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고향으로 돌아가게나.”
스승의 갑작스러운 말에 유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
“근 30년일세. 자네를 데려온 지. 애초 내가 시공 전사 프로젝트라는 것을 기획하고 자네나 수많은 아이를 납치한 것 자체가 못할 짓이었지.”
유성은 그 말에 그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그때 페이튼이 낡은 가방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네를 지구에서 데려올 때 함께 가져온 것들이라네. 전함은 내일 출발할걸세. 그동안 정도 많이 들었지만 이제 자네에게 자유를 주고 싶군. 자!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고향 무림으로 돌아가게나. 우리 이별식은 여기서 하기로 함세.”
페이튼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쓸쓸히 자리를 떴다.
유성이 가방 안을 살펴보니 각종 무공 비급서들,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인 슨 철검 하나.
그건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무림맹에서 하급 무사로 수십 년간 몸담아 왔고,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이라 할까. 유성은 한참 동안 그 철검을 바라보며 고향의 향수를 달랬다.
이젠 낡고 거의 부스러져 가는 철 조각. 한데 그의 눈빛이 갑자기 번뜩였다.
“아, 이게 있었군.”
그동안 시험해 본 30만 개의 초합금 외에 유일하게 제외된 산화철(산소와 접하게 되면 녹이 슬고 산화되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철 성분)인 것이다. 유성은 그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이곳에도 철은 존재한다. 다만 인위적으로 제련되어 녹이 슬지 않은 합금의 철검들도 수없이 실험해 보았다. 그리고 문뜩 떠오르는 신검대법 비급서의 맨 앞 장에 적힌 글귀.
[철은 자연으로 환원되며 인간과 유일하게 호흡이 되는 자연체 산물이다. 본 대법을 익히는 자는 본연의 힘을 융화시켜야 성취를 이룰 수 있도다.]
인제 보니 이곳은 초도고 문명에 의해 아예 철광석 광산조차 특수 화학제를 투입해 수만 년 전부터 아예 산화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철검은 그가 아직 실험해 보지 않은 마지막 금속일 수가 있는 것이다.
유성은 가부좌를 틀고 곧바로 녹슨 철에 신검대법을 시전했다.
이어 자기 신체 일부분인 손가락을 심안으로 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똑같은 아누 배열. 그걸 생각으로 옮기는데, 이는 그가 20갑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간 나선형의 소립자가 역회전하며 한 번도 보지 못한 타원형의 이상한 행태로 변화했고, 그게 순식간에 확대되어 밤하늘의 우주 전체를 덮을 만큼 커졌다.
그런 광경이 비록 그의 심안으로만 보일지 몰랐지만 그 역동하는 거대한 우주는 순간 폭발하여 섬광을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아.
합위일체는 성공으로 끝났다. 몸체와 철검으로부터 섬광이 일며 심안이 저절로 닫혔다.
유성은 흥분했다.
“성공인가!”
신체에 느껴지는 묘한 기분. 검을 들어 살펴보니 녹은 제거되었고, 색상이 훨씬 검게 변해 있었다.
과연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당장에는 그 자신도 뭐가 뭔지 몰랐다. 다만 자신의 신체 아누와 검의 아누가 결합을 하여 심안에서 사라졌다는 것 외에는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풀풀 솟아나는 공력에 스스로 내공 수위를 측정해 보니.
‘갑자 계산이 안 되는군.’
갑자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대해지다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성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신검대법을 익히며 접했던 수십만 개의 초합금들, 그 원자들이 스스로도 모르게 몸 안에 축적되어 있었고, 조금 전 철과의 합위일체와 동시에 촉매제로 연쇄 반응을 일으켜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신검대법에 융화가 된 것이다.
유성은 자신의 성취를 페이튼에게 알렸다. 그는 뛸 듯이 좋아해서 어쩔 줄을 모를 정도였다. 이 시급한 상황에 그가 시공 전사 프로젝트의 목적으로 키운 제자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유성은 한 가지 궁금한 상황을 그에게 물었다.
“스승님, 저는 철검을 통해 합위일체에 성공했지만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해졌다는 사실이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에 페이튼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비록 무림인은 아니지만 그동안 유성을 통해 무공에 대한 상당한 고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자네가 검 한 개가 아닌 은하계에 존재하는 초합금 30만 개와의 신검대법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일세. 그간 10년 동안 수련하면서 자네 몸에 응축된 그 원자들이 모두 합해진 것이지.”
그 말에 유성은 내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렇다면… 그 힘이라는 것이……. 실제로 유성은 아직도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그 공력 수치나 내공 수위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페이튼은 철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군. 이 검이 자네의 합위일체와 함께 은하의 모든 것을 담아냈으니 일명 ‘은하검’이라 칭해도 과언은 아니겠군.”
유성은 내심은 중얼거렸다.
‘은하검이라…….’
【 시공 전사가 되다 】
스킬, 회상의 묘미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내력이 있었다니…….’
무림인이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일단 우주로 와서 새로운 무기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 자기 스승과 함께 오랜 세월 연구하고 드디어 어마어마한 무기를 창조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회상의 묘미 마지막 문구를 외치게 되었다.
“은하검이라고?”
더 이상 녹이 슬고 부러진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철검을 고이 품에 안고 중얼거렸다.
“아. 이건 진짜 물건이다, 물건…….”
* * *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시공 아카데미에 온 지 1년 만에 이곳을 졸업하고 드디어 정식으로 시공 전사의 자격을 따냈다.
