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아마 우리가 온 걸 알고 도망쳤겠지.”
“농담할 기분 아니야.”
“농담 아닌데. 정말 다들 도망갔어.”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는 게 아니라 이 은하검이 그렇게 말해 주는데…….”
그제야 플린시아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검이? 어떻게?”
“글쎄다. 신기하게도 이놈이 말도 할 줄 아네.”
“말을?”
“그래, 말.”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
“그래? 그럼 나한테만 들리는 건가. 아니면 텔레파시로 전하는 건가.”
플린시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따지듯 물었다.
“검이 너한테 무슨 말을 하는데?”
“달의 왕 가란시스가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대.”
순간 플린시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릴 따라온다고! 아무도 없는데.”
“없긴 왜 없어. 네 등 뒤에 서 있잖아.”
“어디?”
나는 손짓으로 그를 가리켰다.
“거기.”
그제야 그녀는 무형의 뭔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헉! 뭐, 뭐야!”
“후후, 너답지 않게 왜 놀라고 그래. 명색이 시공 전사면 체통을 지켜야지.”
그때 무형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인형. 그는 대머리의, 건장한 체격을 지닌 중년인이었다. 온통 빨간색의 군장과 보호대 차림에 팔에는 반월형 검이 장착되어 있었고. 그리고 굵직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를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다.
“대머리? 아냐아냐, 이건 인격 모독이지. 달의 왕 가란시스?”
그러자 그는 히쭉 웃으며 뭔가 아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제 보니 시공 전사들이로군.”
시공 전사라는 말에 플린시아는 깜짝 놀랐다.
“우리 신분을 알고 있어!”
나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굳이 우리를 소개할 수고를 덜어 주니 고맙네.”
플린시아는 내 이런 여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형도야! 상대는 달의 왕 가란시스라고! 창조주 아나키를 제압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냥 죽이면 되지.”
나는 은하검을 천천히 들어 올려 어깨에 걸친 채 가란시스를 바라보았다.
“절대 악치고는 그 면상이 선해 보이는데. 하기야 사람은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
그런 내 행동에 이번엔 가란시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후후, 주제에 시공 전사라고 꽤 자신만만하군. 하기야 여기 왔던 다른 시공 전사들도 그렇게 여유 부리다 내게 개죽음당했지.”
그 말에 플린시아는 충격에 빠진 듯 눈을 크게 떴다.
“행방불명이 아니라 다 죽임을 당했다고!”
가란시스는 자신의 병기인 반월형 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나는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의 왕 가란시스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거룩한 존재로다.”
“쳇. 신이 아니라 아직 신의 경지에 이른,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존재라 다행이군. 그리고 감히 상대할 수 없다고?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충만한 거냐?”
“그러는 너는 뭘 믿고 내 앞에 그토록 여유를 부리는 것인가.”
“내가 뭘 믿고 까부냐고?”
나는 내 은하검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 검 믿고.”
그러자 그가 마구 비웃었다.
“하하하, 내 수만 년을 살다 살다가 그렇게 쓰레기 같은 무기는 처음 보는군. 녹슬고 부식도 모자라 검날이 부러진 검이라니! 지금 나와 장난하자 건가!”
“맞아, 장난하는 거.”
“뭐라고!”
“그리고 이 검 말이야. 그냥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그거 큰 실수하는 거야. 솔직히 나는 이 검을 얻고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어서 이 검의 능력이 뭔지 전혀 모르거든. 그래서 더욱 궁금해. 과연 이놈이 무슨 기술을 보여 줄까, 하고 말이야.”
플린시아는 이런 내 모습에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형도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자신감을 느끼는 건 좋지만 자만감은 큰 화를 부를 수 있어.”
“내가 지금 자만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니? 흠. 그렇게 함께 다니면서 아직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많구나. 하기야 나도 꿈속에 얻는 아이템이 매번 바뀌니 그것에 적응하려고 하다 보면 헷갈릴 때가 아주 많아.”
그때 가란시스가 외쳤다.
“시공 전사들은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가? 지금까지 나와 맞붙은 네 명의 시공 전사들 역시 너처럼 허풍 치다가 골로 가셨지.”
“흠, 명색이 달의 왕 가란시스인데 저 말하는 모습 좀 보게나. 너무 경망하고 가벼워 보이는데.”
그 순간 가란시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반월형 무기를 앞세워 내게 공격했다.
순간.
쩍!
놈의 몸통이 그대로 두 쪽이 나서 즉사했다.
“아, 입 아파. 그냥 빨리 죽일걸. 괜히 떠들었잖아.”
플린시아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그냥 검으로 쭉 갈랐지.”
“그렇게 쉽게?”
“응.”
“상대는 창조주 아나키를 죽인 달의 왕인데…….”
그때 나는 내 은하검을 다시 그녀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 검이 그렇게 하래. 나머지는 자기 알아서 한다고.”
“검이?”
“응, 그래서 편해. 내가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사실 나는 이 검의 원주인이자 무림인이 연공한 신검대법을 각성한 터라 내가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무공과 내공의 갑자 수위를 그냥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 말은 무협지에 등장하는 절세 신공 비급서 수백 권을 터득한 셈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싸우지도 않고 상대에 따라 그 승부를 미리 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긴 것이다.
물론 달의 왕 가란시스는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도 공력이 제일 높았다. 하지만 내게는 무공 이외에 한 가지 확실한 무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은하검이다.
