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착!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카이는 씩 웃었다.
“큭, 아슬아슬했넹!”
헤록스탄은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
그 심정을 나도 동감하듯 고개를 저었다.
‘우연이 아니야…….’
베아체는 더 극성을 부렸다.
“헤록스탄 님,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냥 쉽게 죽이면 될 걸 가지고 왜 자꾸 장난을 쳐요.”
그제야 헤록스탄이 다소 진지하게 말했다.
“자, 장난 아닌데…….”
“장난이 아니라니요.”
“조금 전 공격은 아르칼로 발검 기술 제3 단계…….”
“저는 검술 용어 같은 거 잘 모르고요! 당장 죽여요.”
헤록스탄은 이전의 허술한 자세를 바로 고쳐 잡고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초인계에서 아르칼로 발검 기술 제5 단계를 쓸 줄이야…….”
그는 검을 들어 이번에는 정식으로 공력을 높인 뒤 검강 공격을 시도했다.
회리리릭!
아까와는 다른 파공음.
순간 그의 검 끝으로부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크앙!
검강은 이내 어느 형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슥.
그것은 어부가 정성 들여 꿴 그물망처럼 가로세로로 촘촘히 이어졌다. 이어 카이가 그 어떤 방향으로도 피하지 못하게 그 반경만 수십 미터는 되어 보였는데, 나는 이번만큼은 카이는 절대 그 공격 범위를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로군.’
예상대로 검강의 그물망은 카이를 그대로 덮쳐 버렸다.
치치직.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타는 듯하며 나는 연기.
헤록스탄은 한숨을 쉬며 베아체에게 말했다.
“흠, 저놈의 요리는 먹지 않겠어. 내가 아무리 식성이 좋다지만 새까맣게 탄 살은 영 아니거든.”
베아체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긴 줄었지만 뭐, 그래도 양은 충분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는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저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려 미쳐 카이를 구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게 했다는 죄책감.
‘아, 이런 실수를! 도대체 내가 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거지. 아, 이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검강 그물망 가운데로 뭔가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들려오는, 독특한 투정.
“에고! 뜨거워라. 이러다 삶은 오리처럼 푹 익는 거 아냐?”
순간 헤록스탄과 베아체는 어리둥절한 채 그곳을 바라보았다.
“뭐예요?”
베아체의 놀람에 헤록스탄은 더 믿기지 않는 표정, 정말 직접 그 얼굴을 보면 가관일 것이다.
“아, 아냐. 절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고!”
“뭐예요? 그 의미는. 설마 놈이 살아 있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나 역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설마 저 고열의 검강 그물망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기우는 이내 반전의 서막을 알리고 말았다.
폭!
그물망을 찢고 나온 한 인형.
대가리부터 내밀며 웃는 녀석.
“큭.”
카이였다.
베아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 놈이 살아 있어요! 이게 말이 돼요?”
헤록스탄은 눈앞에 광경을 인정 못하는 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베른 종족 제6색 황금빛 전사이다. 그런 내 검강의 5단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자는 내 나라에서조차 오로지 나보다 한 단계 위인 제7색 검빛 전사들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저놈이!”
순간 나는 그의 말 내용 중 검빛 전사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검강 5단계를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고. 흠, 검빛 전사들이라…….’
베아체 역시 당황해서 소리를 쳤다.
“아무래도 저놈, 괴물이 틀림없어요. 헤록스탄 님, 아르칼로 발검 기술 5단계가 끝인가요?”
“아, 아니?”
“그럼 몇 단계까지 있나요?”
“7단계…….”
“당장 그걸 시전해요!”
“나더러 내 필살기를 쓰라는 건가?”
“그럼 어떡해요? 인제 보니 저놈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는 극강 고수 같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체면이 구겨지는데…….”
“지금 그게 문제예요! 당장 우리가 먼저 당할 것 같은데요! 그러니 당장 시전하라고요!”
