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당장 나를 풀어 줘! 당장!”
그의 발버둥에 우리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번엔 내가 말했다.
“여기에 갇힌 연유나 알아야 풀어 주든 말든 하지.”
그러자 사내는 다시 기억을 더듬다가 이어 큰 소리를 쳤다.
“아! 그래, 내 이름이 기억이 났어! 나, 나는! 에피루! 천공 전사 에피루가 맞아.”
“천공 전사?”
그리고 나와 플린시아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공 전사라면?”
“레무리아 차원의 창조주 아나키의 직속 수하, 그 천공 전사를 말하는 것이겠지?”
우린 시공 전사로서 임무를 맡을 때 상부에서 전해 들은 이곳 레무리아 차원에 대한 정보를 상기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천공 전사 에피루이다. 그 빌어먹을 달의 왕 가란시스가 우리를 이런 곳에다 가두었지!”
달의 왕도, 가란시스도 알고 있었다. 창조주 아나키와 대결하고 그를 제거한, 태곳적 반란군의 우두머리.
사내는 이제는 아예 미친 듯 울부짖기까지 했다.
“흑! 흑! 오, 군주! 아나키시여! 정말 볼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가 군주님을 지키지 못했기에 그런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흑! 아나키시여! 제발 저희를 용서하기를 바랍니다. 아! 아!”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다소 동정심이 일었다.
“플린시아, 이자 말이야. 도대체 여기에 얼마 동안 갇혀 있었던 거지?”
그녀도 잘 모르는 듯 고민했다.
“흠, 태곳적이라 했으니 수천 년? 아니면 수만 년? 그나저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텐데. 당장 이자를 어떡해야 하지?”
그 말에 나도 고민되었다.
“글쎄다. 대충 들어 보면 이자는 레무리아의 창조주 아나키의 수하 천공 전사이니 멀리 보는 관점에서 우리에게 적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풀어 주자니 이 자가 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를 것 같고.”
그때 플린시아는 무슨 이유인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호호. 왜, 겁나니?”
“겁나다니?”
“이자가 너를 공격할까 봐서?”
그 말에 나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겁난다, 겁나. 아주 무서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으로 너무 떨리고 두렵다, 왜!”
“그냥 풀어 주자.”
그녀는 나와 자기 전투력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나 역시 뭐, 그런 셈이고.
천공 전사의 강함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건 가오 문제이다. 명색이 시공 전사로서 첫 임무를 받고 이곳에 왔는데 오자마자 겁을 낸다는 것이 웃긴 일이니까.
잠시 후 사슬에서 풀려난 천공 전사는 다행히 우리에게 그 어떤 위협적인 짓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고맙소, 나를 풀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하오!”
* * *
천공 전사 에피루는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하고 있었다. 반드시 뭘 보여 줄 게 있다고.
그도 비행 능력이 있는지라 우리는 하늘을 날며 그 뒤를 쫓아갔다. 그가 물어봤다.
“그대들은 누구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고 나를 풀어 준 것이요?”
“우리가 누구라는 것은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풀어 준 것은 그저 우연히 지나다가 한 일이지요.”
“흠, 뭔지 모르지만 그대들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분명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다 왔나요?”
“저기 산맥만 넘으면 목적지가 보일 것이오.”
잠시 후 산맥을 넘자마자 정말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성 같은데, 한눈에 봐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와도 같았다.
“다 왔소.”
“여긴 어딥니까?”
“젠타 성이오.”
“젠타…….?”
“천공 전사들의 수많은 요새 중 하나이오.”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뭡니까?”
“그대들에게 보여 줄 게 있습니다.”
“보여 주다니요? 그게 뭔지 궁금하군요.”
잠시 후 우리는 성루에 착륙했고, 이어 그를 따라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제법 넓은 통로를 지나 드넓은 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때 에피루는 홀 입구 앞에서 뭔가 감흥에 젖은 듯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 드디어 내 안식처로 돌아왔군…….”
이어 그는 우리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안심하시오.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까. 한때는 제 동료들인 천공 전사들이 여기서 만찬을 즐기며 술과 음식으로 여러 날 동안 밤을 지새우곤 했던 추억이 어린 장소이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것이 이겁니까?”
“아니요, 그건 더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숨겨져 있다고요? 무슨 중요한 물건이기에?”
“물건이 아니오. 살아 있는 생명체이죠.”
“생명체요?”
“물론 지금은 안식의 방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지만 이제 내가 왔으니 그는 다시 깨어날 것이오.”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잠시 후 우리는 아주 깊은 지하 석실을 몇 개나 통과했는지 몰랐다.
지구에서 지하 주차장의 기준으로 볼 때 아마 지하 7층 정도 될까.
덜컹!
“바로 이 방이요.”
나와 플린시아는 그의 안내에 방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 여기는?”
“그렇소. 여기는 시체실이요.”
“왜 이런 곳에 우릴 안내한 거죠?”
“바로 그분이 여기 계시니까요.”
“도대체 그분이 누굽니까?”
하지만 그는 동문서답을 했다.
“이렇게 시체처럼 보이게 해야만 놈들로부터 그분의 육체가 온전해질 수 있었죠.”
