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그때 플린시아는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너 정말 아나키 님의 환생자 아니니? 어떻게 보면 그는 훗날 자신의 환생 사실을 알고 그런 예언을 남긴 것 같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후후, 이거 점점 흥미로워지는데. 과연…….”
나는 헤라에게 물었다.
“뭐, 선과 악의 개념은 대충 알아들었고, 지금부터 우리가 뭘 해야 하죠?”
“아나키 님의 유해를 가지고 그의 권능을 이용하는 쟈크딘으로부터 더 이상 이 대륙의 모든 주민이 고통받지 않게 해야겠죠.”
“그 의미는 그를 손봐 주자, 그건가요?”
헤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나와 플린시아는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는 사막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었다.
“왜 사막에 온 거지?”
플린시아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내 은하검을 꺼내 들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갑자기 왜 검을?”
“이 녀석이 이곳으로 안내해 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글쎄다, 나도 아직은 잘 몰라. 이 녹슬고 부러진 검이 왜 나를 자꾸 이곳으로 데려오려는 건지.”
“네가 그렇게 얘기하면 나는 더 혼란스럽다고. 그냥 쉽게 이야기해 주면 안 돼?”
“후후, 이 검이 피에 굶주려 먹잇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그리고 난 아직 이 검의 속성을 모르는 상태이고.”
“흠. 참, 너란 사람은 정말 알면 알수록 복잡해. 하기야 뭔가 특별하기에 남들보다 시공 아카데미를 그 짧은 시간에 졸업했겠지.”
“그 말,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되나?”
“받아들이고 자시고 언제까지 이 황량한 사막을 걸을 거야?”
그때 은하검에서 나는 진동음.
웅~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오긴 뭘 와! 여긴 정말이지 생명체 하나 없는 사막 한가운데라고.”
“과연 그럴까? 그럼 저기 저 노인은 뭐지?”
플린시아는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깜짝 놀랐다.
“진짜 노인이 보이네? 그것도 뭔가 나무를 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때 노인이 우릴 발견하고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더러 오래.”
잠시 후 우리는 노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먼저 웃으며 맞이했다.
“허허, 그렇지 않아도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마침 묘목을 다 심었고. 자! 일단 여기 앉아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그런 노인의 행동에 플린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신지요?”
“난 쟈크딘이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쟈크딘!”
그리고 뒤로 물러나서 마법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뒤로 물리고 내가 앞으로 나섰다.
“지난번에 네게 기회를 줬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야.”
그러고는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올 줄 어떻게 아셨소?”
“내가 만든 일곱 개의 결계를 아무렇지 않게 뚫고 여기까지 온 그대들이 누구인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소.”
“…….”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보아하니 내게 용건이 있는 모양인데……. 혹시 무력을 사용하고 싶고?”
나는 잠시 노인을 살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무력이 아니면 뭐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다짜고짜 검부터 내밀지 않으니 뭔가 나와 말이 통하는 자 같구려. 솔직히 나는 이제 백 살을 앞둔 늙은이요. 무력을 통해 승부를 가릴 만큼 젊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그대의 도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요. 다만 서로 간에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원한다오.”
“대화요……?”
“그렇소… 대화……. 그걸로도 충분히 승패를 가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어차피 서로의 공력은 이미 궁극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대를 살펴보니 내가 지금까지 만난 적 중 가장 고강한 존재인 것 같소. 그래서 말인데, 만일 대화 중에 그대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자가 아닌 가벼운 존재라면 나는 사력을 다해 내 권능을 사용할 것이요. 물론 그 반대로 그대가 내가 생각한 인물보다 훨씬 위라면 나는 깨끗이 굴복하고 스스로 소멸할 것이오. 어떻소? 정녕 나와 대화할 마음이 있소?”
나는 주저 없이 노인 옆에 앉아 버렸다.
“노인장, 사막에 묘목을 심는 이유가 뭡니까?”
내 질문에 쟈크딘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이유라고요? 글쎄올시다. 나는 여기에다 그저 예쁜 정원을 만들고 싶어서.”
“사막은 온종일 태양이 이글거리고 비도 내리지 않는 척박한 땅인데, 하필 왜 이런 곳에 정원을 만들려고 하는 거죠?”
그때 노인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알겠소?”
그 순간 노인의 신체에서 어마어마한 공력이 느껴졌다. 내가 답변을 잘못하면 당장이라도 무력을 사용하려는 듯 말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희망이겠죠.”
“희망이라……?”
“무의 장소에서 유를 창조하는 바람일까요. 물론 그 바람은 황당하고 허무한 소망이겠지만 대신 그 안에서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지요.”
“그게 바로 희망이라는 것이요?”
“그렇습니다. 저는 희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믿소?”
“희망은 좋은 것이니까요.”
“희망은 좋은 것이라…….”
“그 자체를 품고만 있어도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원동력이 되니까요.”
나는 놀랍게도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내게 해 주신 그 말을 그대로 읊는 중이었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서 쟈크딘에게 그 말을 하는지 나도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잠시 내뿜었던 공력이 사라졌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아직 내가 치매에 걸리지는 않았나 보오. 적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병들지는 않았으니 말이오. 그럼 이번엔 이걸 묻고 싶소. 과연 이곳에 내가 심은 묘목들이 제대로 잘 자랄까요?”
