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앞으로 여러분이 받을 수업 내용을 말하겠다. 각자 책상 앞에 보이는 홀로그램 화면을 보며 새로운 전투 기술을 익힐 것이고, 또한 공력을 늘리기 위해 에너지 증폭 기술을 배울 것이다. 이는 여러분이 자신들의 차원에서 익힌 마법이나 검술과는 차원이 다른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적용되는 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이어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학이 무슨 말이지?”
“처음 들어 보는데.”
“에너지이니, 증폭이니 하는 말도 생소해.”
“어쨌든 내가 시공 전사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이건 뭐, 전혀 별개의 세상에 온 기분인데. 도대체 마법과 검술을 상회하는 더 놀라운 전투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공력의 증폭 기술은 또 뭐야. 갑자기 현재 내가 지닌 공력이 더 세진다는 이야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수련관에서 또 수백 년간 폐관 수련을 해야지만 가능한데.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들만 있는 것 같아.”
저들이 저렇게 의문을 가질 때마다 나는 그나마 조금은 희망이 생길 것 같았다.
‘과학이라……. 그래… 나는 적어도 그 개념을 알고 있으니까……. 비록 지구 과학 문명이 여기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일지라도…….’
* * *
그로부터 한 달 후.
세상 어디를 가나 한 가지 불변하는 진리는 있는 법. 나는 이곳에서도 그것이 또 진행된다는 사실에 흥미로웠다.
지구에서도 그런 말이 있다. 둘이 모이면 대립이 되고, 넷이 모이면 반드시 두 패로 나누어져 말 그대로 패거리가 생긴다는 것.
현재 교실의 입학생 일흔일곱 명이 두 패로 나누어져 마흔일곱 명의 막세우스파와 서른 명의 플린시아파가 서로 대립한다는 사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진리를 적용한다면 그 두 개의 패거리는 서로 정반대 기질을 지지고 있다.
즉 선과 악, 빛과 어둠, 착함과 나쁨, 뭐 그런 성질이 만나면 언제나 충돌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고.
하지만 지금의 이 두 패거리는 나로서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다.
뭐라 할까?
서로 누가 정의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리 선한 부류나 나쁜 부류 때문에 갈라선 건 아닌데…….
쉽게 설명하자면 각자 경지에 올라선 존재 중 가장 강력한 대상을 추종하다 보니 두 패로 갈린 것 같았다.
마흔일곱 명의 막세우스파는 말 그대로 막세우스라는 자의 전투 능력이 워낙 출중하다 보니 그를 따르는 입학생들이 생긴 것이고, 서른 명의 플린시아파는 그 나름대로 궁극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능력을 보고 무리가 따른 것이다. 나는 후자에 속해 있었다.
내가 플린시아파에 들어간 것은 맨 처음 이 교실에 왔을 때 그녀와 말을 튼 이유 하나였다.
사실 나는 막세우스와 플린시아 중 누가 더 전투 공력이 센지 가늠조차 못하는 아주 약한, 미미한 존재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남자보다 여자를 더 선호한다. 그리고 예쁜 것도 따진다. 그다음에 그 사람의 성격, 뭐 영혼의 맑음.
그렇다고 내가 플린시아라는 대마법사의 속을 들여다본 것도 아니고,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하물며 막세우스가 그리 나쁜 전사로 보이지는 않았고…….
어쨌든 그것도 인연이겠지, 하며 그저 내 선택이 옳기를 바랄 뿐이다.
대립은 언제나 그렇듯 하나의 시발점이 바로 서로 간의 경쟁 구도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들은 다 같은 시공 전사 후보들로서 현재 자신들에게 주어진 수업을 따라가느라 무척 애를 먹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지금까지 배우 마법이나 검술의 개념이 과학으로 접목되면서 그 용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움, 그리고 생소한 전투 기술에 공력 증폭 기술까지 너무도 난해한 수업이 이들의 머릿속을 쥐어뜯는 중이다.
그래도 난놈은 난놈일까. 그런 과학 개념조차 무시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공력이 강대한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막세우스와 플린시아였다.
막세우스는 차트라 차원의 군주이다. 그의 전투 계열은 검이고 마법 또한 적용한 혼용 검술이랄까.
그는 그 차원에 존재하는 일곱 개 대륙을 통일시키고 절대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하기야 이곳 교실 안에 있는 모든 입학생은 대개 그 정도의 경력은 지니고 있다. 다만 차원도 급수가 있나 보다.
막세우스가 몸담은 차원에는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조차 못하는 몬스터들이 가득했고, 그것을 평정할 정도라면 다른 차원의 전사들이 감히 덤빌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대마법사 플린시아는 말 그대로 마법의 궁극의 경지에 이른 그 차원의 군주였다. 그녀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알키온 차원 그 세계 자체가 마법과 마나로 가득하다는 것. 그래서 그곳에서는 태어나자마자 마법 능력을 부여받게 되어 있다.
즉, 막말로 개나 소나 다 마법사이니 그중에서도 진짜배기 마법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 어렵게 오른 마법사의 위치에서 그들이 가장 꿈꾸는 것이 바로 대마법사, 즉 수천만의 마법 주민들과 마법사들의 최고 자리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하늘에서 별 따기 정도가 아니라 우주에서 별을 삼킨다는 표현이 좀 나을 듯하다.
