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피해요! 당장 이곳으로부터 도망가든지!”
“피하다니요? 이곳은 레이어 사냥꾼들의 사냥터가 아닙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은빛 군장의 청년이 외쳤다.
“맞아요, 레이어 사냥터! 하지만 지금은 돌발 상황입니다. 그러니 일단 당신들은 하류 지역으로 내려가요!”
플린시아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말란타라 금제 구역이 무너졌어요.”
“금제 구역이라니요?”
오히려 은빛 군장의 그 두 남녀가 더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레이어 사냥꾼이라면 금제 구역을 모른단 말인가요?”
이번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얼마 전 레이어 사냥꾼 자격을 획득하고 여기는 처음이라서…….”
이 변명이 통할지 모르지만 일단 던져 보았다. 그러자 은빛 군장 사내가 말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단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말란타라 금제 구역은 괴수들의 성소라는 사실은 잘 알 겁니다. 쟈크딘 님이 창조한 수많은 괴수가 서식한 곳, 그래서 대륙 각지로부터 많은 사냥꾼이 몰려들었죠. 물론 괴수들의 그 공격성 난이도에 따라 사냥꾼들 역시 그 급수가 매겨져 각자 어려운 수련 후 자격증을 받았고, 당신들처럼 제2 등급 레이어 사냥꾼도 생겨난 것입니다.”
“…….”
“무엇보다도 쟈크딘 님이 내리신 은총에 힘입어 모든 괴수는 죽을 때 반드시 황금보다도 엄청난 가격으로 팔 수 있는 셀라륨이라는 정수를 남기기에 이곳은 사냥꾼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전사와 마법사들이 우후죽순 몰려들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은빛 군장 사내는 말하다 말고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씨가 마르기 시작했죠. 말란타라의 모든 괴수가 점점 그 개체 수를 잃어 가는데 여전히 대륙에서는 기존의 전사들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가 더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셀라륨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고, 결국 대륙에 엄청난 경제적 불균등을 초래하게 되었지요.”
“…….”
“전사와 마법사들은 더욱 부유해지고, 그렇지 못한 일반인들은 생활이 더욱 가난해지고. 결국 이를 지켜보던 쟈크딘 님은 화가 크게 났습니다. 그렇게 만든 것이 말란타라의 금제 구역이었습니다. 그곳에 쟈크딘 님께서 더 이상 전사와 마법사, 사냥꾼들이 쉽게 사냥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괴물을 창조하게 되었죠.”
그 대목에서 플린시아가 물었다.
“엄청난 괴물이라고요? 그들은 얼마나 강하기에 그런 표현을 쓰는 거죠?”
“강한 정도가 아닙니다. 금제 구역에 서식하는 그놈들은 기존의 사냥 방식으로는 절대 사냥할 수 없을 만큼 셌는데, 이제 그들이 오히려 인간을 사냥하는 무서운 현상이 발생해 버린 겁니다. 쟈크딘 님 역시 자신이 너무 강력한 괴수를 만들어 냈나 후회할 정도였죠. 그도 그럴 것이, 단 한 마리가 출몰해서 무려 200명이 넘는 전사와 마법사들을 죽였으니까요.”
“…….”
“이에 쟈크딘 님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부랴부랴 말란타라에 금제 구역을 만들어 그들을 그 안에 가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조차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놈들에게는 뛰어난 지능은 물론 상상 이상의 전투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들이 진화함에 따라 이제는 대륙의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졌지요.”
그때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진화라니요? 그건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놈들에게는 자체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거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힘이 세지면서 결국 그들조차 자기 에너지를 누르지 못하고 금제 구역의 경계를 뚫고 대거 탈출한 상태입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이죠.”
“그 숫자가 대략 몇 마리나 됩니까?”
그러자 은빛 군장 사내는 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 1만 마리 정도에 달합니다.”
순간 나와 플린시아는 깜짝 놀랐다.
“1만 마리요? 와, 엄청난 숫자네.”
“문제는 그들이 금제 구역을 탈출하고 대륙으로 출몰한다면 아마도 인명 피해는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테고, 결국 모든 나라와 모든 영토가 초토화될 것이라는 거죠.”
“흠, 듣고 보니 큰일 났네.”
“자, 그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기 전에 당신들도 당장 피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당신들은 누구기에 그런 사실을 미리 알 수 있는 거죠?”
“우린 헤트벅트 제국의 성기사입니다. 이런 사태를 미리 예견하고 제국으로부터 파견 나온 괴수 조사원이죠.”
“성기사…….”
그때였다.
우두두!
갑자기 숲 지대 전체가 마치 폭풍의 가운데 놓인 것처럼 마구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휘힝!
우두두.
그때 은빛 군장 사내는 체념한 듯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 피신하기에는.”
여자 역시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대항해 봐야 소용없어요.”
그때 플린시아는 마법 스태프를 꺼내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은빛 군장 여자가 다시 말했다.
“대항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때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르며 그녀에게 말했다.
“후후, 걱정하지 말아요. 이 여자, 싸움 엄청나게 잘해요.”
그러자 그녀가 나를 오히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들 같은 레이어 사냥꾼들은 아마도 놈들을 보기도 전에 그 자리에 얼어붙어 죽을 것입니다.”
