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길고 길었던 양극의 대립, 창조주 아나키와 달의 왕 가란시스의 겨루기가 끝난 뒤에 가장 들뜬 자들은 신들의 유품 수집가(蒐集家)들이었다.
그들은 두 거대한 신들의 결투보다 그 둘이 격돌하며 지상에 흩뜨린 장비 잔해들을 얻는 것에만 온통 집중했고, 어쩌다 부스러기 조각들 한 개나마 얻은 수집가는 그야말로 전 차원에서 몇 개의 광활한 영역을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자들이요, 그보다 위인 천계의 영토 한 자락을 움켜쥘 수 있는 축복받은 영혼들이다.
천계 변방 마지막 좌표를 따라가다 보면 유난히 초록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차원이 존재하는데, 레무리아 차원 시점에서 지상계라 불리는, 넓디넓은 숲으로 이루어진 타이탄 숲이 그것이다. 그래서 ‘초원의 성소’라고도 불렸다.
그들에게도 전설로 내려왔다. 저 까마득히 먼 상위차원에서 두 신이 싸우면서 뿌려 놓은 그 무수한 흔적들이 이곳 가장 저열하고도 미천한 구석까지 닿았을 것이라는 사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 수집가라 하는 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초록의 나라. 하지만 오늘날 주민들은 그들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에 경외심을 느끼며 자신들마저 창조주의 흔적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건만 아직도 아크랄 숲을 배회하는 수집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쟈크딘, 사람들은 이 대륙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바로 유품 수집가가 아닌 인체 수집가인 쟈크딘, 바로 그라고 말한다.
다른 수집가들은 잔재들을 찾지 못하고 이곳을 떠났지만 쟈크딘은 얼토당토않지도 않은 신들의 인체, 혹은 유골을 찾아 지금도 광활한 밀림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숲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훗날 그를 추적하던 다른 무리의 수집가들은 그가 사라진 곳에서 그 누구 것인지 모를 고대 무덤 한 개가 파헤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레무리아 차원에 대한 정보는 여기까지.”
플린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결국 쟈크딘이 창조주 아나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힘을 이용해 오늘날 레무리아 대륙을 대혼란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 시공 전사의 임무는 쟈크딘으로부터 핍박과 공포의 통치를 받는 이곳의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는 일이고.”
“그런데 과연 쟈크딘 한 존재 때문에 시공 전사들이 행방불명된 것일까? 거기에 의문이 들지 않아?”
“그거야 쟈크딘에게 당할 수도 있는 문제잖아.”
“글쎄다. 쟈크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시공 전사들이 죽은 것도 아니고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아. 적어도 그들은 첨단 과학 기기를 이용해 자신이 행방불명되기 전에 위치를 알렸을 테고, 또한 쟈크딘에 대한 기록도 전송했을 텐데 그런 정보가 전혀 없잖아. 그건 쟈크딘 외에 제3의 누군가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제3의 누군가? 혹시 아나키에게 반란을 일으킨 달의 왕 가란시스가 아닐까? 그는 아나키를 제압할 만큼 강한 전투력을 지녔으니 말이야.”
“그것도 가능성이 있지.”
플린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만 내게 말했다.
“형도야,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그저 그럴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아. 일단 몸으로 직접 뛰면서 레무리아 차원에 대한 정보를 알아 가는 게 순서라고 봐.”
“알았다, 알았어! 일단 이곳을 탐색하는 게 먼저겠지. 그럼 시작!”
나는 일단 숲 안쪽으로 향했다. 그때 들려오는 플린시아의 음성.
“같이 가. 우린 한 조잖아.”
“붙어서 가면 남들이 오해해. 둘이 연애한다고.”
“그럼 안 되나. 임무도 수행하고, 데이트도 하고 일거양득이네. 후후.”
“쳇, 지구나 여기나 여자들은 다 똑같네. 먼저 설치는 것은.”
“너, 지구에서 여자 친구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그냥 그렇다는 거지. 더 이상 따지지 마.”