사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이유인지 나를 자신의 말동무로 생각하고 문제가 있으면 상의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관심이 이 교실에서 가장 나약한 나에 대한 동정심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자존심이 더 상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조차 생소하게 느껴지는 여기 시공 아카데미 시스템의 과학 원리를 내가 잘 이용하니 내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나에게도 그런 쓸모가 있었으니 말이다.
“이형도 님, 여기 버튼을 누르면 반복 재생이 된다고요?”
“네, 거기 푸른색 버튼이 그거고요. 멈춤 버튼은 노란색입니다.”
“아, 네. 고마워요.”
“고맙긴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요.”
“네, 알겠어요. 그런데 형도 님은 어떻게 이런 마법 도구들에 그리 익숙하죠?”
“마법이 아니라 과학이기 때문이죠.”
그럴 때마다 그녀는 골치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아, 과학……. 과학이라는 게 제가 대마법사에 오르기 위해 했던 마지막 수련 과정인 ‘마나의 응축 기술’보다도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한편으론 그녀가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이 부담될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 주변에서 쳐다보는 부러움과 시기의 눈빛이다. 뭐,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여자들은 외계 종족 아레나와 꿈속의 마계 종족 헤르시몬, 그리고 초인계의 신관 레아다. 그리고 이곳 시공 아카데미에서 플린시아는 앞서 언급한 그녀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건 바로 ‘카리스마’라고 할까.
물론 플린시아도 여자답게 부드러운 말투와 친절함이 묻어나는, 그런 괜찮은 여성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없다. 그건 공력이 차이가 너무 큰 이유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는 아주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 전에 그 이유를 용기 내어 직접 물어봤는데, 그녀는 자신이 흑사술을 익혔기 때문이라 했다. 나뿐만 아니라 자기 차원에서는 자신을 두려워하다 못해 스스로 자결까지 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사실 그 때문에 그녀는 절대자의 자리에 오르고도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바로 그것을 누르기 위해 백마법을 다시 배워야 했고, 그 효과는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흑마법의 기운과 새로 익힌 백마법의 기운이 충돌하는 바람에 몸이 터질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상상 못했다. 그 둘의 상극된 기운이 충돌에서 융합으로 바뀌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의 회색 마법이 만들어졌다는 엄청난 사실. 물론 나는 그것을 기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의 마법의 힘이 수백, 수천 배로 증폭된 것이 바로 회색 마법 덕분이고, 대마법사로서의 그 입지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과학이란 개념과 그 도구인 홀로그램 시스템을 이해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버거운 시선이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건 상대파의 대장 막세우스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제기랄, 저 자식은 아무래도 플린시아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래서 항상 내가 그녀의 옆에 붙어 있는 게 못마땅하고.’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그 눈빛을 오히려 남자인 내가 더 잘 알 수 있다는 사실.
‘분명 좋아해. 후~ 이거 불안한데. 가뜩이나 여기에서 내 위치가 바닥인데 저놈한테 미움을 받았다가는 바닥은커녕 그 한참 밑인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의자로 돌아갔다. 그러자 플린시아가 의아했다.
“형도 님?”
“아, 저기. 저도 공부해야 하니까 웬만한 건 그냥 혼자서 습득하세요.”
“…….”
* *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이제 내 입장은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막세우스파도 아니고 플린시아파도 아니다. 나는 그냥 나이다.
과연 그런 중도 입장이 지금 내게 유리한 건지, 불리한 건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을 만들지 않는 방법이 나을 것 같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 교실의 학생 중에는 그렇게 악한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형도 님,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플린시아가 또 내게 다가왔다. 이제는 그녀의 청을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도 너무 미안할 판이다.
“아, 네. 플린시아 님.”
“여기 홀로그램의 전투 기술 프로그램 말이에요. 이거 가상으로 들어가서 습득하려고 하는데 자꾸 오류가 생기는데, 그 문제가 뭔지 도저히 제 능력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서요.”
그리고 그녀는 골치가 너무 아픈지 자기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순간 나는 이번에도 교실 창가에 앉은 막세우스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역시나 나를 무섭게 바라보는 저 질투의 눈빛, 점점 살벌해지고 있는 와중에 지금은 눈알이 뒤집혀 죽일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재빨리 플린시아의 얼굴에 손을 대 떨어지게 하려 했는데, 순간.
쪽!
그녀가 내 뺨에 키스를 하고 만 것이다.
“헉! 지금 뭐한 겁니까!”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후후, 형도 님에게 고백할 게 있는데요.”
순간 나는 심장 멈출 뻔했다.
“하, 하지 마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요, 고백해야겠어요. 저 사실 형도 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는 다시 뺨에 키스를 했다.
쪽!
그때 이리로 다가오는 막세우스.
“너 이 새끼!”
내 멱살을 붙잡고 나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억! 이거 놔!”
“네 주제에 감히 플린시아를 넘봐!”
내 멱살을 잡은 그의 손아귀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나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컥! 컥!”
그때 플린시아도 놀라서 막세우스를 말렸다.
“너 왜 그래! 당장 형도 님을 놔줘!”
하지만 막세우스는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죽여 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