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순간 아테온이라는 사내가 화를 냈다.
“시로코! 그게 무슨 망발인가! 폐기물이라니! 이자는 엄연히 인간일세. 그런 표현은 옳지 않아.”
“이 구역에서는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입학 거절당해서 자기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굳이 뭐……. 그나저나 이자는 누가 여기로 추천을 한 거죠?”
“흠, 카이 님일세.”
“카이 님이라고요? 흠, 이해가 가지 않네. 그분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게다가 그분은 그저 흔한 시공 전사가 아니라 초시공 전사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상부에서 카이 님이 추천한 그자를 다시 검증해 보기로 한 걸세. 자네 말대로 초시공 전사 카이 님이 그와 같은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일세.”
“거참? 이상하네요. 카이 님이 선택한 자라면 저 역시 이자를 포탈로 돌려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는데요.”
“자. 자네 임무는 여기서 끝내고, 이자는 내가 데려갈 테니 마취를 풀어 주게.”
잠시 후 나는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누운 이동식 침대를 끌고 가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그제야 그는 내게 말했다.
“나는 시공 전사 아테온이라네. 이제 자네는 시공 아카데미로 다시 입학할걸세.”
“입학이요?”
“아카데미 관계자들은 초시공 전사 카이 님의 안목을 믿기로 한 것이고, 자네는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셈이지.”
“기회라니요……?”
“오늘은 그만 말하게. 내일부터 정말이지 힘든 수업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럼 잠시 더 휴식을 취하기를 바라네.”
순간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떠보니…….
“여긴 어디지……?”
푸른 전경, 이윽고 초원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인지했다. 그다음 하나둘씩 보이는 사람들, 그들도 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신기하게도 내 시야가 넓어지는 듯 주변이 이내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각기 다른 차림새, 군장, 로브, 하얀 천, 망토, 사슬 갑옷 등등 각지 각색의 인종이지만 다들 숙연한 채 나처럼 앉아서 그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공 아카데미라……. 아카데미라면 학교를 뜻하는 말인데……. 학교라… 학교. 그렇다면 여기서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건가?’
또한 시공이라는 의미는 뭔지 궁금했다. 내가 살던 지구에서 시공의 개념은 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런 말로써 우주와 차원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그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후후.’
어쨌든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 조금으로 웃기기도 하고…….
주변의 이 사람들도 나처럼 수업받기 위해 교실의 학생들처럼 선생님이라도 기다리는 것인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정말 우리에게 그 누가 나타날지 호기심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자격 미달이라는 그 말이 내심 자존심을 상하게도 했다.
‘쳇, 그동안 꿈속에서 그 많은 레어 템을 먹고도 모자라 전설 템인 케논 검과 공력의 서를 섭취했던 내가 여기에서는 입학조차 못하고 쫓겨날 뻔하다니…….’
그때였다.
우르릉, 쾅!
쏴.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나는 다소 당황했고,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야말로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다.
‘뭐야? 교실이 없으니 야외 수업이라도 할 모양인데 이렇게 비까지 맞으며 미동도 하지 않다니. 도대체 여기가 아카데미라는 곳이 맞나……?’
그때 갑자기 폭우가 멈추었고, 먹구름이 개면서 태양이 다시 이 드넓은 초원 아래 강렬한 빛을 내뿜어 어느새 뜨거운 열기로 훅훅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엄청난 공력이 실린 음성이 어딘가로부터 들려왔다.
- 각 차원에서 온 머저리들! 시공 전사 아카데미 제28 회차, 1만 3천 6백 55명의 입학생을 환영하는 바이다.
순간 나는 음성만으로도 공력이 너무 강대하여 내 귀와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고,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신음을 흘렸다.
“아아!”
그런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오히려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했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공력의 음성.
- 자네들은 이후로 시공 아카데미 28회차의 당당한 입학생으로서 정식 수업을 받게 되며 그 자세한 절차는 학장인 내가 아니라 각자의 교관들에게 듣게 될 것이다. 물론 배정 또한 교관들의 지시에 따르고 교실로 이동하면 된다. 이상.
공력의 음성은 거기서 끝이 났고, 내 앞쪽으로 황금빛 로브를 착용한 한 백발노인이 스르르 나타나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 내 앞에 있는 일흔일곱 명의 입학생에게 내 소개를 하겠다. 나는 앞으로 여러분을 지도할 교관 킬리온이다. 그대들 일흔일곱 명이 한 그룹으로 나뉘게 된 이유는 바로 초시공 전사 카이 님에 의해 추천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카이 님은 내 스승이기도 하다. 나는 그분의 제자이자 시공 전사로서 여러분을 가르칠 명분이 있음을 참고하기를 바라면서 곧바로 교실로 이동하겠다.”
순간 눈앞에 섬광이 일었다.
파팟!
그리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아. 여기는……?”
진짜 교실이었다. 교단 앞쪽으로 칠판이 걸려 있고, 그 앞에는 정말 책상과 걸상들,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이 놀랍게도 지구에서 내가 경험했던 고등학교의 그 교실과 거의 흡사했다.