베아체의 극성에 헤록스탄은 다시 황금빛 검을 들어 올려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이, 이건 정말 자존심 구겨지는 일이군. 어떻게 내가 내 필살기를 저런 송사리에게…….”
“송사리가 아니라 드래곤이라 여기고 마지막 공격을 하라고요! 당장이요. 놈이 우리를 비웃으며 다가오잖아요! 그러니 빨리.”
실제로 카이는 미친놈처럼 히쭉히쭉 웃으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중이었다. 그런 모습은 내가 봐도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와도 같이 소름 끼칠 정도였다.
“큭! 큭! 어디 또 한 번 검강 발사해 보게? 큭, 궁금하네. 이번엔 뭘까?”
베아체가 다시 외쳤다.
“놈은 악마 같아요!”
헤록스탄 역시 이제는 두려움의 표정으로 그의 마지막 필살기인 아르칼로 발검 기술 제7 단계를 시전하려 했다. 그런데 그는 검을 들어 올리려는 동작 대신 지면에 검 끝을 대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 아이템인 대지의 검처럼 말 그대로 대지의 힘을 끌어 올리려는 것인가? 검 끝으로부터 바닥에 균열이 생기고 쫙쫙 갈라지는 그런 형태의 기술. 그럼 좀 실망인데……. 그런 거 말고 다른 형태의 기술이면 좋겠는데.
이제는 저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즐기는 관조자 입장이 되어 버린 듯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후후, 누가 말했었지. 강자의 여유라고……. 그 기분이 이런 건가…….’
그때였다. 헤록스탄이 바닥에 댄 검 끝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되레 그의 머리 위 허공에서 뭔가 형성이 되는 게 아닌가. 그건 흡사 검은 연기 같았고, 스멀스멀 직선으로 천장까지 뻗어 올랐다.
그렇다면 밝은 빛을 내는 검강류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듯 그 검은 기류는 이내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건 바로 거대한 한 인간 형태의 존재. 그런데 뿔이 달리고 충혈된 듯 붉은 눈동자에 온몸에 수북이 털이 난 괴물 존재. 굳이 표현하자면 주로 공포 영화 클라이맥스에 나오는 악마나 악령의 모습이랄까.
그리고 말까지 한다.
[헤록스탄, 그대가 나를 소환했나?]
“그렇소. 내가 대악마 프록시스인 그대를 소환했소.”
[그대는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가?]
이에 헤록스탄은 말을 더듬는다.
“그, 그건 아니오.”
[그럼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소.”
[그럴 만한 이유라니? 뭔가 급했던 모양이군. 그나저나 내가 소멸시킬 자네 적은 누구인가?]
그는 손가락으로 카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놈이요?”
소환물은 카이에게 시선이 갔고, 이내 그대로 허공에 떠서 녀석을 덮치려 했다.
“크크크.”
나는 순간 이번만큼은 카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저 악마에게 느껴지는 공력의 등급이 꽤 고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비교하자면 그다지 신경 쓸 것도 없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이때쯤 내가 나서야 할 것도 같은데……. 저놈은 카이 상대가 아니야.’
그때 카이는 갑자기 검을 들고 자신이 먼저 그 악마에게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마치 나방이 불길에 뛰어드는 것처럼.
그 순간.
파파파팟!
“크아아악!”
카이의 검이 악마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놓았고, 그도 모자라 그 뒤쪽에서 조종하고 있던 헤록스탄에게까지 그대로 몸을 던져 다시 검을 휘둘렀다.
쫙!
순간 헤록스탄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털썩!
분리된 반쪽짜리 몸통 두 개가 양옆으로 쪼개지자 카이는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녀석은 더 이상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소화물이 대악마……. 지랄하고 있네.”
그때 베아체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복도로 도망을 쳤고, 다른 시종들 역시 각자 알아서 마구 밖으로 나갔다.
이에 카이는 검을 뽑아 마법으로 작은 화염을 만들어 내서 여기저기 불을 질렀다.
그러고는 냅다 테이블로 오더니.