보통의 경우 그 수련 코스는 최소 3년으로 잡는다. 그렇다고 3년 이내에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평균 기간은 5년에서 7년으로 본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1년 만에 이곳을 졸업하고 시공 전사가 된 것은, 시공 아카데미 역사상 두 번째 일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는 카이였고, 내가 두 번째라 했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한 명의 시공 전사가 더 탄생할 것이다. 바로 나와 같은 반인 플린시아였다.
대마법사인 그녀, 회색 마법의 잠재력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던가. 그녀는 이곳에서 가르치는 과학적 체계의 전투 기술과 공력의 증폭 기술을 잘 소화해 내어 기존의 능력을 훨씬 더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 오늘 아카데미 상부에서 전해졌다.
그건 바로 나와 플린시아가 같이 한 조를 이루어 드디어 시공 전사로서 첫 임무를 받아 레무리아 차원으로 배정받은 것이다.
나와 플린시아는 뛸 듯이 기뻐했다. 우린 그동안 함께 수련하면서 매우 친해졌기 때문이다. 그게 우정이든, 사랑이든 우리는 서로 단정 짓지 말자고 했다. 지금은 둘 다 학생 관점에서, 그리고 동료로서 편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유지하자고.
어쨌든 우린 앞으로 시공 전사로서 함께 여정을 시작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와 플린시아는 배정 임무지인 레무리아 차원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 * *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폭설이 내리고 있어 시야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중이다.
“형도야,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원래 이곳 지역이 온화해서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것으로 들었는데.”
나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그 자식 말을 믿은 우리가 바보지. 쳇, 시공 아카데미를 졸업한 나와 너에게 제일 먼저 사기 친 자식이 바로 아테온이라는 사실 벌써 잊었어?”
“그럼 어떡해. 아테온은 우리보다 한 기수 높은 시공 전사이자 선배인데.”
“선배는 개뿔. 내가 알기로 그 작자는 시공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데 7년이 걸렸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1년 만에 졸업한 우리를 시기하는 것도 같고. 지금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여기 배정 임무지인 레무리아 차원은 원래 그가 먼저 배정받은 곳이거든. 그런데 극구 우리한테 그 임무를 떠넘긴 거 보면… 흠. 아무래도 뭔가 있어. 분명히 뭔가 그 속셈이 있을 거라고.”
그럴 때마다 플린시아는 웃는다.
“후후, 역시 상상력은 끝내주는군. 너는 차라리 소설 작가로 전업하는 게 나을 뻔해.”
“내가 비밀 하나 가르쳐 줄까?”
“비밀?”
“사실 나 정말로 소설 작가 지망생이었거든.”
“후~ 어쩐지. 상상력이 장난 아닌 것 같더라.”
“소설은 상상력만 가지고 쓰는 게 아니야. 정확한 사리 분별력과 판단력, 통찰력 등등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능력도 있어야만 작가가 되는 거지. 나는 그런 관점으로 아테온을 살펴볼 때 분명 뭐가 있다는 거지.”
플린시아는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그래, 예비 작가님. 네가 그 선배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뭔데? 어디 한번 들어 보자.”
“그는 우릴 속인 것 같아.”
“속이다니, 뭘?”
“여기 레무리아 차원 말이야. 일부러 우릴 여기로 보내서 곤란하게 하려는 것 같아. 어디 한번 개고생해 봐라, 그런 식으로 말이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사실 나는 레무리아 차원에 대해서 뭔가 들은 정보가 있거든.”
“정보? 그거라면 시공 아카데미 상부에서 우리에게 전달한, 내용이고 나도 아는 얘기인데.”
“그 얘기 말고! 전에 이곳에 와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행방불명된 다른 시공 전사에 대해서 말이지.”
플린시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여기서 시공 전사가 행방불명되었다고?”
“그것도 한둘이 아니래. 무려 네 명.”
“네 명이나!”
“그리고 그다음 후임자가 바로 아테온인데 그 작자가 상부에 이런 저린 핑계를 대고 결국 우리를 대신 여기에 보내게 했다고.”
그제야 플린시아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음, 왜 여기서 희생자들이 그렇게 많았지?”
그때 나는 품 안에서 홀로그램 기기를 꺼내 다시 작동시켰다.
“레무리아 차원에 대한 정보를 띄워 줘.”
순간.
파팟.
허공에 홀로그램 글씨들이 쭉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레무리아 차원에 대해서 알려면 그 전에 레무리아 차원을 창조한 아나키 창조주의 태곳적 신화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상공, 펄럭이는 저 비루한 날개의 축 늘어진 깃털이 보인다. 허나 아나키가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이 이미 피딱지로 가득한 그 면상에 죽음이 가까워져 온 것을 눈치챈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의 연인 헤라가 다가와 만류한다. 달의 왕 가란시스는 그녀의 호소 짙은 눈물에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아나키의 나머지 소멸 대신 한쪽 견갑을 베었다.
분리된 조각으로부터 천공에 흩뿌려지는 선홍빛 잔해(殘骸)와 편린(片鱗)들, 그것들은 곧 천계와 지상의 모든 차원으로 무수히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날의 거사(擧事)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가란시스의 역모가 끝난 후 실로 오랜만에 보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거대한 바위를 짊어진 늙은 천공 전사들과 자신들을 채찍질하는 반란군 간수들, 그들은 죄수들의 무한한 에너지 원천을 억누르기 위해 채찍의 자락에 ‘질서의 흔(痕)’을 담아 강하게 내리치지만 아직도 역동적인 천공 전사들의 기개를 감당 못하고 절단되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