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 나는 왜 산다는 게 늘 외줄 타기일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벌써 이른 새벽이 다가왔다. 인제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꿈을 꾸는 것.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꿈이 꿔져야 뭐든 하든 말든 할 텐데.
설령 꿈을 꾼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미 페타레 존재로부터 공력의 서를 얻었다. 과연 공력의 서 말고도 더 강한 아이템이 있는지 상당히 회의감이 들었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희망이 없어, 도저히……. 그래, 그냥 죽어 버리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도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막세우스는 최대한 나를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일지 그 방법만 연구하고 있을 테니. 나는 그게 너무도 두렵고 무서워.’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단도를 집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걸로 내 목을 그으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더 이상 하루하루 공포에 살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아이템을 먹지 않고 그냥 편안한 영면에 들겠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존재감 없는 무의 세상으로, 영원히 그렇게 그냥…….”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나는 드디어 결심을 굳혔고, 단도를 집어 들어서 내 목에 갔다 대었다.
그런데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그조차 겁이 났다. 참으로 나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자결하는 것도 두려워 마음대로 못하는 졸렬한 인간. 그게 바로 현재 내 모습이다.
갑자기 술이 먹고 싶었다. 나는 지난번 초인계에서 아서가 내게 준 선물인 술 가죽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도수가 무려 70도. 거의 알콜 수준이다. 아서는 그것을 내게 줄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말 괴로운 일이 있다면 그걸 마셔. 그럼 한결 나아질 거야.’
그래, 자결하기 전에 술이나 실컷 먹고 죽어야겠다.
나는 가죽 통 뚜껑을 열고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잠시 후 머리가 어지럽고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독한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탁자에 엎어졌다.
* * *
눈을 떠보니 내 앞에 헤르시몬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괜찮아?”
“응…….”
“공력의 서를 먹고 여기서만 3시간을 잤어.”
꿈속이었다.
“후~ 그랬군.”
“이제 정신이 들어?”
“그래, 난 멀쩡해. 그런데 나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줄래.”
“알았어.”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가 버리자마자 나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후~ 꿈속이라도 희망이 없어……. 이곳 마계에서 공력의 서보다 강력한 아이템이 존재할 리 없고. 아~ 미치겠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이제 여기 마계 서고가 마지막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포식의 권능으로 먹을 만한 아이템이 더 없나 마계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남은 한 가지 희망, 마계 서고를 다시 한번 뒤지는 것이었다.
헤르시몬은 그런 내 모습이 안타까워 또 묻는다.
“아니, 케논 검하고 공력의 서까지 먹었고, 지금은 마계 역사상 최강의 전사가 되었는데 뭐가 아쉬워 더 강력한 무기를 찾는다는 거야? 난 모두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럼 이해하지 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아무튼 그 이유나 알고 싶어. 혹시 강자의 위치에 올라서니 뭐 고독하다거나 아니면 인생의 덧없음에 그 이상의 탐욕으로 그걸 억누르는 그런 정신병의 일종은 아니겠지.”
“아냐, 그런 사치스런 병에 걸릴 여유 없어.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야.”
“아, 정말 답답하네. 지금 너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이 마계에서 누가 있다고 그래?”
“여기 마계 말고.”
“마계가 아니면.”
“현실에서.”
그 말에 헤르시몬은 나를 불쌍한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쯧쯧,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되었구나. 이래서 무조건 강한 것도 좋은 게 아니구나. 너를 보니 이제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아야겠어. 미치는 것보다 그게 나을 테니까.”
“헤르시몬, 뭐 다른 단서라도 없을까?”
“황제야, 인간은 다 너처럼 그렇게 욕심이 지나치다 못해 멍청한 거냐?”
나는 결국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후~ 있을 리 없지…….”
그렇게 다시 두 달이 흘렀다.
포기하니 이렇게도 마음이 편했다. 포식의 권능이고, 아이템이고 나발이고 그냥 이대로 마계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며 사는 게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꿈에서 깨어날 일만 없다면.
‘깨어날 일만 없다면…….’
빌어먹을. 그런데 언제가 이 꿈에서 깨어나겠지. 그리고 그때는 내 제삿날…….
화창한 날씨였다. 나는 마계에서 제일 번화한 도시 한복판에 나와 이곳저곳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마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꽤 되는 것 같은데 그동안 아이템 찾느라 정작 이곳을 살펴볼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
“마계라면 마의 기운을 타고난 자들인데, 그들도 자기들만의 법과 질서로 이토록 평화롭게 살고 있구나. 참, 사람 선입견이라는 게 얼마나 무거운 건지…….”
어찌 본다면 인간 세계보다도 훨씬 더 묘한 매력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흔히 한국에서 정이라고 말하는 그 개념이랄까. 내가 마계의 피를 받고 막상 마계인이 되어 보니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흠. 이건 의리, 그리고 신뢰 같은 게 합쳐져 그 이상의 교감을 포함하는 것 같은데.’
순간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아냐!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바로 내 문제가 세상 그 모든 것을 분석적으로 따지려는 거야. 후~ 그렇다면 사랑이나 정도 왜 그런지 따져야 하건만 결국 답이 없잖아.”
나는 또다시 도로를 걷다가 이내 시장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마계인들도 고기와 채소, 과일 등을 주 식자재로 썼고,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여기서도 상점 주인과 손님들 간에 흥정이 시끄럽게 오간다.