그로부터 반나절이 흘렀다.
우리는 숲을 지나서 강 하나를 건넜고, 이번엔 협곡 안으로 향했다.
“흠, 레무리아 차원은 그 모든 것이 규모가 크네. 나무나 꽃, 산 등이 지구에 있는 것들과 비교해서 아마도 수십에서 수백 배는 커 보여.”
“그건 네 고향인 지구의 규모가 작은 것 같은데. 우리 고향도 이 정도는 돼.”
“아, 놔!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
“후후.”
“웃지 마라. 정든다.”
“정 들면 더 좋지.”
“그나저나 협곡 전체가 붉은 색상을 띠고 있는 게 이쯤에서 뭔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군.”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도 조용했던 협곡 왼편 절벽 모퉁이로부터 진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앙!
“저건 뭐야?”
내 말에 플린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괴물 같은데.”
“괴물은 나도 알거든. 무슨 종이냐가 궁금한 거지.”
“글쎄, 크기는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이고 네 발로 걷는 데다가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송곳니를 보아서 육식 동물 같은데…….”
“게다가 더럽게 긴 발톱에 피딱지가 더럭더럭 붙어 있으니, 아마 공격 무기가 저거?”
“형도야, 놈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뒤로 물러나 있어. 내가 처리할게.”
“그냥 함께 싸우자.”
“싸우다니? 이건 사냥이지.”
“아무튼.”
곧이어 나와 플린시아는 우리에게 돌진해 들어오는 정체 모를 괴수를 향해 무기를 빼 들었다.
삭.
파팟!
꽥!
풀썩!
괴수는 우리의 공격을 받고 맥없이 쓰러졌다.
나는 다가서 놈을 살폈다.
“즉사했는데.”
“죽이지 말 걸 그랬나?”
“안 그랬으면?”
“그냥 살아 있을 때 조금 더 살펴보려고.”
“어차피 이곳에 이런 괴수들 천지일 텐데, 그냥 협곡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그렇게 또 1시간여가 흘렀다.
이번에는 다시 강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강폭이 엄청 넓어.”
그녀의 말에 나는 천공 날개를 펼쳤다.
“날아가자.”
“그러지, 뭐.”
우리는 함께 강 위를 비행하였다. 그런데 강물 색깔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물이 빨게.”
“전부는 아니고 저기 상류 쪽이 유독 그런데.”
“그럼 그리 가 볼까.”
“좋지.”
잠시 후 그곳 상류 지역을 살펴본 우리는 물이 붉은 이유를 알았다. 바로 수십 마리나 되는 괴수의 시체들이 피를 흘리고 물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뭔 일이지?”
“누군가 괴수를 죽인 것 같은데.”
“내려가 보자.”
곧이어 우리는 상류 강기슭에 착륙했다.
그때 들려오는 남자 목소리.
“내 사냥감 훔쳤다가는 그대로 뒈지는 수가 있어!”
누군가 봤더니 상반신이 거의 알몸인 청년이 검을 등에 멘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살펴보며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
“에잇! 썅. 여기는 내 구역이니까 당장 꺼져!”
그때 플린시아가 그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우린 사냥이나 사냥감을 뺏으러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게 있다니? 이 지역은 처음이셔?”
“네, 처음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차림새 하며 말투 하며 이방인이 분명하군. 어디서 오셨소?”
“아, 네. 우린 여행객인데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어디죠?”
“말란타라.”
“말란타라요?”
사내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말란타라를 모르쇼? 아무리 여행객이지만 이 대륙에서 말란타라를 모르는 족속은 없는데. 도대체 당신들 하늘에서 떨어졌고, 땅에서 기어 나왔소? 여기는 바로 괴수들의 성소(聖所)인 말란타라요.”
이쯤에서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알죠. 괴수들의 성소! 다만 우리가 정녕 그 유명한 곳에 와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 잠시 멍했던 거요. 그나저나 사냥은 많이 했소?”