이에 나는 다시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우린 조금 특별한 레이어 사냥꾼들이라서 괜찮아요.”
그때 나는 플린시아에게 말했다.
“나도 도와줄까?”
그녀의 퉁명스러운 한마디.
“형도, 넌 나서지 마.”
“엥? 혼자 해 보겠다던가? 뭐, 그렇다면 알아서 해. 뭐, 생각해 보니 내가 굳이 나서도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의 대화를 들은 두 성기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말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이 여자, 싸움 엄청나게 잘한다고요. 그러니 그렇게 똥 씹은 표정 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믿고 보기만 하면 되니까, 후후.”
결국 그들은 우리를 미친 사람처럼 아예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때 숲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괴수들.
크앙!
놈들은 저마다 울부짖으며 노도와도 같이 구릉지 아래쪽으로 무섭게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플린시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숫자가 많으니 이 방법을 사용해야겠군.”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태프를 하늘 쪽으로 향하게 했다.
순간 스태프 끝에서 한 줄기 파란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순식간에 먹구름이 만들어졌다.
스스스.
그때였다.
우르릉, 쾅!
번쩍!
이내 먹구름 여기저기서 번개가 내리치더니, 그 아래 괴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쾅!
“크악!”
쾅!
“켁!”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벼락은 괴수들의 모여 있는 곳만 골라 강타했고, 한 번에 수십에서 수백 마리가 그대로 타 죽거나 재가 되었다.
쾅!
“크아아악!”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벼락이 한두 개가 아니라 동시에 수십 번 내리치며 각각의 지역에 정확히 꽂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살육 현상.
쾅!
“크악!”
놈들은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오지도 못하고 저 앞에서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새삼 느꼈다. 그녀의 저런 능력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사실 시공 아카데미에서는 저런 전투 기술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다. 장소와 환경이 비좁은 탓에 언제나 가상 홀로그램 모의시험에서만 그 전투 기술을 간간이 봤을 뿐. 이렇게 드넓은 환경과 영토에서 막상 보니 실로 그 회색 마법의 한계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 내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것은, 저 벼락치기 전투 기술은 그녀가 지닌 능력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신일 수도 있어……. 자기 세상에서는…….’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지만 그녀의 공력은 한계가 없었던가.
천둥과 벼락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제 저 산맥에서 그 아래 구릉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갔으며 그 위에 산처럼 쌓인 괴수들의 시체.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그 처참했던 도륙의 현장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스태프를 거두고 자기 할 일은 다 끝났다는 듯 그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후후, 멋있는 척하기는.”
“왜? 난 멋있으면 안 되는 거니?”
“하기야, 신께서 멋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겠지.”
“그 말, 비아냥처럼 들리는데.”
“아니, 이번엔 진심이다. 정말 멋있었어.”
“그렇다면 고마워.”
한편 이를 옆에서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본 두 성기사는 멍할 뿐 더 이상의 할 말조차 일었다.
단 한 여자 마법사가 1만여 마리를 모조리 도륙한 것에 이 대륙에서 그 누군들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
그로부터 보름 후.
나와 플린시아는 두 성기사의 초대를 받고 그녀의 나라 헤트벅트 제국의 황궁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바로 황제가 우리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플린시아, 사람들이 너한테만 관심을 가지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네.”
“그야 내가 공훈을 세웠으니까.”
“원래 속셈이 그런 거였어?”
“후후,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혼자서 다 물리쳤잖아.”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나도 싸울걸.”
“너까지 나설 정도는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이윽고 우린 황궁의 로비로 들어섰다. 그리고 저 상석에는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황금빛 왕관을 쓴 것을 보니 황제가 분명했다. 그가 플린시아를 보자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마중 나왔다.
“오! 정말 그대를 직접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었소.”
플린시아는 엷은 미소로 최대한 예의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니요! 짐이 오히려 영광이오. 금제 구역의 괴수 1만여 마리를 물리친 그대를 영웅이가 부르기도 모자를 정도로 나는 정말 한없이 기쁘고 또 기뻐서 아주 미칠 지경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젠장, 역시 황제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플린시아만 예뻐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기 귀빈석으로 가서 앉아 편히 쉬시오.”
곧이어 우린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 앞 테이블에 놓인 산해진미들. 오늘 행사 성격이 만찬회 같은데, 마침 배가 고파 나는 그 즉시 고기 다리 하나를 집어 먹으려고 했다.
그때 플린시아가 가볍게 내 팔을 잡으며 만류했다.
“형도야, 예의를 차려야지.”
“예의라니?”
“아직 황제께서 드시지도 않았는데 먼저 손이 가면 어떡해?”
그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아, 미안.”
잠시 후 황제는 연단 앞으로 와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많은 귀빈에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내가 황제 보위에 오른 지 근 20년 만에 최고로 경사스러운 날이 아닐까 합니다. 저 흉악한 악마 쟈크딘에 의해 창조된 금제 구역의 괴수들이 더 이상 이 나라와 대륙을 위협하지 못하는 날이니까요. 그리고 그 괴수를 모조리 처치한 영웅이 바로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다들 그녀를 향해 힘찬 박수를 부탁하겠습니다.”
귀빈들의 이목은 플린시아에게 집중이 되었고, 이내 우렁찬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에 플린시아는 다소 쑥스러운 듯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