이런 너무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나는 그만 입을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내가 이룩했던 레벨 업과 전투력,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마어마한 공력을 지닌 내 앞에 이런 구시대적이고 낡은 교실이 펼쳐지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물론 지금의 교실은 지구의 학교 교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지 않게 보이는 첨단 과학 기기들, 은은하게 광채를 내는 책상과 걸상, 칠판은 마치 3D 화면을 보는 듯, 아니면 마법이 걸린 듯 생전 처음 보는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또한 인제 보니 교실 천장은 그저 뭔가를 막아 놓은 패널이 아닌 실제 밤하늘의 별 무리 모양이 그대로 보이는 우주의 장엄한 광경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친숙한 것은 지구에 있을 때 흔히 사용했던 노트북이나 스크린 등이 홀로그램처럼 허공에서 터치할 수 있게끔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마법의 힘이 아니라는 뜻이었고, 정말이지 내가 상상 속에 그려 왔던 초고도 문명을 지닌 어느 행성의 과학을 접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내 옆으로부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실례해도 될까요?”
고개를 돌려 보니 한 여성이었다. 초록빛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보랏빛 눈동자를 한, 어느 마법 차원으로부터 온 존재.
“아, 네.”
“뭣 좀 물어볼게요. 여기 허공에 나타난 이 그림들 말이죠. 분명 마법의 힘이 적용된 것 같은데 제 능력으로 살펴볼 때 그것도 아닌 것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니 못했던 마나의 에너지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원리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아세요?”
얼핏 느끼는 것인데, 지금 내게 질문을 던진 이 여인의 공력은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 그 이상의 마법 소유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나로서는 이런 추측이 들었다.
마법의 원리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 별개의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 바로 초고도 기술을 갖춘 첨단 문명만이 그 해답이 될 것이라는…….
물론 당장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그건 저도 잘 모르는데요.”
“아, 정말 신비롭군요. 저는 제 차원에서 가히 적수가 없을 만큼 독보적이고 궁극의 경지에 오른 일인자였는데 막상 여기 시공 아카데미에 오니 처음 제가 마법사가 되기 위해 그 첫걸음을 뗄 때의, 그런 초보가 된 느낌이 들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나는 이 여자보다도 훨씬 낮은 능력의 초라한 입학생. 자격 미달로 거의 퇴출 당할 뻔했었다.
그때 여자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아, 제 소개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저는 알키온 차원의 대마법사 플린시아라고 해요. 물론 그대 역시 초시공 전사 카이 님의 추천받았겠지만요. 전투 계열이 어떻게 되죠?”
그 질문에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전투 계열이 뭔지 나도 아직은 정리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대충 대답은 해야 했기에 입을 열었다.
“검 계열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성함은?”
“이형도입니다.”
“이형도 님이요? 발음이 독특하네요. 하기야 이곳에는 차원 여러 곳에서 오신 분들이 많으니까요. 언어도 다 다르겠지요. 그런데 신기해요.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제가 말하는 언어는 도대체 뭐죠?”
언어 번역기를 통해 자동으로 언어 변환이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지만 그녀가 첨단 과학 문명의 산물을 알 리가 없고…….
“네, 저도 신기합니다. 후후.”
그때였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백발노인, 아까 초원에서 자신을 교관이라 소개한 킬리온이었다.
“지금부터 다들 내 말을 경청하기 바란다. 우선 여러분이 시공 아카데미에 오게 된 그 취지를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일흔일곱 명의 입학생은 나처럼 이곳이 처음인지라 저마다 몹시 궁금한 표정으로 교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이어 킬리온은 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시공 전사는 말 그대로 시공을 넘나들며 각 차원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수호자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공 전사는 한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해 다차원에서의 활약이 요구되며 그만큼의 전투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각자 한 개 차원에서만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수준 가지고는 감히 시공 전사가 될 자격은 절대 없다. 그래서 조홀 우주, 르페드니아 은하 성단 연합 소속의 이곳 시공 아카데미에 여러분이 원래 지닌 그 능력을 키워 줄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비해 놓았다. 이후 수많은 수업과 시험, 관문을 통해서 진정한 전사로서 성장해 나가는 여러분을 기대한다. 이상.”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홀 우주, 은하 연합이라니? 그건 무슨 뜻이지?”
“아마 차원의 다른 이름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시공 전사가 다양한 차원을 넘나들며 활약한다고 했는데, 그거는 정말 가슴이 마구 뛰는데.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러게. 적어도 나는 내 차원에서는 절대 군주였고, 적수가 없어 늘 고독에 몸부림치며 살았는데 여기 와서 새로운 목표가 생기니 그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어!”
이 교실 안에 있는 입학생들 거의 모두는 그런 부푼 기대를 지니고 있었지만 나는 그 반대 심정이었다.
‘빌어먹을. 얘기를 들어 보니 나보다도 훨씬 강대한 존재들인데, 이거 기죽어서 못 살겠군.’
어쨌든 교관은 내 예상대로 시공 전사의 정의를 내려 주었고, 나는 적어도 지구에서 과학 문명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이들보다는 조금 유리한 입장에 서서 수업받을 것에 위안으로 삼았다.
교관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