내가 화제를 돌리자 사내는 그제야 흡족한 듯 대답했다.
“오늘 수학이 좋소. 열일곱 마리나 잡았으니.”
“혼자서요?”
“후후, 야록을 잡는 건 웬만한 사냥꾼이면 손쉽죠. 원래 여기 강 지역은 등급이 낮은 괴수들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상류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무시무시한 종들이 넘치고 넘쳤죠. 물론 나는 거기에는 절대 가지 않소.”
“그럼 그곳은 누가 갑니까?”
“최소 레이어급의 사냥꾼들만이 그곳에서 사냥 놀이를 하죠.”
“레이어급 사냥꾼들이요?”
“그들만이 쟈크딘 님께서 창조한 괴수들을 사냥할 정식 허가증을 얻은, 정말 진짜배기 전사들이요.”
순간 쟈크딘이라는 말에 나와 플린시아는 동시에 눈빛이 흔들렸다.
“후후, 맞아요. 쟈크딘 님께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권능을 지니셨죠.”
나는 일부러 잘 아는 척 그를 떠보았는데, 예상대로 사내 입에서 정보가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이곳 말란타라에 서식하는 수백 종의 괴수를 그분께서 창조하셨소. 어쨌든 이왕 이곳에 온 것, 환영하는 바이고 웬만하면 여기서 왔던 길로 돌아가시오. 아까도 말했듯이 상류 지역으로 올라갈수록 위험한 종들이 많으니. 그럼 알아서 가시오. 나는 아직 사냥할 게 남아 있어서.”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숲속으로 향했다.
잠시 후 나는 플린시아에게 말했다.
“쟈크딘이라는 자, 능력도 좋군. 괴수를 창조하다니. 왠지 그가 신 같은 느낌이 드는데. 물론 아직 신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일단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보자. 거기 가면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테니.”
그러자 플린시아는 무슨 이유인지 나를 보며 싱글벙글했다.
“후후, 신을 본 적이 없다고?”
“그래, 본 적 없다. 그건 왜 물어?”
“신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어.”
“뭔 말이야?”
“바로 내 눈앞에 있잖아. 바로 나.”
“…뭐라는 거야…….”
“내 차원에서 나는 신과 같은 존재였지. 아니, 신 그 자체였어. 일명 마법의 신.”
“쳇, 됐고. 그만 올라가자.”
“나 정말 신이라니까.”
“진짜! 그만해라.”
“신이 별건가? 신의 능력을 지녔으면 신이지. 나는 회색 마법으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솔직히 그건 뭐,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회색 마법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은 없지만 그 공력은 정말이지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강대했으니, 어쩌면 정말 살아 있는 신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가 내게 말했다.
“너도 신이야.”
“무슨 헛소리!”
“솔직히 아직 나는 네 그 공력, 아니 능력을 가늠하지 못하겠거든. 후~ 살다 살다 내가 추정하지 못하는 존재는 형도, 네가 처음이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앞장이나 서!”
“…….”
* * *
반나절 후.
“여기는 뭔가 분위기가 다르네.”
내 말에 플린시아 역시 동의했다.
“아까 거기보다 공기가 무거워.”
“그걸 중력장이 강하다는 거야. 아무튼 이거, 은근히 기대되는데. 이번에는 뭔 놈들이 나올지.”
“그런데 형도야, 아까 그 사람이 여기에 자신보다 급이 높은 레이어 사냥꾼들이 있다고 했지?”
“그랬지. 레이어 사냥꾼.”
그때 플린시아는 손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사람들이 보이는데, 혹시 그들이 아닐까?”
“흠, 일단 가 보자.”
“아니, 그들이 이쪽으로 오는데.”
은빛 군장에 은색 검을 든 두 명의 남자와 여자. 그중 여자가 우리에게 물었다.
“당신들, 레이어 사냥꾼인가요?”
나는 시치미를 떼고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소.”
그러자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