그 질문에는 즉각 대답했다.
“아니요. 다 타들어 가서 죽을 것입니다.”
“그럼 희망을 품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 거요?”
나는 또다시 엄마의 말을 인용했다.
“희망이란 좌절하거나 실망할 때 그 빛을 더욱 발하게 되니까요.”
노인은 다시 웃었다.
“허허. 그러니까, 나더러 계속해서 포기하지 말고 여기에다 묘목을 심으라는 것이요?”
이번엔 갑자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관념으로 대답했다.
“인간에게 권능이란 쓸모없는 쓰레기죠. 아니, 오히려 그 영혼이 진리로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그 힘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악이기 때문이죠.”
나는 내가 말해 놓고도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 안의 관념 작용이 노인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개념일 수도 있었고. 어쨌든 노인이 어떤 대답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다소 걱정이 되곤 했다.
그때였다. 노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아뿔싸, 했다. 젠장!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 아냐!
그런데 그때 갑자기 노인이 호탕하게 웃는 게 아닌가.
“하하하, 역시 보통 분이 아니구려! 현재 내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환히 꿰뚫어 보다니요! 맞소, 나는 창조주 아나키의 유해를 찾아서 그동안 그분의 권능을 지겹도록 이용했소이다. 그리고 그게 나를 더욱 기쁘게 만들 줄 알았소!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해 보니, 내가 진정 원하는 행복은 찾을 수가 없었소. 그리고 그 이유가 뭔지 항상 마음이 무겁고 자유롭지 못했지요.”
“…….”
“그런데 그대 말을 들으니 결국 권능이란 그저 나 자신의 외부를 다스리는 정도의 역할만 할 뿐, 정작 내 내면의 영혼은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을 이제 알았소. 허허, 고맙소. 나는 이제 자유롭게 살아갈 것 같소. 물론 이 생에서는 힘들 것 같고,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살아 보리다!”
순간 그는 손으로 자기 머리를 쳤고, 그대로 재로 변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았고.
“…….”
그때 플린시아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형도야, 어떻게 된 거야?”
“보다시피 소멸해 버렸어.”
“네가 한 거야?”
“아니, 자기가 스스로…….”
“왜?”
“글쎄다.”
“무슨 말을 했기에?”
“별말 하지 않았는데…….”
【 과학 문명의 첨단 병기 】
그로부터 며칠 후.
천공 전사 에피루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쟈크딘이 정말 자기 스스로 소멸을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그때 헤라가 말문을 열었다.
“저는 이해가 되는데요. 형도 님 얘기를 들어 보니 그가 그런 결정을 한 게 아마도 아나키 님의 권능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가 그제야 깨닫고 결심을 한 것 같아요.”
에피루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헤라 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권능의 본질은 그 힘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에 달렸지요. 이를테면 본인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타인을 위한 것이냐, 하는 원초적인 문제. 쟈크딘은 전자를 선택했으니 당연히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허망함을 느꼈겠지요. 권능이란 바로 타인에게 베풀고 사랑하는 법으로 유지되는, 아주 오묘한 에너지거든요.”
에피루는 급기야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호! 저는 그렇게 설명하셔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때 나는 플린시아에게 물었다.
“이제 남은 건?”
“달의 왕 가란시스.”
“그렇지. 절대 악… 그 작자를 그대로 두면 안 되겠지.”
“그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같아.”
“그나저나 그는 어디에 있지?”
그러자 우리 대화를 엿들은 헤라가 말했다.
“저기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 중 하나였다. 그건 초승달 모양인데, 지구의 달과 다른 점은 그 색깔이 매우 붉다는 것이다.
“저기를 어떻게 가죠?”
그러자 헤라가 우리 앞에 포탈 하나를 형성했다.
파팟!
“이 포탈이 그곳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 * *
“몽환적이야. 정말 꿈꾸는 듯 정신마저 아찔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거야!”
하지만 플린시아는 여전히 매우 긴장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놀러 온 거 아니라고. 그러니 바짝 긴장해!”
“아니, 긴장하고 싶어도 도저히 긴장이 안 돼. 너는 이런 장엄한 광경을 보고도 감흥이 없냐? 참, 어떻게 자랐기에 정서가 그 모양이니. 봐 봐, 여기가 낮인지 밤인지 모를 정도로 저 하늘에 마구 그려지는 화려한 유성 쇼. 와! 지금도 운석 수십 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고!”
결국 그녀는 내게 화를 냈다.
“형도야! 정신 차려! 여기는 절대 악 가란시스의 소굴이라고!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고!”
“아! 가란시스는 좋겠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사니 말이야. 그리고 이 멋진 건물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르테논 신전을 한 백 개는 모아 놓은 것처럼 한없이 웅장하고 멋지네.”
“제발 그만하고 안으로 더 들어가 보자.”
“후후, 나야 오케이지. 과연 도시 깊숙한 곳에는 그 어떤 멋진 예술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잠시 후 우리는 포장도로를 따라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기둥 조각상들 사이로 들어갔다.
플린시아는 긴장했는지 아예 마법 스태프를 꺼내 전방을 주시하며 여기저기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형도야,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뭔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