기절해 있는 레아와 아서, 그리고 나를 깨웠다.
“정신 차려! 불이야 불이라고!”
그제야 레아와 아서는 의식이 돌아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내가 잔 건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당장 여길 탈출해야 해! 불이 났어! 불이 났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갔어? 우리가 나가야 해.”
그리고 카이는 내게 다가와 나를 깨웠다.
“4,444호! 너도 일어나! 빨리!”
나는 연기하는 척 마지못해 잠결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하품부터 했다.
“아함~”
“야, 인마. 너도 당장 여기서 도망쳐. 불이 났어! 불이라고!”
나는 일부러 깜짝 놀란 척 외쳤다.
“갑자기 웬 불!”
“큭! 멍청한 놈. 보면 몰라? 사방이 화염인데!”
잠시 후 우리 네 명 모두는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고, 화염에 활활 타오르는 성을 바라보았다.
“카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큭, 나도 몰라. 잠시 자고 일어났더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불길이 마구 치솟아 오르더라고!”
아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뭔 일이지. 분명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정신을 잃은 것 같았기에 깨어 보니 왜 이 난리지?”
그때 카이는 내게 다가와서 빙그레 웃었다.
“큭, 자식. 타르켄 전사라는 놈이 잠만 쳐 자고… 쯧쯧.”
“아, 미안. 갑자기 졸음이 와서.”
“됐고, 일단 성 밖으로 완전히 나가자. 에구, 여긴 아무래도 별로 내키지 않는 곳이야.”
녀석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먼저 성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루할 것만 같았던 이번 여행이 저 녀석 때문에 뭔가 흥미가 돋기 시작하는데……. 흠, 또 하나 탐구 대상이 생겼다는 것은 뭐, 좋은 일이겠지.’
* * *
세상천지가 온통 검은색이었다. 해안 절벽 아래 파도치는 바다의 물결도 검은색, 하늘을 가리고 있는 저 양떼구름마저, 주변의 산과 들, 그리고 건물들마저 어둡고 칙칙한 색상…….
그리고 숲 가운데를 헤매는 한 군장 차림의 사내.
그는 바로 지난번 타르켄 1호 전사 레기온을 제압한 초월 타르켄 전사 지드였다.
그의 얼굴 온통 땀범벅이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너무 지쳤는지 결국 수풀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 너무 강해. 상대의 결계만으로도 초월 타르켄 전사인 내가 그조차 견디지 못하고 이런 꼴이 되다니. 빌어먹을! 도무지 이건 말도 안 돼. 아마도 놈은 베른 종족 제7색 검빛 전사임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이리도 마음대로 조롱하다 못해 희롱하다니…….”
지드는 좌절을 넘어서 절망에 이르기까지 했다.
“무섭다, 너무 무서워. 검빛 전사의 권능이 이 정도라면 이미 초인계는 끝장이라고……. 아무리 나 같은 초월 타르켄 전사가 발버둥 쳐 봐야 이건 승리할 가능성이 단 1퍼센트도 없는 게임이라고. 젠장, 허무하군. 너무 허무해.”
그는 이내 무릎을 꿇고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아,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어찌 신은 지상에 초월 타르켄 전사 말고 검빛 전사를 강림하게 하였소.”
그는 이리저리 고통스럽게 절규하다 갑자기 눈빛이 번쩍였다.
“아냐! 우리에겐 그분이 계시잖아! 맞아!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분은 나 같은 초월 타르켄 전사들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궁극의 경지에 있는데.”
그는 갑자기 마구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그분이라면 제7색 검빛 전사들도 꼼짝 못할 거야! 초월 전사들 수백, 수천 명이 와도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을 절대 지존, 초시공 타르켄 전사 카이 님! 아! 카이 님, 저는 왜 당신 생각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는 이내 기분이 좋아졌는지 다시 미친 듯 웃었다.
“하하하, 그래! 우리에게는 카이 님이 계시다! 하하.”
지드는 그렇게 기뻐 날뛰었고, 숲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