물론 좀도둑도 보이고.
“저놈이 내 과일 한 개를 훔쳐서 달아나고 있어! 누구든 붙잡아 줘!”
한 마계 소년이 과일을 품에 꼭 안고 사람들 사이로 헤집고 도망치는데, 주인은 마치 과일 하나조차 잃지 않으려는 듯 사력을 다해 뒤쫓았다.
결국 머지않아 건물 모퉁이에서 잡히고 만 소년. 주인은 과일부터 뺐고 손으로 마구 소년의 머리를 때렸다.
“이 어린놈이! 감히 내 과일을 훔쳐 도망쳐?”
퍽! 퍽! 퍽!
인정사정없이 패는데, 나는 저러다 소년이 어찌 될까 봐 냅다 그쪽으로 가서 말렸다.
“그만해요.”
“너는 뭔데 참견을 해.”
그때 나는 그에게 돈을 주며 말했다.
“과일값은 이거면 되겠죠?”
주인은 돈의 액수가 많은 것을 보더니 이내 화를 가라앉히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너 이 자식, 운 좋을 줄 알아.”
“과일은 주고 가야죠.”
그에게 과일을 건네받고 소년에게 그것을 주었다.
“받아.”
그런데 소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내가 거지인 줄 알아요!”
나는 다소 당황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너한테 이 과일이 필요한 것 같아서.”
“저는 훔치면 훔쳤지 구걸은 하지 않아요.”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 녀석아. 구걸하는 것보다 훔치는 게 더 나쁜 짓이야.”
“아니거든요. 구걸은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거고, 훔치는 것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고요.”
“하하, 어린놈이 궤변을 늘어놓는 것 좀 보게나. 아무튼 이놈아, 이거나 받아라.”
“그리고 나 놈 아니거든요. 엄연히 이름이 있다고요!”
“그래, 이름이 뭐냐?”
“알아서 뭐하게요.”
나는 녀석의 당돌한 태도를 보고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후후,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흠, 어쨌든 훔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해라.”
“내버려 둬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아버지가 죽어요.”
“아버지가?”
“온몸이 불구가 되어 전혀 일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제 여동생은 벌써 3일을 굶었다고요. 내가 가지 않으면 큰일 나요.”
그 얘기를 들으니 사정이 너무 딱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소년의 손을 끌고 일단 시장에서 이것저것 식자재들을 샀다.
“자, 이제 네 집으로 나를 안내해 주겠니?”
뜻밖에도 소년은 내 제의를 받아들였다.
“집이 누추해요.”
“그런 건 상관없다. 아저씨도 어릴 때 무척 가난했었거든.”
“아저씨도요?”
“그래, 난 너보다 더 심했어. 뭐, 나흘 동안 먹을 게 없어 물만 먹고 산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소년은 내 말에 서서히 관심을 기울였다.
“나흘은 너무 심했다.”
“이제 네 이름을 물어봐도 괜찮겠니?”
“메튜.”
“메튜. 후후, 이름이 좋구나.”
“웬만하면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마시죠.”
“아니, 정말 좋아서 그래.”
“아저씨는 이름이 뭐죠?”
“글쎄다. 나는 이름이 조금 발음하기 힘들 텐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요.”
“허~”
“다 왔어요.”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의 집 앞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그 전경을 살펴보며 그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소년이 가난한 줄 알았지만 이건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너무도 허름하고 낡아 보였다. 아니, 이건 집이 아니라 그저 나무와 나뭇가지에 천막 하나 달랑 걸어 놓았다고나 할까.
“여기가 집이니?”
“마치 이런 게 집이라니, 하고 믿지 않는 말투군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됐고요, 그거 시장에서 산 거 주고 가세요.”
그때 안에서 들려오는 사내 목소리.
“메튜, 왔니?”
“네, 아버지.”
“그런데 손님이 오신 것 같은데 누구시냐?”
“모르셔도 돼요. 그냥 먹을 거 사서 잠깐 여기 온 것뿐이에요.”
“그럼 당장 안으로 모셔야지!”
“이분 바쁘신 것 같아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메튜, 나 하나도 안 바쁘거든.”
“거기 밖에 계신 분, 안으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시지요.”
잠시 후.
전형적인 마계인 사내. 입술 위로 튀어나온 송곳니와 초록색 피부, 인간에 비해 육중한 체구. 그는 침대에, 아니 바닥에 누워 나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시구려.”
“네, 처음 뵙겠습니다.”
“흠, 당신은 순수 마계인처럼 생기지 않았군요.”
“네, 저는 인간과 마계인의 그 중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연유가 있겠지만 묻지 않겠습니다. 요즘 마계에 유입되는 외부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렇게 먹을 것을 사다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이 아프신 모양입니다.”
“네, 보다시피 전신마비입니다. 3년 전 마계와 천계의 전쟁 중에 이런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고생이 많군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후후, 이게 다 제가 지은 업보이죠. 저는 전쟁 중에 많은 천계인을 죽였습니다.”
“전쟁 상황 중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래도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나는 의아했다. 죄책감이라니? 마계인들도 그런 뉘우치는 감정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똑똑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메튜 말인가요?”
“네, 아버지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때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 아비 때문에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죠. 가족 부양에 생필품과 식자재 등, 녀석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니 저는 그저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루빨리 죽어야 부담을 덜어 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