그리고 조금 전 플린시아에게 말한 내용 중 검이 내게 말을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이놈은 내게 처음부터 그 승부 결과를 알려 주었고, 난 그대로 시행했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검이 말하기를 이제 자기 능력의 천 분의 1조차 사용하지 않았다며 아주 자랑질 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은하검에 대해 새로운 것을 느낀다.
은하검이라는 그 웅장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이놈은 매우 촐싹거리고 시끄럽다는 것을…….
* * *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엄마…….’
지금은 뭘 하고 계실까. 우리 착한 엄마…….
‘아! 어머니……. 정말 보고 싶어요.’
요즘 들어서 내게는 아주 견디기 힘든 병이 생겼다. 그건 바로 고향을 그리는 향수병이었다.
지구를 떠난 지 어언 3년……. 날짜를 세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어머니. 나는 그 무슨 이유로 그런 어머니 곁을 떠나 이런 방랑 생활을 하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서 어머니를 빼놓고는 절대 행복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무려 3년이 지나는 동안 이제야 엄마가 보고 싶으니.
지난 모험에 있어서 나는 엄마가 내게 전해 준 말씀으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지혜는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 정도랄까. 그런데 그게 내 삶에 있어서 이 정도로 위대하고 크게 느껴지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엄마의 말씀은 이렇게 머나먼 우주에서조차 큰 빛을 발휘했고, 오늘날 나를 이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도 충분했다.
내가 다른 길로 삐딱하게 행동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본분을 지키게 하여 준 엄마.
‘아, 돌아가고 싶다. 지구로…….’
그때였다.
“형도야, 또 무슨 생각해?”
플린시아였다.
“아, 아니. 그냥 뭐 이런저런 생각…….”
“후후, 이제 시공 아카데미에서 모든 학생이 우러러보는 영웅이 되셨는데 어깨 피고 다녀야지, 왜 요즘 들어 그렇게 풀 죽은 모습이니?”
“상부에서는 뭐래?”
“뭐라긴. 이번 레무리아 차원에서 공을 세운 덕분인지 그냥 푹 휴가를 즐기래.”
“결국 이번에도 다음 임무를 배정받지 못했군.”
“왜 그렇게 임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마치 여기 시공 아카데미를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그건 아니야. 그냥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서 임무에 충실해지고 싶어.”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지? 그 고민, 나한테 말해 줄 수 없어?”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플린시아에게 물었다.
“너는 네 고향이 그립지 않니?”
그녀는 내게 다가오더니 테라스 난간을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물론 그립지. 너무도……. 하지만 여기도 좋아.”
“이곳이 좋다고?”
“그래, 난 여기 시공 아카데미가 너무 좋아.”
“그건 왜지?”
“일단 시공 전사가 되었다는 우월감, 그리고…….”
“그리고 뭐?”
“형도 너를 만났다는 것.”
“나를?”
그녀는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
“후후,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괜히 나만 고백하게 되었네.”
“아니, 나도 너를 만나서 좋아.”
“그 좋다는 감정만으로는 만족 못하겠는걸?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지 그래.”
순간 나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풋, 후후.”
“웃어? 지금 웃었어!”
“그래, 그나마 너 때문에 여기서 버티고 있다.”
“쳇,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말고 솔직히 말해.”
“뭘?”
“나에 대해서.”
“흠, 만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오히려 놀림을 받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
“글쎄다.”
“나에 대한 감정에 그만큼 확신이 없다는 말로 들리네.”
“너 오늘따라 왜 그러니? 어색하게 말이야.”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다고 생각해?”
“그럼, 어색하고말고. 갑자기 네가 어울리지도 않게 사랑 타령이나 하는데.”
“그래, 그만하자. 뭐, 원래 너는 그런 놈이니까.”
“놈이라고? 너 혹시 화났니?”
순간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테라스 난간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지는 석양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플린시아, 후후. 보면 볼수록 묘한 매력이 있단 말이야. 그런데 그 매력이라는 게 언뜻 다가오는 게 아닌… 뭐랄까?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보고 싶고. 도대체 뭐지, 이 감정…….’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해가 완전히 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문뜩 플린시아의 말이 떠올랐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쳇, 어떻게 생각하기는. 그냥 동료일 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막상 뭔가 찜찜했다. 그냥 동료는 아닌 것 같고, 그보다 가까운 사이……. 아니, 그보다 더 가까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사랑? 사랑이라……. 내가 정말 사랑이라도 하는 걸까…….’
* * *
그로부터 두 달 후.
시공 아카데미 연병장을 걷던 내게 플린시아가 황급하게 뛰어왔다.
“형도야!”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내 귀중한 고독을 방해하려고 하냐?”
“드디어 우리에게 임무가 떨어졌어.”
나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임무라고?”
“후후, 바로 내일 출발하래.”
“내일! 그래, 장소는 어디야?”
“타이탄 행성.”
“차원이 아니라 행성이라고?”
“그것도 여기처럼 과학 문명이 있는 행성.”
“과학 문명?”
* * *
그다음 날.
웅~
창밖을 보니 온통 별 무리였다. 내가 살면서 설마하니 이처럼 거대한 우주 전함을 타고 바깥 전경을 구경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내 이번 임무 배정지는 타이탄 행성이다. 그리고 플린시아와 또 한 조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이번 조는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라는 사실. 그 다른 한 명은 아테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