란 것을 몰라?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둬.”
이에 카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나를 피해 끝까지 숨어 지낼 줄 알았건만 오늘은 제법 용기를 낸 것 같군. 감히 내 앞에 나타나서 설교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래! 내게서 훔친 전자 마나 기기를 가지고 가서 어떻게 했지? 과연 네가 그렇게 희망했듯이 사람들이 행복해하던가?”
“그들은 행복해했어. 정말로. 바로 당신이 발명한 전자 마나 기기 덕분에 말이야.”
순간 카엘이 소리쳤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건 행복이 아니라 그들의 가식의 탈을 잠시 벗겨 낸 것뿐이지! 절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인간이란 행복을 누릴 자격도 없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는 하등 존재들이야. 도대체 내가 얼마나, 어떻게 긴 시간 동안 설명해야지만 말귀를 알아듣겠어!”
그러자 리베카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더니 그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여보, 아들 일은 이제 잊어버려. 제발. 이런다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니 제발 정신을 차려.”
“닥쳐! 닥치라고! 너같이 과거의 불행을 깨끗이 지워 버리려는 인간들 때문에 세상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는 거라고! 분명하게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인데 어떻게 그걸 잊으란 말이냐고! 그러고도 네가 엄마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 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그 사건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냐고!”
리베카는 울면서 말했다.
“흑, 그렇다고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들은 아들의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아냐! 그들도 연관이 있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지! 인간은 탐욕과 욕망의 동물로 그들이 내세우는 가식은 아주 역겨워서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어 갔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병사로 싸우러 간 자식이 전쟁 한 번 못해 보고 내무반에서 상급자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봐!”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야.”
“아냐! 모두가 다 그래! 바로 그놈들을 잉태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 모든 부모와 자식들이 원흉이라고.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인간이라는 거지! 그래서 다들 나처럼 고통과 절망에 몸부림치면서 평생을 그렇게 지내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이 기계를 발명한 거고!”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폭풍 마나 기기를 꺼내 발사하려고 했다.
그때 아테온이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도저히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군! 내가 당장! 이자를 해치울 테니 다들 보기나 해!”
그러고는 허리춤으로부터 금속 무기를 들어 그에게 조준을 했다.
“이건 열 광폭 발사체이다. 단 한 방이면 충분하지. 특히 너처럼 말 많은 작자에게는 아주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때 카엘의 폭풍 마나 기기가 먼저 섬광을 발사했고, 그 빛이 아테온을 휘감았다.
파팟!
“뭐야!”
아테온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기류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렇지 않잖아. 이거 무기 맞아?”
그때였다. 갑자기 아테온은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 뭐, 뭐야.”
이내 괴로운 신음을 뱉어 내며 마구 발악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공격하기라도 하는 듯 그는 손으로 가까운 주변을 주먹질하며 뭐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리 꺼져! 네가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너는 죽었잖아! 그런데 왜!”
그는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 계속해서 미친 듯이 외쳤다.
“아악! 너, 너는 또 뭐야. 분명 내 손에 뒈진 놈인데! 어떻게 살아난 거지? 아아아, 저리 꺼져!”
그는 주변을 뛰어다니다가 멈추었다. 그러더니 허리를 숙이고 겁을 내며 마구 소리쳤다.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그럼 이 무기를 발사해 버릴 거야!”
결국 아테온은 광기를 참지 못하고 무기를 발사했다. 그런데 그 목표는 카엘이 아닌 헛것이 보이는 허공이었다.
파파파팟!
쾅!
푸른 광선 줄기가 지하 기지의 저 높은 천장을 강타했고, 이어 잔해들이 마구 떨어졌다.
우두둑!
하지만 아테온은 계속해서 무기를 발사했으며 여기저기 폭발음이 들려왔다.
쾅!
우두둑.
쾅!
이를 지켜보던 사령관이 외쳤다.
“저러다 지하 기지가 무너져 내리겠어! 당장 말려야 하오!”
이에 내가 나서려 했는데 어느 사이 플린시아는 아테온에게 다가가 그의 무기를 뺏어 버렸다.
아테온은 아예 실성한 듯 그 자리 엎드려 두 손 모아 누군가에게 싹싹 빌었다.
플린시아는 이번에 카엘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상대해 주겠다.”
카엘은 코웃음을 치며 폭풍 마나를 다시 집어 들었다.
“흥, 얼마든지. 너도 곧 저놈처럼 미쳐서 발광할 테니.”
플린시아는 자신만만했다.
“당신이야말로 얼마든지 해 볼 테면 해 봐. 나는 그따위 사념에 내 정신이 지배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
“후후, 과연 그럴까! 세상에 의식을 지닌 존재들이라면 절대 이 폭풍 마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장담하지. 절대로!”
그러고는 폭풍 마나를 발사해 버렸다.
파파파팟.
검은 기류가 플린시아를 감쌌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마치 일부러 그 위력이 얼마인지 스스로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