그리고 그는 시체들 가운데 유독 보랏빛 천으로 둘둘 감긴 한 시체를 극도로 조심스럽게 일으켜 천을 벗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천이 벗겨지면서 한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다시 울먹거리며 외쳤다.
“오호! 헤라 님! 드디어 제가 왔습니다. 이제 부활하시어 저희를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물었다.
“도대체 그분은 누구죠?”
“창조주 아나키의 연인이신 헤라입니다.”
“창조주 아나키의 연인?”
그때 에피루는 부활 의식을 하는 듯 손에서 하늘색 광채를 뿜어냈는데, 그 빛은 곧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그 시신의 몸이 꿈틀거렸다.
“오호! 제발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희 천공 전사들은 오직 헤라 님이 마지막 희망이오니 어서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정말로 헤라라 불리는 그녀는 눈꺼풀을 움직였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활의 의식이 성공을 한 것 같습니다. 오호!”
이윽고 그녀는 완전히 눈을 떴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천공 전사를 보자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흑. 에, 에피루 님…….”
“헤라 님, 저 에피루 맞습니다. 천공 전사의 수장 에피루 말입니다.”
그녀는 자기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제가 정말 부활한 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위대한 창조주 아나키 님의 안배 덕분입니다. 그분은 반란군 달의 왕 가란시스에게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안위보다 헤라 님에게 나머지 모든 힘을 부여함으로써 거룩한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 말에 헤라는 이번에 참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흑! 흑! 저 때문에… 아나키 님이. 흑.”
“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나키 님은 달의 왕 가란시스에게 제압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니까요?”
“그건 무슨 말이죠?”
“어차피 그게 그분의 운명이었습니다. 먼 훗날에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시어 미리 선수를 친 것입니다.”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라고요?”
“자! 보세요. 저도 이렇게 깨어나서 헤라 님을 부활 시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나키 님 말씀대로 반드시 먼 미래에 우리를 도와줄 구원자들이 강림했습니다.”
헤라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보였다.
“구원자들이라니요?”
그때 에피루가 나와 플린시아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바로 저들이 아나키 님이 예언하신 그 구원자들이 틀림없습니다.”
그 말에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아나키가 예언한 그 구원자들이라고……?”
* * *
나와 플린시아는 성루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까만 카펫에 무수한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것처럼, 은하수는 그 우윳빛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플린시아.”
“응.”
“구원자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했지.”
“그걸 믿어?”
이에 플린시아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되물었다.
“너는 믿어?”
나는 그 말에 당장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는 왠지 믿고 싶어.”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후후. 무려 수만 년 전, 그것도 태곳적에 레무리아 창조주가 예언한 그 구원자가 우리라는 말을 믿는다고?”
“믿는다고 말하지 않았어. 믿고 싶다고 그랬지.”
“그 의미는 뭐야?”
“그들은 정말이지 간절한 도움을 원하는 것 같아. 그래서 정말 우리가 구원자가 되어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야.”
“결국 그 얘기가 그 얘기네. 솔직히 나는 믿고 싶은 게 아니라 진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설명하자면 좀 지루할지 모르지만……. 지구에는 여러 종교가 있는데, 그중 불교라는 게 있어. 거기서 주장하는 교리가 바로 윤회설이거든.”
“윤회설? 그게 뭔데?”
“사람은 단 한 번의 생을 살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태어난다는 거.”
그녀는 흥미로운 듯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계속해 봐.”
“이전에 살았던 삶을 전생이라 부르고, 그 후에 다시 태어나 사는 것을 환생이라 하지. 지금부터 그 대목이 중요해. 어쩌면 내 아주 오래전 전생이 그였는지도…….”
순간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호호, 그럼 네가 아나키였다는 말이니.”
“이건 그렇게 건성으로 듣고 웃는 타임이 아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후. 나도 지구라는 곳에서, 한 번은 태어나고 싶다. 너를 보니 지구는 참 다양하고 독특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아. 지구에 관한 네 얘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
나는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고,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지구는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이지.”
“천국과 지옥이라니?”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살아가는, 아주 혹독한 행성이라고. 어떨 때는 뛸 듯이 기뻐하다가 어떨 때는 한없는 우울증에 빠져들고. 그러다 다시 미친놈처럼 마구 웃고 싶고… 그러다가 다시 펑펑 울고……. 그런 감정과 희로애락이 태어나자마자 끝없이 반복되는 곳…….”
그녀는 내 얘기를 듣고는 다소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지구라는 곳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모양이지? 그 때문에 충격을 받고 슬퍼하다가, 승리하면 이기고.”
“아니, 그건 단순한 전쟁의 개념이 아니야.”
“전쟁의 개념이 아니라니?”
“전시가 아닌 평화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극과 극의 감정을 느끼지.”
“평화가 이어지는 동안에? 그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또 불교 용어를 써서 미안한데, 그걸 번뇌라고 하지.”
“번뇌?”
“자기 안에 갇혀서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히는 것. 누가 옆에서 압박도 주지 않았는데 자기가 괜히 쓸데없는 공상과 상상을 만들어 내서 스스로 공격하는 거.”
“도대체 그런 걸 왜 하는 거지?”
“그게 인간이거든. 감정의 변화가 심해지다 보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정신만 망치는 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